봄처럼 따뜻한 불교가 되자
봄처럼 따뜻한 불교가 되자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03.25 2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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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 일전에 소개했던 퓨슈킨의 일화를 다시 들먹이고자 한다.

어느 해 겨울,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모스크바광장을 지나다 보니 혹독한 추위 속에 걸인들이 몰려나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한 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참담한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푸슈킨이 광장 한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늙은 노인이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그래서 다른 걸인들처럼 좋은 몫을 다투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푸슈킨의 발자국소리를 들은 늙은 걸인이 텅 빈 깡통을 내밀며 외쳤다. “제발 한 푼만 줍쇼! 굶어죽기 전에 얼어 죽겠습니다요!”

가련하기 짝이 없었지만 푸슈킨에게는 지니고 있는 돈이 없었다. “나 역시 가난한 형편이라 그대에게 줄 돈은 없소. 대신 글씨 몇 자를 써줄 터이니 그걸 몸에 붙이고 있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도와줄 것이요.”

푸슈킨은 종이를 꺼내 몇 자를 써서 걸인에게 주고 돌아갔다.

며칠 후, 푸슈킨이 친구와 얘기를 나누며 모스크바광장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아 뒤돌아보니 며칠 전에 만났던 늙은 걸인이었다.

“나리! 며칠 전 제게 글씨를 써준 분이 맞지요? 앞은 볼 수 없어도 목소리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리의 말씀대로 그 종이를 가슴에 붙이고 있었더니 그날부터 깡통에 많은 돈이 쌓입니다요. 대체 무슨 내용의 글인지 궁금합니다요.”

그러자 푸슈킨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별거 아닙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았겠지요.’라고 썼을 뿐입니다.”

푸슈킨이 걸인에게 준 것은 돈도 아니고 빵도 아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종이쪽에 불과하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있던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걸인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했던 것이다.

# 봄은 이처럼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갖게 한다. 추위에 움츠렸던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이 녹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봄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게 해준다.

종교도 봄과 같아야 한다.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이 녹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희망을 주어야 한다. 꿈을 주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봄 같은 분이셨다. 스님의 트레이드마크인 ‘무소유’를 떠나 언제나 따뜻한 언어로 많은 중생들의 가슴을 녹여주곤 했었다.

스님은 말씀 한 마디를 해도 세속의 눈높이에 맞추려 노력하셨다. 늘 쉽고 단순한 어휘를 사용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관계를 떠나 그의 말씀을 따라다녔다.

다른 스님들의 엄숙하고 난해한 말씀보다는 법정 스님의 쉽고 단순한 언어 속에서 중생들은 보다 쉽게 희망을 얻고, 쉽게 꿈을 얻고, 쉽게 용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스님은 봄처럼 부지런하셨다. 빨래도 손수하고, 땔감도 손수 마련했다. 그리고 봄처럼 화평하셨다. 자리나 지위를 다투지 않고, 권위도 재물도 다투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던 것이다.

어김없이, 다시 봄이다.

봄처럼 따뜻하고, 봄처럼 부지런하고, 봄처럼 화평하셨던 스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봄이라는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잠든 생명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봄다워야 할 우리 불교계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봉은사의 직영제를 놓고 때 아닌 다툼이 치열하다. 이로 인한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봄은커녕 한파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가 덕망 높은 스님이라는 것에 안타까움이 더하다.

스님이 있어야 할 자리는 높은 담으로 둘러쳐진 법당이 아니라 중생들의 마음속이다. 중생들의 마음을 찾아다니며 아픈 곳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다. 그러함에도 오히려 다투고 갈등하며 중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루 빨리 다툼과 갈등을 털고 일어나 이 풍진 세상에 희망과 화평을 전하는 봄과 같은 불교로 거듭나기를 기원할 뿐이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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