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좌 적명’ 봉암사 안은 희양산 품으로
‘수좌 적명’ 봉암사 안은 희양산 품으로
  • 서현욱 기자
  • 승인 2019.12.3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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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사부대중 1500명 애도 속 영결·다비식 엄수
지난 28일 경북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대웅보전 마당에서 ‘조계종 종립 봉암사 태고선원 수좌 적명 대종사 영결식 및 다비식’이 전국선원수좌회장(장의위원장 대원 스님)으로 엄수됐다.
지난 28일 경북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대웅보전 마당에서 ‘조계종 종립 봉암사 태고선원 수좌 적명 대종사 영결식 및 다비식’이 전국선원수좌회장(장의위원장 대원 스님)으로 엄수됐다.

‘수좌’ 적명 스님이 수행처인 희양산 봉암사에서 훌훌 육신을 벗어 던졌다. ‘수행’ 그 자체이자, ‘개혁’의 정신적 지주였던 스님은 지난 24일 평생 수행처인 봉암사의 희양산과 하나가 됐다.

지난 28일 경북 문경 봉암사 태고선원 대웅보전 마당에서 ‘조계종 종립 봉암사 태고선원 수좌 적명 대종사 영결식 및 다비식’이 전국선원수좌회장(장의위원장 대원 스님)으로 엄수됐다. 부처님오신날 외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해 온 봉암사는 동안거 정진 중, 적명 스님의 떠나보내는 사부대중을 위해 산문을 열었다. 한국불교의 대표 수행자를 잃은 1,500여 명의 사부대중은 그분의 육신을 마지막 보내는 길에 합장했다.

수좌 적명 스님은 간화선 수행자의 표상이었다. 꽤 많은 수행자들이 간화선 대신 다른 수행을 하는 현실에서 적명 스님은 간화선을 수행의 모범을 보였다. 스님은 1939년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니 입적한 올해 세납 81세다. 제주 오현고를 나온 스님은 21살 때 ‘천진도인’으로 불린 나주 다보사 우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법납 60세인 올해 12월 24일(음 11월 29일) 입적했다.

“부처님처럼 진리를 찾는 사람이 되고자 입산 출가”
부처님이 되지 못해도 후회를 할 것 같지 않았다”

적명 스님은 철학적 고뇌 속에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았다. 작가 유철주에 따르면 적명 스님은 육사시험에 떨어진 후 원자력 공학을 공부해서 교수가 되는 것이 출가 전 스님의 꿈이었다. 하지만 적명 스님은 진리를 참구하는 삶을 선택했다. 유 작가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적명 스님의 출가 일화는 이렇다.

“저는 대입 재수를 하다가 21살에 출가를 했습니다. 중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다가 갑자기 출가를 했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고3때는 육사 입학시험에 지원할 정도는 됐어요. 당시 육사 경쟁률이 50대 1, 60대 1 할 때였는데, 필기는 붙고 2차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재수해서 육사에 합격해 복수(?)하고 보란 듯이 다른 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하하.”

유철주 작가에 따르면 출가 전 스님은 출가자들을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모습에 부정적이었다. 홀로 대입 공부를 하던 중 중학교 때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불교단체에서 신행 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그 친구가 부처님에 대한 얘기를 해줬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분이고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그런 분이 왜 계속 살아 있으면서 가르침을 펼치지 않고 돌아가셨느냐고요. 그랬더니 친구는 부처님은 욕망을 버린 분이다, 삶에 대한 욕망도 없었고, 죽음을 기피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통달했기 때문에 죽음 따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대학에 가기 위해 열 몇 가지 과목을 공부하는데 부처님처럼 모든 것에 통달하면 굳이 공부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긴 했습니다. 하하.”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었던 친구의 말이 계속 가슴에 남아 있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분이고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출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혼자 한라산에 올라 며칠씩 고민하기를 여러 번.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결심이 섰다.

“육사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는 원자력 공학을 공부해서 교수가 되는 것이 당시의 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다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결심을 했어요. 부처님처럼 진리를 찾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요. 부처님이 되지 못해도 후회를 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출가 결심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의 대답은 “네가 출가하면 나는 죽는다.”였다. 스님은 어머니의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무덤 만들어 놓고 출가하겠습니다.” 아들의 강경한 뜻에 어머니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스님은 출가를 결행해 부산 범어사로 갔다.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범어사 객실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거기서 만난 스님이 나주 다보사행을 추천했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져 결국 우화 스님을 은사로 수행자가 되었다.

“관세음보살 염불하며 관법수행하다 간화서 수행자로”

적명 스님은 해인사 자운 율사를 계사로 1959년 사미계, 1966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는 출가 초기 간화선 수행을 하지 않았다. 사형 진상 스님의 권유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며 관(觀)하는 관법 수행을 했다. 관법 수행에 매진하던 중 삼라만상 극락 지옥이 눈앞에 보듯이 뚜렷한 것을 체험했다. 대승경전인 <능엄경>에서 ‘수행 과정에 나타나는 마장들’이 당시 관수행 때의 체험과 너무나 유사해 놀랐다고 한다. 그는 “관수행을 통해 천상 천하 극락 지옥을 모두 생시보다 더 생생하게 보고, 굉장한 희열감에 사로잡힌 체험의 자부심 때문에 범어사 동산 스님이나 통도사 경봉 스님 등 선지식들이 ‘그런 수행은 돌아가는 길이니, 화두선을 해야 한다’고 해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25살 때 토굴에서 정진할 당시 다 낡은 <법화경>과 보조국사의 <절요>가 손에 들어왔다.

“몇 권은 사라지고 조각조각 남은 <법화경>을 눈물 흘리며 감동으로 읽었다. <절요>는 앞뒤 몇 장도 떨어져 나갔는데 모두 한자인데 토도 안 달리고 띄어쓰기도 안 돼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운 한문 실력으로 옥편을 찾아가며 3번을 읽었더니, 어느 정도 뜻이 들어왔다. 그 마지막에 ‘수행을 하려면 모름지기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무(無)자’ 화두를 들기 시작했다.”

대승비불설 어떻게 볼 것인가’ 의문에 성철 스님 찾아가

그렇게 스님은 간화선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화두참선에 진력했다. 1966년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하자 스님은 바로 백련암을 찾았다. 그 즈음 스님의 가장 큰 의문은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였다.

스님은 당시 일화를 밝힌 바 있다. 2013년 7월 20일 백련불교재단과 불교인재원 주최로 봉암사를 찾은 ‘성철 스님 수행처 순례단’에게 스님은 성철 스님을 만나 ‘대승비불설’부터 물은 까닭을 소개했다.

스님은 21세에 출가해 대승경전만 읽으면서,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사실 그대로를 옮겨 적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20대의 적명 스님은 대승경전 가운데 부처님 모습과 말씀이 모두 사실인 줄 알았다. 때로는 신심이 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출가 후 4년이 지난 25세 때였다. 스님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스님은 “대승불교 경전이 부처님 열반 후 500~600년 지난 후 후대인이 만든 가짜라고 하더라. 이 말을 듣고 충격 컸다. 그래서 중노릇을 계속할지 말지 고민도 했다”고 말했다.

성철 스님을 만난 28세 때까지 스님은 마음 한켠에 ‘대승비불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결국 찾아가 물었던 것이다.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대승경전이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승사상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초기불교 가르침과 대승불교 사상이 중도라는 하나의 사상으로 처음과 끝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사상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무지의 소치”라는 답을 듣고 서야 의심을 거뒀다.

해인총림 개설과 함께 성철 스님이 방장으로 추대되어 선풍이 일기 시작하던 시기, 28세의 나이로 해인사에 들어간 스님은 이때부터 가행정진을 시작해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당대 선지식인 전강, 경봉, 성철, 서옹, 향곡, 구산 스님 문하에서 법을 묻고 간화선에 더욱 매진했다.

 

적명 스님 법구를 운구하는 만장 행렬.
적명 스님 법구를 운구하는 만장 행렬.

봉암사 조실 마다하고 ‘수좌’로 선방 스님 지도

해인총림 해인사 선원장, 영축총림 통도사 선원장, 고불총림 백양사 선원장, 수도암 선원장, 은해사 기기암 선원장 등을 역임하고,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부터 봉암사에 주석했다. 2018년 조계종 최고법계인 대종사를 품수했다. 하지만 적명 스님은 봉암사 동방장의 주인이자 수좌였다.

봉암사에는 조실이 없다. 적명 스님이 조실 추대를 사양한 탓이다. 11년 전에 봉암사 대중이 적명 스님을 조실로 추대했다. 그러나 스님은 “나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 공부가 다 된 것도 아닌데 조실하며 되느냐, 수좌로도 선방 스님들 공부를 도울 수 있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스님은 수좌로 입적하는 날까지 동방장(東方丈)의 주인으로 대중과 함께 정진, 운력, 공양하는 등 후학에게 수행자의 모범을 보였다.

스님은 허명을 좇지 않았다. 조실이어야 할 스님은 수좌로 지냈다. 허명 보다 수행을 좇았다. 그에게는 총무원장도 허명일 뿐이었다. 봉암사 조실 자리가 비어 있어 봉암사를 봉암사 답게 했다. 자리가 사람까지 버리는 세상에서 스님이 남긴 빈자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수행 정진 중에도 종단 현실 걱정…자승 퇴진 요구

봉암사 수좌로 사는 동안 스님은 ‘수행’과 ‘개혁’의 정신적 지주였다. 나이가 들어 대중과 함께 수행하는 시간은 줄였지만 문답으로 선방 스님들을 지도했다. 그러면서도 종단에 걱정도 컸다. 자승 총무원장이 연임에 도전하자 그는 직접 나서 재임 반대와 자승 원장 퇴진을 요구했다. 돈과 권력에 좌우되는 종단 현실을 크게 우려했다. 스님의 화두 중 하나가 ‘개혁’이었다.

그는 2013년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국불교를 “1994년 종단 개혁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1994년 당시는 서의현 前 총무원장의 개인비리라고 할 만큼 소수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중앙종회 전체와 총무원이 한 덩어리로 묶여서 총체적 부패를 저지르고 있다.“고 크게 우려했다.

당시 스님은 “백양사 도박사건 이후 자승 원장은 사태를 수습하고 명예롭게 물러나겠다는 것을 포함해 당시 수좌회가 제시한 재정투명화 및 도박 연루자 처벌 등 8개항의 제언을 받아들였지만 조치 결과는 이와 정반대였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현 상황에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며 “법을 위해 몸이 망가지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것까지 피하지 않는 정신으로 정진을 해야 폭력과 타락으로 물든 종단이 환골탈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자기만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 30년가량 지속된다면 조계종단이라는 종명이 지속될 수 있겠느냐”며 “더 이상 머뭇거리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망할 조짐으로 꽉 차있다, 그릇을 확실하게 비우고 새로운 판을 짜야 종단의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불교개혁을 원했던 적명 스님은 2017년 9월 <불교닷컴>과 인터뷰에서는 재가불자들이 종단개혁에 나선 것을 크게 환영했다. 또 재가불자들이 종단과 사찰 운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행자나 주지들이 돈을 만지지 않고 재정투명화가 이루져야 한국불교가 되살아 날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당시 스님은 재가불자들이 범불교도대회를 여는 것을 환영하면서도 미안함을 드러냈다.

스님은 “승려 집안일을 승려들이 정리하지 못해 이런 결과를 나았다. 재가불자들이 목소리 높이고, 종단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데 감사하다.”고 했다.

또 스님은 “불교 집안일에 재야의 많은 분들, 사회원로들이 적극 호응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주도해야 할 인데.”라면서 “종단 문제는 스님들만의 일이 아니다. 스님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 데 그렇지 않아 부끄럽게 생각하는 장로들이 많다. 범불교도대회가 총무원장 물러나라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주위에 참석을 독려하겠다.”고 했다.

“종단 부패 근원은 ‘돈’…재정 관리는 재가신도가”

적명 스님은 또 “총무원장은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왔던 '정치인'들이 아니라 참신한 제3의 인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또 “불교계에 퍼져 있는 부정부패의 근원은 명백하다. 속된 말이지만 '돈'이다. 부정부패를 추방하려면 딱 한 가지만 하면 된다. 스님들로 하여금 돈에서 멀어지게 해서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사찰의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 재정 관리에 신도들이 참여해야 한다. 주지들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없애면 주지 자리를 탐하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적명 스님은 두 번의 총무원장 선거 시기 개혁을 열망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염원 때문에 상처도 받았다.

“중생이 불행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없다”

적명 스님을 보내던 날, 대중들은 스님의 법문을 마지막으로 들었다.

“중도는 사랑입니다.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생이 불행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중도의 깨달음은 사랑. 진정한 사랑입니다.”

영결식과 다비식을 엄수하던 28일 희양산의 겨울날씨는 적명 스님의 평소 모습처럼 맑았다. 어산장 화암 스님이 집전하고 해인총림 유나 원타 스님의 사회로 영결식이 엄수됐다. 명종 5타, 삼귀의, 영결법요, 행장 소개, 추도 입정, 영상 법문, 영결사, 법어, 추도사, 조사, 헌화, 인사말씀, 사홍서원, 법구 이운, 다비식 등 영결·다비식순은 여느 장례와 다르지 않았지만, 선명한 희양산의 바위처럼 굳건하던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던 사부대중은 울음은 집어 삼켰다.

장의위원장 대원 스님(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은 “일생을 청풍납자로 일념 수행정진 하셨으니 그 선지는 향수해(香水海)가 깊다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봉암사 종풍을 드날리시고 수행가풍을 바로 세우셨으니 그 공덕과 업적은 수미산이 높다 해도 비할 수 없을 것”이라며 “아직 간화선이 한국과 세계화로 정착되지 못하여 더 많은 지도와 가르침이 절실한 때 본래 서원을 잊지 마시고 다시 사바로 오셔서 중생을 깨우쳐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영결 법어를 통해 “만리에 구름은 없음이나 지나감이 있고, 푸른 연못은 맑은 거울과 같음이나 달은 오지 않았다”며 “가져도 가질 수 없고 버려도 버릴 수 없으니 바위 아래 흐르는 물은 유난히도 바쁘게 흐른다”고 애도했다. 종정 스님의 영결법어는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이 대독했다.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오늘 우리는 한국불교의 큰 스승을 적멸의 세계로 떠나보내야 하기에 그 마음은 허허롭기만 하다”며 “봉암사 종립특별선원을 이끌면서도 끝내 조실 자리를 마다하고 수좌로 남아있겠다 하신 대종사께서는 60여 성상을 그저 수좌로 살아오셨기에 비어있는 법호 자리에 감히 수좌라는 경칭을 올려드리고 싶다”고 추도했다.

이어 스님은 “사선팔정 중 초선에만 들어도 희열을 느낄 수 있고 그 희열이 바로 행복이라고 당부해주신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들면서 다시 정진해 나갈 것이니 이 땅의 고요한 빛으로 돌아오시기 바란다”고 했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의정 스님은 적명 스님을 “산에 들어 산에 머무시다 산에서 오온의 때를 훌쩍 벗어버리고 봉황 타고 피안으로 날아가신 님”이라며 “한국불교는 선이라는 사자후부터 시작된 한국선 중흥의 첩경인 봉암사 문경세계명상마을 완공으로 세계일화를 꽃피울 것”이라고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불과 얼마 전까지 꼿꼿이 동안거 결제를 이어오시던 큰스님의 원적 소식에 경북도민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전한다”며 “일상과 수행이 다르지 않다, ‘수처작주’하라는 생전 큰스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도민 곁에 함께 하면서 지역의 변화와 혁신을 앞당겨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청년들이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한국불교 전통 수행법인 참선을 세계인들에게 알릴 세계명상마을 건립에도 힘을 보탤 것”이라고 했다.

봉암사 주지 원광 스님과 적명 스님의 문도회 대표 선타 스님은 인사말씀에서 “큰스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해주신 제방 대덕 스님들과 불자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며 “큰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항상 정진하겠다.”고 했다.

봉암사 성적당 앞 영단을 떠난 적명 스님의 법구는 대웅보전을 지나 만장 행렬과 희양산 자락 다비장까지 사부대중의 염불 소리 속에 옮겨졌다.

일체의 장식이 없이 나무와 숯, 새끼로 만든 다비대 주변은 사부대중의 ”나무아미타불” 염불 소리가 울려 퍼졌고,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사부대중의 외침에 적명 스님의 법구는 한줄 기 희 연기가 속에서 희양산 허공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날 적명 스님을 보내는 자리에는 조계종 원로의장 세민 스님, 총무원장 원행 스님, 원로부의장 대원 스님, 축서사 선원장 무여 스님, 원로의원 지하, 보선, 일면, 자광 스님,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 전 조계종 총무부장 선용 스님,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의정·영진 스님 봉암사 산중 원로 법련·영산·무문·연관·원통·대성 스님,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 범어사 주지 경선, 동화사 주지 효광 스님, 직지사 주지 법보 스님,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등 스님 500여명과 이철우 경북도지사, 윤성이 동국대 총장, 허태곤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 등 사부대중 150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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