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를 말하다
봉은사를 말하다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05.0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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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이 땅의 이름난 사찰 대부분은 산중에 있다. 그래서 한국의 사찰 하면 산자수명한 풍광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봉은사는 천년고찰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 숲에 둘러싸여 있다. 아예 빌딩이 울타리다. 옛날에는 승과평(僧科坪)으로 불리던 드넓은 뜰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서 승과를 보았었고, 그 승과를 통해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騎虛) 등 태산 같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그 승과평도 남서울개발계획에 의해서 빌딩타운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절 뒤로 나지막한 구릉이 펼쳐져 있긴 하다. 이름 하여 수도산이다. 그러나 그것을 산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산문 노릇을 하고 있는 진여문(眞如門)의 현판만이 ‘수도산 봉은사’를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절집 마당 어디에도 산정기(山精氣)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사찰의 위엄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봉은사 마당에는 지금도 신라를 불어가던 천년의 바람이 소솔하게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강력한 불교탄압을 의연히 버텨내며 불교중흥을 모색하던 보우선사의 고뇌도 서려있다.

근대에는 박한영(朴漢永) 선사를 비롯하여 권상로(權相老). 김영수(金映遂). 이운허(李耘虛). 김탄허(金呑虛). 전관응(全觀應) 스님과 같은 근대 석학들이 대를 이어가며 교학((敎學)을 강론함으로써 ‘선교종찰’ 이라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그처럼 교교한 정신과 전통이 있기에 도심의 빌딩 숲, 그 자욱한 속진(俗塵)에 둘러싸여있으면서도 고요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 ⓒ2010 불교닷컴
나는 봉은사에 들 때마다 추사 김정희가 남긴 판전(版殿)이라는 현판 글씨 앞에서 많은 사념을 하곤 한다. 그 글씨는 추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절필작으로 알려져 있다. 과천에 머물며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던 추사가 칠순의 병든 몸을 곧추세워 마지막 혼신으로 남겨놓은 版殿! 두 글자.

그래서일 것이다. 추사의 마지막 혼신이 담긴 글씨라서 저렇듯 힘차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일 게다. 그리고 느리고 서툰듯해서 오히려 맑고 순수해 보이는 것일 게다.

동방이 자랑하는 명필이자 대유학(大儒學)이면서도 목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부처님에 대한 외경심을 버리지 않았던 그의 지극한 불성(佛性)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듯하다. 추사는 ‘版殿’이라는 글씨를 통해 부처님에 대한 자신의 항상심(恒常心)을 남겨둔 것이리라.

그러한 봉은사를 도심포교의 전초기지로 육성하겠다는 총무원의 계획이 원만히 성사되면 봉은사의 불교발전에 대한 기여도는 훨씬 원대해질 것이다. 그러나 봉은사가 진정한 포교도량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선 청정성을 갖추는 일이 시급하다.

근래 들어 이런저런 잡음이 끊이질 않았던 봉은사다. 주지가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물의를 빚는 통에 많은 불자들의 가슴을 졸이게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직영제에 대한 시비로 세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속진(俗塵)부터 말끔히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산과 사명, 또는 보우선사나 추사 같은 이들이 남겨놓은 항상심을 복원해야 많은 이들의 안식처로 사랑받는 청정포교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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