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차를 마셨다
햇차를 마셨다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05.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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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다.
"몇 번 편지해도 종내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이젠 아예 내가 보기 싫은 게로군. 나 보기 싫은 거야 당신 마음이니 어쩔 수가 없고, 당신이 들여놓은 차 마시는 습관만은 책임지시게. 인이 박혀 도무지 차를 마시지 않고는 정신이 들지 않으니 하는 말일세. 답장은 받고 싶지도 않고, 자네 보고 싶은 맘 조금치도 없으니 그저 딴소리 말고 잘 덖은 차나 작년치까지 쳐서 곱쟁이로 보내게."

편지를 받은 초의는 두륜산 야생찻잎을 따러 나섰다.
"곡우절 맑은 날
  노란 싹잎은 아직 피지 않았네
  솥에서 살짝 덖어내어
  밀실에서 잘도 말린다
  잣나무 되로 모나거나 둥글게 찍어내고
  죽순 껍질로 포장을 하여
  바람 들지 않게 깊이 간수하니
  한 잔의 차엔 향기가 가득하다네. (초의차(艸衣茶))"

정성스레 차를 만든 초의는 인편에 차와 답장을 보냈다.
차를 받아든 추사의 답신. "느닷없이 배달하는 인편으로 편지와 차포를 받았소. 차의 향기가 감촉되어 문득 눈이 열림을 깨닫겠구려. 편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살펴보지도 않았다네"

 

 

월요일, 햇차가 배달됐다. 기다리던 차다. 두륜산차가 아니다. 지리산 하동 쌍계차다. 찻물을 끓여 차를 우려내고 다선(茶禪)에 든다. 햇차의 향기가 온 몸을 편안하게 다독인다. 올 봄날은 일기가 어지러웠다. 찻잎에 생채기가 났다. 차의 품질이 예년 같지는 않다. 생산량도 훨씬 줄어들었다. 우전(雨前) 햇녹차가 귀할 것 같다.

해남은 우리 차의 성지다. 두륜산이 있고, 대흥사가 있고, 일지암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흥사와 일지암을 포함한 17개 장소에 차나무 자생하고 있었다. 이 땅에 다성 초의선사가 주석하고 계셨다. 초의선사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초의기념관이 있고, 동상이 있다. 초의선사의 입적일을 맞아 해마다 초의문화제가 열리고 초의문화상을 시상한다.
역사가 있다. 유적이 있다. 행사가 있다. 문화가 있다. 물론 차도 있다. 하지만 해남과 차의 조합은 희미하다. 차하면 보성이고, 차하면 하동이다. 차하면 해남이 아니다.

초의선사의 고향은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943번지다. 무안군은 1997년 초의선사의 생가를 복원했다. 다성사(茶聖祠)를 건립하고, 일지암에 있다 지금은 간송미술관으로 들어간 추사의 절필, '명선(茗禪)'을 빌어 명선관(茗禪館)을 지었다.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기슭에 보림사가 있다. 보림사는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가 '구증구포'의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죽로차와 보림백모차의 탄생지이다.
"초의스님이 그의 스승 완호대사를 위하여 삼여탑을 세우는데 시는 해거도인에게 짓게 하고 서문은 내게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찻떡 네 덩이를 보내왔는데, 바로 그가 만든 것이며 이른바 '보림백모'였다" 초의와 오랫동안 교분을 나눴던 자하 신위의 글이다.
장흥군은 이를 근거로 차문화 부흥에 나섰다. 장흥군 부산면 관한마을은 야생녹차 생태체험장으로 널리 소문이 났다.

하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구례군이 있다. 구례군은 하동을 우리나라 차의 첫 재배지로 인정하지 않을 태세다. 지리산 화엄사의 장죽전(長竹田)이 신라 사람 김대렴이 차 씨앗을 처음으로 심은 곳이라 믿고 있다.
삼국사기는 "차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 당시 쌍계사 자체가 창건되지도 않았다는 점과 각종 사적지들을 제시하며 구례 화엄사야말로 우리 차의 첫 재배지라고 주장한다.

1939년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성된 차밭이 어느새 보성군의 상징이 됐다. 녹차 먹인 돼지고기에, 녹차 목욕탕에, 온통 녹차다. 같은 전라도 땅의 무안과 구례와 장흥과 보성은 차 문화와 차 비즈니스를 위해 오늘도 밤잠을 설친다.

그러면 차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독점하고 있는 해남은 지금?
해남에도 차문화체험장이 있다. 차나무를 가로수로 심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차별화할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은 없다. 핵심은 차 그 자체에 있다. 좋은 차, 현대화된 전통차다. 5월이 되면 해남의 대표적 다인들 중 몇몇은 보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차를 덖는다. 해남 다인이 보성차를 만들어 해남차라고 선물한다. 이것이 해남 차의 현주소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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