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망우당 봉주 대선사 행장(忘牛堂 奉珠 大禪師 行狀)
[행장]망우당 봉주 대선사 행장(忘牛堂 奉珠 大禪師 行狀)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0.01.23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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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국립공원화 산문폐쇄 불사하며 지켜내
망우당 봉주대선사.
망우당 봉주대선사.

망우당 봉주 대선사 행장(忘牛堂 奉珠 大禪師 行狀)

망우당 봉주 대선사는 1936년 2월 8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에서 부친 송해 스님(속명 영식)과 모친 박점례 보살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성은 풍산 홍씨이고 속명은 현희(玄喜)이다.

스님은 13세 되던 해인 1948년 경남 거창군 가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2월 19일 합천 해인사에서 인곡 대선사로부터 사미계를 수지․득도했다.

1950년 해인사 법보학원 사집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법보전문 사교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1955년 동산 혜일 스님을 계사로 서울 조계사에서 보살계를, 1961년에는 역시 동산 혜일 스님을 계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각각 수지했다.

이후 스님은 1953년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성만한 이래 창원 성주사 선원,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울진 불영사 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당대 선지석을 찾아 참선 정진하며 수선안거 중 홀연히 견처를 꿰뚫어 보시고, 오도송을 읊었다.

오도송

洗心春山淨澗濱 봄 골짜기 맑은 물에 마음을 씻어내니
淸明無復可湔塵 맑고 밝아 다시 씻어낼 티끌 없네.
禪堂居參觀妙理 선당에 앉아 묘리를 참관하니
窓影顯本地風光 창 그림자에 본지풍광 드러나네

스님은 수행납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대중들이 오롯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외호대중의 소임도 마다하지 않았다.

1960년 8월 해인사 감찰원에 취임한 이래 제 5~10대 중앙종회 의원, 1971년 평창 월정사 감찰부장, 1973년 가야총림 해인사 주지, 1978년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1981․3년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1983년 총무원 인사위원장, 1984년 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 1991년 조계종 제도개혁위원회 부위원장, 1992년 조계종 초심호계위원회 위원장, 1998년 해인사 선거관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스님은 여러 소임을 맡으신 동안 종단이 내․외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힘썼고, 사찰이 수행도량으로서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도록 외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73년 해인사 주지로 취임하셨을 당시 가야산을 국립공원화하려는 정부에 맞서 산문폐쇄를 불사하며, 우리나라 제일의 수행도량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켜낸 것은 외호대중으로서의 스님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다.

스님은 또한 진주 응석사, 평창 상원사, 청도 용천사, 거창 송계사 등 전국 각지의 사찰 주지 소임을 맡아 기울어져 가던 사격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불법을 널리 홍포했다.

망우당 봉주대선사.
망우당 봉주대선사.

스님께서는 비록 사교입선(捨敎入禪)하는 수좌로서 한 평생 수행정진했지만, 교(敎)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 하신 서산 대사 휴정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경전을 배우고 익히는데 소홀치 않았다. 이 같은 스님의 정진력은 1978년 월정사 탄허 대강백 회상에서 화엄경을 연찬한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스님은 또한 1983년 1월 월정사 강원 수의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1981년 12월 대만에서 열린 ‘제3차 세계불교승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1984년 11월 ‘전일불교총회’ 한국대표, 1986년 1월 태국 방콕 ‘제4차 세계불교승가회’ 한국대표, 1990년 ‘한중불교대표회담’ 한국대표, 1995년 말레이시아 ‘제6차 세계불교승가회’ 총무의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불교가 여러 나라 불교와의 교류를 통해 전 세계 불교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스님은 한 생을 수좌로서, 또 종단의 외호대중으로서 수행정진했다. 스님이 참다운 수행자의 길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만큼은 바늘조차 용납지 않을 만큼 철저하고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이나 상좌들에게 냉정했지만, 속마음은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했다고 문도들은 말한다. 당신이 입적 후 다비 비용으로 모아두었던 수백만 원을 외완위기(IMF)를 맞아 힘들게 살아가는 세인들을 위해 기증한 일은 스님의 자애로움을 돌아볼 수 있는 일화이다.

한 생을 수좌이자 종단의 외호대중으로 정진하신 스님은 불기 2564년 1월 23일 영천 만불산 염화실에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열심히 수행정진할 것을 당부한 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입적했다. 세수 84세, 법랍 71세.

임종게

일생다사여몽로포(一生多事如夢露泡)
멸본래무멸하악멸(滅本來無滅何惡滅)
일념방하창무애가(一念放下唱無碍歌)
부모미생전환일보(父母未生前還一步)

일생사 꿈같고 이슬 같고 거품 같아라.
죽음은 본래 없으니 어찌 싫어할 것인가.
한 생각 내려놓고 무애가를 부르니
태어나기 전 본래면목으로 한 걸음 나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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