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워져라 3
지혜로워져라 3
  • 하도겸
  • 승인 2020.01.3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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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뜻으로 보는 입보리행론 35

'아무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분별해야 할 사물이 없다는 말이 된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의지할 필요없이 자유로운데, 어떻게 마음 앞에 굳이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이 마음 앞에 남아있지 않게 되면, 비로소 구분이나 집착할 대상이 사라져 마음은 완전한 적멸에 이르게 된다.

여의주나 여의수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다 이루게 하듯, 부처도 중생들을 위해 몸을 나투셔서 가르침을 베풀고 계신다. 가루다가 죽기 전에 만든 보호주는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염원대로 여전히 독을 소멸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보살도 보리행을 통하여 부처님이라는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을 세웠기에, 열반에 드신 후에도 여전히 중생들을 위해 법륜[법의 가르침]을 굴리시며 소원을 들어주신다.

적멸에 들어간 부처에게 공양드린다고 해서 어떻게 (현세에서) 공덕의 열매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부처께서는 속세에 머무실 때나 열반에 드신 후에도 헌공의 공덕은 똑 같은 것이라고 경전에 설하셨다. 세속에서든 진여에서든 공과는 똑같기에 부처님께 헌공을 많이 하면 그 공덕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사성제의 진리만 깨달으면 해탈할될 수 있는데 '공성의 진리는 봐서 뭐하려는가! 그러나, 경전에서는 공성의 길 없이는 깨달음이나 해탈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대승의 가르침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대들 소승의 경전은 어떻게해서 성립할 수 있었는가! 대승 소승 둘 다 서로 확인하거나 인정해야 된다고 한다면 먼저 그대들의 말부터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무엇을 근거로 소승이 옳다고 믿고 있는가! 법맥상으로는 대승도 똑같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 법맥이 다른 둘이 서로 인정한다고 진리가 된다고 한다면 법맥이 전혀 다른 베다 등도 역시 불교경전의 진리가 될 수 있다. '대승은 논쟁에 빠져들기 쉽다‘고 해서 배척한다면 법맥이나 전통이 완전히 다른 외도들이나 일부 경전의 내용이 다른 경우에도 역시 자타 모두가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들의 경전 역시 파기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 가르침의 근본은 아라한 경지에 오른 비구이다. 그런데 아직 마음에 집착하여 번뇌가 남은 비구는 아라한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음속에 대상을 향한 번뇌의 습기들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는 것도 역시 어려울 것이다. 번뇌를 끊고서 해탈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번뇌는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카르마의 업력은 남아 있어서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집착이 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고 확신한다면 집착과 관련된 번뇌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미혹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감각을 조건으로 하여 집착이 생기는데 감각은 아라한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감각이 남아있기에 생기는 대상을 향한 마음 역시 어느 정도는 곳곳에 남아있게 된다.

공성에 때한 깨달음없이 다만 잠시 멀어진 마음은 다시 생겨난다. 그것은 마치 선정에서 잠시 마음의 작용이 사라진 것과 같다. 선정이 끝나면 다시 느낌과 분별심이 돌아오므로 바른 지혜를 얻으려면 공성을 수행해야 해탈할 수 있다.

어떤 말씀이든 경전에 들어간 것은 부처님께서 설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대승 경전도 대부분 그대들 소승의 경전과 같은데 왜 인정하지 않는가! 만일 이해하지 못하는 경전의 문장 하나로 인해 모든 경전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소승 경전과 내용이 일치하는 경전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 모든 대승 경전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왜 아니라고 하는가!

어떤 말씀은 [부처님의 안목에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그 보다 낮게] 깨달은 [아라한인] 대가섭 등도 그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대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어느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미혹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보살은] 집착과 두려움의 끝에서 벗어나게 구하기 위해 윤회에 머물버 공성의 성취를 돕는 것은 바로 공성[수행]을 깨달은 열매로 인한 것이다. 그와 같이 [바른 지혜와 공덕을 가진] 공성을 향해 [잘 알지도 못한다고 해서] 비판하거나 공성 수행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괜한 의심을 갖지 말고 바로 공성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공성은 [객관이나 주관을 실재한다고 여기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어둠을 치료해 준다. 속히 일체지(一切智)를 얻고자 하면서도 어찌 [공성을] 수행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존재든 윤회의 고통을 받으며 그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오직 공성만이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는데 어찌 거꾸로 공 수행에 대해서 두려워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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