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봄
빼앗긴 봄
  • 이혜조
  • 승인 2010.06.0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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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불운의 일제시대를 살다간 상화(尙火)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환을 절절이 읊어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을지라도 우리 민족혼의 싹을 틔울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절규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화의 시가 발표된 지 84년이 지난 2010년의 우리는 아예 봄 한철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서해안에서 침몰한 천안함과 함께 한반도의 봄도 침몰하고 만 것이다. 가뜩이나 늦게 찾아온 봄철 내내 우리는 우울해야 했고, 허무해야 했고, 비탄해야 했다. 해마다 흐드러졌던 봄맞이 행사도 숨을 죽여야 했고, 인산인해를 이루던 벚꽃거리에도 스산한 바람만 불어갈 뿐이었다.

그 암울했던 봄이 이제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산기슭에 살면서 봄동산 한 번 밟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늦게나마 찾아간 금정산기슭의 진달래 군락지는 어느새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있다.

그 울창한 수림에 갇혀 세상을 내다보니 가까이 천년고찰 범어사의 고색창연한 당우들이 꽃처럼 곱다. 한편으로는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 보이고, 또 한편에는 드넓은 동해의 푸른 물결이 마침 내걸린 초파일 연등과 함께 넘실대고 있다.

이처럼 아련한 풍광 속에 절터를 잡은 의상스님의 혜안이 감탄스러울 뿐이지만, 그러한 풍광 속에 잠기고보니 한 세월을 어지럽힌 광풍의 흔적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풋풋한 자연의 기운이 정수리를 서늘하게 씻어줄 뿐이다.

자연은 이처럼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다. 그래서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 선생도 ‘간산간수 간인간세(看山看水 看人看世)’라 하지 않았겠는가. 즉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는 뜻으로 자연을 벗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고, 세상을 살펴보는 것이 산수를 노니는 즐거움이라 했다. 자연에 들면 비로소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히려 정신이 황폐되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자연을 벗하며 자연으로부터 여유를 찾는 것도 삶의 지혜라 할 것이다.

자연은 다투지 않는다. 갈등하지 않는다.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술수나 거짓도 없다. 자연 속에는 세속의 오욕이나 풍진의 찌꺼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얘기지만 내가 불교에 귀의하기 전인 젊은 시절 “절들은 왜 깊은 산중에 터를 잡았을까?”를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어느 스님의 말씀이 이랬다.

“산을 오르내리다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반복해서 걸어야 한다. 오르막길을 걸을 때는 선(善)을 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나태와 안일에 빠지기 쉬움을 경계해야 한다.”

이 땅의 큰 산들이 제가 품고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절터로 내준 까닭도 중생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우리 속담에 ‘건너다보면 절터’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이 땅의 큰 산 치고 절집을 품고 있지 않은 산이 없다. 산은 절을 품어야 비로소 큰 산이 된다는 이치를 터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골짝마다 번듯한 곳이면 예외 없이 산사가 자리해 있는 것이다.

하여 이왕 자연과 벗하기로 한다면 고즈넉한 산사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그곳이 자연 속에서 가장 풍광 좋은 곳이고, 땅도 달고 물도 달고 바람 또한 달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절집을 기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자연 속에는 종교가 없다. 절집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 수려한 자연의 조화로움을 들여다보며 빼앗긴 봄 한철의 우울하고 비통했던 마음을 툭툭 털어내는 것도 좋을성싶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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