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왜곡과 진실 호도의 전문가 ‘스핀닥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사실 왜곡과 진실 호도의 전문가 ‘스핀닥터’,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06.04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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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정치는 말로 하는 싸움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싸움입니다.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어 물리적 폭력을 회피시키는 중요한 장치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토지소유권 다툼에서 시작된 고대 수사학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목이 된 이유 또한 정치와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말’이 핵심을 이루는 만큼이나 ‘정치인의 말’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큰 권력을 가진 자일 수록 말의 무게와 책임은 더욱 무겁습니다. 정치권에서는 권력의 크기를 ‘스피커의 크기’로 바꿔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대부분 언론이 권력의 크기만큼 ‘지면’이나 ‘화면’을 할애하기 때문입니다. 선거에 뛰어든 군소후보들은 “스피커가 없어서 캠페인을 하기 너무 어렵다”는 표현을 흔히 쓰기도 합니다.

당연히 큰 ‘스피커’를 가진 권력은 ‘말’을 통해 정적에게는 불리한 상황을 만들고, 자신에게는 최대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는 욕망에 빠지게 되겠죠? 이때 대변인 구실을 하는 홍보전문가들을 ‘스핀닥터(Spin Doctor)'라고 합니다. 스핀닥터라는 용어가 정치용어로 쓰인 것은 1984년, 대통령 후보들이 TV토론을 끝내고 스핀닥터들이 자기 진영에 유리하도록 홍보력을 발휘했다고 쓴 <뉴욕타임즈>의 사설부터라고들 합니다.

스핀닥터의 주 임무는 ‘왜곡’과 ‘통제’

유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인데요, ‘스핀’이라는 용어는 크리켓 경기에서 볼러(bowler)가 공을 던지는 방식을 일컫는 것으로 야구의 ‘변화구’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정당이나 선거 캠프에서 대변인 성명이나, 논평 등을 쓸 때 상대방의 언어로 상대 진영의 모순을 지적하는 식의 글쓰기를 흔히 ‘스핀을 먹인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 더 부정적으로 본다면 스핀닥터란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실왜곡조차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이들을 ‘통제광들(Control Freaks)'라 부르기도 합니다.

영국 노동당에 ‘이미지 정치’를 접목시켰던 토니 블레어 정부에서는 스핀 닥터들이 중용됐는데요, 그들의 역할은 ‘왜곡’과 ‘통제’였습니다. 그들은 수상이나 장관이 한 말 중에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해서 언론에 홍보하고, 당 내 혹은 정부 내의 의견 충돌에 대해서는 ‘분열’로 보도하지 않도록 단속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30일 한-일-중 정상회의 브리핑에서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이 한 브리핑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수석은 “하토야마 총리가 ‘만약 일본이 (천안함과) 같은 방식의 공격을 받았다면 한국처럼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내용이 기사화되자, 일본 측이 청와대에 정정을 요구했고, 청와대는 “일본이 민감히 받아들이고 있다”며 표현수위를 낮춰줄 것을 언론에 요청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산케이 신문>에서 “일본 측은 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부정했다”는 것이 ‘브리핑’ 사건의 전개입니다. 청와대나 나가타죠 1번지 중 어느 한 쪽의 ‘스핀 닥터’가 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동관 수석, 대통령 발언에도 ‘스핀’, 자기 발언에도 ‘스핀’

이미지 정치를 중요시하는 권력은 스핀 닥터들을 함부로 교체하지 않는 듯합니다. 클린턴도 블레어도 그랬습니다. ‘프레스 프랜들리’를 공언한 이명박 정부에서도 이동관 홍보수석은 ‘왕의 남자’라 불릴 정도로 입지가 탄탄합니다. 이 수석은 지난 2월 이 대통령이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연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것 같다”고 한 발언을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라고 축소․왜곡해 브리핑한 김은혜 대변인을 옹호하면서 “조금 마사지한 것”이라고 하면서, 김 대변인의 사의표명도 본인의 뜻과 다르게 해석됐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습니다.

작년 7월에는 한일정상회담 당시 일본 총리가 교과서에 독도의 일본영유권 표기를 해야겠다는 통보에 대해 이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는 <요미우리> 보도에 대해 “그 같은 일이 없다”고 강력 부인하다가 결국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고 번복한 바도 있습니다.

청와대 대변인, 홍보수석의 위치가 막강한 권력이기 때문에, 이 수석 자신에 대한 ‘스핀’ 또한 굉장히 많았습니다. 2008년 4월에는 불법 농지취득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일보에 기사를 내보내지 말아 달라 부탁한 것이 드러나기도 했고, 봉은사 명진 스님에 대한 외압을 제보한 김영국 씨에게 “기자회견하지 말라”고 통화했다는 폭로에 대해서도 ‘허위주장’이라며 명진 스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셈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스핀닥터들의 활동은 정치불신을 낳습니다. 스핀닥터가 비호하려는 권력이 크면 클수록, 스핀닥터의 권력이 막강할수록 시민들의 정치불신은 극대화됩니다. 정치는 ‘폭력’을 이기는 ‘말’과 ‘말’의 싸움이지, ‘거짓’과 ‘거짓’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폭력을 낳기 때문입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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