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적 가야전시 규탄 세미나-①] 의 임나일본부설과 정한론
[매국적 가야전시 규탄 세미나-①] 의 임나일본부설과 정한론
  • 김백
  • 승인 2020.03.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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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 : 남창희(인하대 교수) -토론 : 이용욱(고려대 교수)
대정부 긴급제안 “임나일본부설 분석할 정부 특별조사단 꾸려라”
"국제관계 상식만 동원해도 백제와 야마토 왜중 백제가 상대적 강대국이었을 가능성 높다."
“제철, 토목, 해양지식, 조선술에서 앞선 백제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것은 상식을 뒤엎는 코미디”

[뉴스렙]

I. 임나=가야설의 위험성을 제기하며
 
문재인대통령이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요청한 가야사 복원 사업이 일파만파 소용돌이에 휘말릴 조짐이다. 국내 일부 사학계는 정치권이 역사에 또 개입하는 것이냐며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발단은 영호남에 걸친 가야 문화권이 복원되면 지역갈등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던 소박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리 사학계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모순 덩어리를 노출시킴으로써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중론이 자자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19세기에 일본 참모본무가 기획하고 조선총독부 관변사학자를 앞세워 심어 놓은 임나일본부설의 잔재가 이번에 백일 하에 드러났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 문제를 가장 최전선에서 날카롭게 해부한 사람은 이덕일 교수팀이다. 본고는 우선 국내 고대 한일관계사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논쟁의 전모를 개관한다. 이어서 융합적 시각에서 국제정치학자로서 양측의 주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비교 검토 대상은 임나=가야설에 관련된 두 연구자 출판물의 상반되는 주장들이다. 한편 국내 일부 가야사 전공자들이 백제-왜 관계 연구에서 일본 측 사료만 편식함으로써 더 심각한 고대사 왜곡을 유발한다는 이덕일 교수의 주장을 제3자인 국제정치학자의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나아가 국내 일부 학자들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임나=가야설이 무덤에 들어간 임나일본부설의 유령을 다시 부활시킬 안보적 위험성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19세기말 요시다 쇼인이 깃발을 든 정한론의 기원은 『일본서기』 임나일본부설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자행한 한국사 왜곡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최근 일본 정계에 일본회의와 같은 우익 종교단체가 개입하면서 한일 갈등에 풀무질을 하고 있다. 1300년 전의 적대적 역사 서술이 현대 일본 극우 세력의 對한반도 우월주의 역사관 온존과 한일 마찰에 미치는 상관관계에 대하여 通時的 관점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II. 임나일본부 텍스트와 임나=가야설의 해부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은 신공황후 아래와 같은 이야기부터 시작되는데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9년 기사에 신라정벌 설화가 나온다. 이 텍스트에는 눈에 뜨이는 대목이 있다.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천황(天皇)이라고 한다.”라는 부분이다. 17세기부터 성행한 일본의 국학자들은 이 대목에 매료되었다. 일본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천손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이고, 천황은 성스럽고 절대적인 권위의 근원이라는 사상을 명치유신 세력은 정립했다. 이러한 국가관은 바로 천황제국가와 황도사관으로 직결되었다. 일본은 “특별한 신의 나라”라는 인식은 바로 주변국은 그 권위를 존중하고 복속되어야 한다는 우월주의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종국에는 대동아공영권으로까지 이어진 무모한 팽창주의의 씨앗이 이 대목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같은 신공황후 기사에는 일본과 주변국의 관계를 그러한 관점에서 규정한 내용이 나온다. “고려와 백제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살피고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은 천조국이고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신하국이 되었다는 스토리텔링이다. 이 신공황후 신라 정벌 이야기를 탐독하고 실제로 믿는 사무라이라면 한국에 대해 자연스럽게 우월의식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19세기 말 일본이 정한론의 기치를 들고 조선을 무력으로 병합하는 과정에서도 그 정당화의 구실로 충실히 이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신라 친정(親征)이 임나일본부설의 도입부라면 본격적인 근거로는 신공 49년 (369년?)의 가라7국 정벌 기사를 거론한다. 신공황후 49년, 장군들을 보내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했는데 군대가 모자라 장수 목라근자 등이 합세해서 신라를 격파하고 가라7국을 정벌했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이어서 비리 등 4읍도 스스로 항복했다고 한다. 정벌 후 백제의 근초고왕이 기뻐하며 왜왕에게 앞으로 천년만년 끊이지 않고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고 봄가을로 조공하겠다고 서약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일본 우익의 한국에 대한 우월주의, 경멸의식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전후 일본에서도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200년 동안이나 한반도 남부에 왜의 식민통치기구가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실증적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식민통치기관이 아니라 교역기관이라고 하거나 외교사절이라고 축소·해석하기도 했다. 반면 쓰에마츠 야스카즈는 오히려 자신의 저서 『임나흥망사』에서 임나의 범위를 전라도까지 확대하며 임나가 가야였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내 주류 사학계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이 분야의 대표적 연구자인 김현구 교수가 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신공 49년 기록들이 일부 정황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왜군의 진격로가 바다를 건너 온 원정군이기에는 불합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내륙에서 바닷가로 진군한 기록을 볼 때 이것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위작이라고 추정하였다. 대신 가라7국이라고 나온 지명에 남가라와 가라 등을 모두 경상남북도의 가야 소국들이라고 비정하였다. 김현구 교수는 남가라는 김해로 안라는 함안, 다라는 합천의 가야소국, 탁순은 창원의 가야 소국으로 설명했다.
이덕일 교수의 비판의 칼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국내 학자들은 임나의 범위와 역할을 확대하건 축소하건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데 있다고 말한다. 이덕일 교수와 황순종은 가야가 임나라는 등식 자체가 일본 군부의 공작의 본질이자 실체라고 주장한다. 명치정부의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임나사』를 출판했고 같은 시기 1897년 나카 미치요가 임나=가야라는 주장을 퍼트렸다. 임나와 가야는 전혀 별개라는 것이다. 임나는 가야가 아니고 위치도 한반도가 아닌 대마도나 일본 큐슈에 존재하는 별개의 왕국이었다는 것이다. 임나=가야설을 퍼트린 진원지가 대륙침략을 주도한 일본군 참모본부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가람 연구소 측은 이 주장의 학설의 외피를 쓴 정보전 공작이자 심리전이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어쩌면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임나를 가야라는 전제 위에 논리를 전개하는 일부 국내 사학자들은 일본군 참모본부와 조선총독부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정부와 우리 시민사회는 이덕일 교수의 신랄한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
본고에서는 임나일본부의 고고학적 고찰은 생략하고자 한다. 한일 양국 고고학계가 군사통치기관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이미 오래 전에 폐기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임나가 가야와 동일체라는 전제를 따져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가야가 임나라는 전제를 수용하는 순간,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체들이 소생할 수 있는 여지를 조성해 주기 때문이다.
임나가 가야인가에 대한 가장 1차적인 사료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일본서기』 안에 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 조에 “임나는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에 가로 막혀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축자국은 지금의 후쿠오카이다. 후쿠오카에서 고대 뱃길 거리 개념으로 2천리에 해당하는 곳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에는 한반도 남부 구야한국에서 뱃길로 천리를 가면 대마도이고 다시 바닷길로 천리를 가면 일대국(잇키섬)이 있고 거기서 또 천리를 가면 말로국(큐슈 북안)에 다다른다고 했다. 축자국으로부터 바닷길로 2천리에 위치한 땅이라면 대마도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특히 북쪽은 바다에 가로 막혀 있다는 기사를 보면 확실히 한반도 남부의 지역은 아니다. 혹자는 거제도 같은 남해 섬일 수 있다고 말하지만 거제도는 중국 기록에 의하면 4천리나 떨어져 있다. 이 정도면 임나가 대마도의 북쪽 지역에 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계림(경주)의 서남쪽이라는 기사는 거제도와 부합된다. 하지만 당시 대한해협 해류를 감안하면 대마도 항로가 경주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고 또 거제도에서 남쪽을 향하여 노를 저어야 하므로 위치상 서남쪽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은 있다.
여하튼 『일본서기』와 『삼국지』 「위지」의 정보를 종합해서 판단하면 대마도가 임나라는 가설이 현재로선 가장 일차사료에 부합된다. 물론 두 중일 사료의 기록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전제 하의 추론이다. 일본서기 자체가 고대로 갈수록 허무맹랑한 위작이 많으므로 신공황후를 허구의 인물로 보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숭신천황 기록의 임나 비정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면 임나일본부설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일본서기 자체를 부정하면 하나의 학설로 설 자리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이 분야의 권위자인 고려대 최재석 교수가 그렇게 주장했고 다른 연구자들도 대마도가 임나라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는 지금부터 임나는 대마도라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이야기를 풀어 보기로 한다.
임나가 대마도라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부산대학의 이병선 교수와 문정창 선생 등 여러 사람이 이미 제기한 학설이다. 이병선 교수는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은퇴한 학자로 한국지명학회 고문이기도 하다. 그가 출판한 책 『한국 고대 국명 지명의 어원 연구』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음운학을 고대사에 융합적으로 적용한 연구라고 한다. 대마도에 임나와 관련된 지명을 대마도에서 80여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필자 역시 2006년부터 대마도에 5번 현장 답사를 한 결과 최재석, 이병선 교수 등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심증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 주변의 백제, 신라의 기록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고구려와 백제와 같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작은 성읍국가들끼리 옥신각신하는 듯한 모습이 나온다.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기사에 보면 신라왕의 문에 창을 두었더니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작은 부족국가의 집 앞에 창을 꽂아 둔 것 같은 묘사이다. 황순종 등이 보기에 이상한 점은 계속 나온다. 같은 책에서 스이닌천황 2년에는 고작 비단 100필 때문에 신라와 임나의 원한 맺힌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 백제, 고구려, 신라의 전쟁에 동원되는 병사들이 동네 싸움하는 것처럼 몇 백 명 단위의 부대가 등장한다. 『일본서기』 유라쿠(웅략) 천황 8년 기록에 고구려가 신라에 정예병사 100명을 보내 지켜주려 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고구려도 인색한 나라이고 신라도 보잘 것 없는 나라처럼 보인다. 김현구 교수도 유라쿠 천황 23년에 축자(후쿠오카)에서 500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기록에 의문을 제기했다. 마치 작은 섬에 갇힌 성읍국가들끼리의 전투를 보는 듯하다. 더욱 우스운 기록은 케이타이 (계체) 천황 6년(512년)에 나온다. 임나와 백제는 서로 가까워서 아침저녁으로 다녀 올 수 있고 개와 닭이 어느 나라 것인지 모를 정도라고 했다. 황순종은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는 고작해야 부락 성읍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웃마을끼리라면 몰라도 충청도 전라도의 백제와 경상도 가야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의욕적으로 비판을 시도 한 김현구 교수는 여전히 임나는 가야라는 전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호태왕비의 임나가라를 거론하며 “임나가라는 가야제국 가운데 특정 일국을 가리키고 있다고 이해해도 별 문제가 없을 듯하며 ... 늦어도 4세기 단계에는 이미 한반도 내에 임나라는 지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호태왕비의 임나가라 기록 다음에 안라(安羅)와 신라성(新羅城)이라는 표현이 같이 나오므로 임나가라는 한반도 남부 어딘가에 있다고 본 것일까?
하지만 안라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명확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안라 다음에 바로 나오는 신라성이 한반도 경상남도 어디라고 보는 것도 親신라 세력이 대마도나 큐슈에 있는 가능성을 원천 배제한 특정 전제(premise)의 결과에 불과하다. 큐슈를 포함한 일본 열도에 신라인 혹은 親신라계 세력의 집단 거주 흔적은 흘러넘친다. 6세기 초 야마토 조정의 압박으로 위축된 규슈 야메고분군의 이와이 호족세력도 신라와의 긴밀한 관계의 흔적을 보여준다. 큐슈에도 신라성이 있었다는 가능성을 열면 안라의 위치 비정의 새로운 탐구도 가능해진다.
국제정치학자인 필자가 보기에도 중국과 일본의 역사 사료는 가야와 임나는 별개의 정치체임을 보여 주는 증거들을 남기고 있다. 우선 중국 남조 『宋書』 夷蠻傳(이만전)에 왜에 대한 기록에서 왜 임금 제가 허풍을 떨며 벼슬자리인 안동대장군을 받아 6개국을 대표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6개 나라 중 임나와 가라를 별개의 나라라고 계산하고 있다. 같은 기록에 왜 임금 무는 여기에 백제를 더해 7개 나라를 대표하는 안동대장군 벼슬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일관성 없이 백제를 포함해서는 7개국을 대표하는 안동대장군이고 백제를 뺄 때는 6개국 안동대장군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어느 경우이던지 임나와 가라는 다른 나라여야 만이 나라 숫자 6개나 7개가 된다. 당시 중국 기록은 일관되게 임나와 가라(가야)는 별개의 나라라고 인식했음을 확인해 준다. 김현구 교수도 중국 〈송서〉에 임나와 가라가 다른 나라라고 취급되고 있음을 정확히 지적은 하면서도, 임나가 한반도의 여러 가야 중 하나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정한다.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주장이다.
『일본서기』 자체에서도 동일한 임나 기록에 가라(가야)가 여러 번 등장한다. 28대 센카(宣化) 천황 2년 기록에 임나와 가라를 다른 나라로 분류하고 있다. 이덕일 교수팀도 이점을 지적한다. 둘이 같은 나라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국내 임나 연구자인 김현구, 김태식 교수가 이 의문점에 파고들지 않은 점이 이상하다. 임나가 제후 번국(蕃國) 혹은 일본의 식민지나 직할령과 같은 존재라면 임나왕이 왜국에 사신을 보낸다는 기록도 상식에 맞지 않는다.
황순종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가야와 임나 기록을 추출하여 비교해 보았다. 24건에 달하는 기록에서 562년 한번 빼고 모두 가야와 임나는 시기도 다르게 엇갈리게 나온다. 가야가 임나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임나왕과 가야왕의 이름이 두 기록에서 전혀 다르게 나온다. 같은 책에 『일본서기』에는 아리사등이라는 임나왕이 등장하는데 같은 시기 『삼국사기』에는 김구해라고 한다. 『일본서기』 주장대로 임나일본부가 가야를 석권하고 있었다면 대표자는 한명일 텐데 양쪽 사서에 전혀 다른 이름이 나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가야는 6가야 연맹이고 그것들은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이다. 임나가야가 한반도 가야 연맹체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김현구 교수, 김태식 교수 등 국내 관련 연구자들은 신공황후 49년의 원정군이 점령한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를 모두 한반도 남부 여기저기에 비정했다. 하지만 백가쟁명식의 옹색한 근거로 주장할 뿐 설득력이 떨어진다. 남가라와 가라 등 가야와 연관된 지역이 등장하는 데 현혹되어 나머지 생경한 지명들을 무리하게 한반도 내 비슷한 지명과 연결하려 했다. 일본 규슈의 아리아케해 우측에는 다라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 같은 지명을 太良, 多良 등 여러 가지로 음차한 흔적은 원 지명이 한국 지명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규슈 대학 이토캠퍼스 인근 산 이름 자체가 가야산이다. 가야와 연관된 지명은 규슈 지역에 흘러넘친다. 규슈에서 찾아야 할 임나관련 지명을 왜 한반도에서 찾으려 고집하는지 그 집요함에 혀를 차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임나 비정을 비판없이 국내 가야=임나론자들이 대체로 수용한다는 점이다.
가야=임나설의 모순점을 이번에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첨언한다면 다음과 같다. 황순종 선생을 포함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대로 임나와 가야는 다른 나라임을 반박할 수 없는 결정적인 1차사료가 있다. 여러 비주류 학계에 의하면 『삼국사기』에서는 가야가 562년에 멸망했다고 했는데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그 이후에도 멀쩡하게 등장한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사료 비판을 듣고 억지 주장을 접었을 것이다.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에도 임나가 계속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것을 두고 임나 전문가 김현구 교수는 넌센스라고 그냥 넘겼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유심히 읽어 보면 단순히 편찬자의 실수라고 보기에는 어렵게 임나의 외교활동이 계속 나온다. 600년(추정) 임나가 버젓이 살아서 신라와 싸우자 츠이코 천황이 급히 구원병을 보내라고 했다. 왜군이 출병하자 임나와 신라가 나란히 전쟁을 그만두겠다고 화해했지만 왜군이 후퇴하자 다시 신라가 임나를 공격했다고 한다.
외교사 전공자인 필자가 보기에도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츠이코 천황 18년 (610년 추정) 임나와 신라 사신이 나란히 왜국에 외교사절을 보낸다. 이듬해에도 구체적인 사신 이름을 거명하며 임나가 외교활동을 한 기록이 나온다. 623년에는 신라 사신과 함께 백제식 관직명 달솔을 쓰는 임나의 나미지(奈未智)라는 사신과 왜국을 방문한다. 코토쿠천황 2년 646년까지 임나왕이 왜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온다. 그해가 돼서야 임나가 왜에 세금 바치는 것을 중지했다고 한다. 7세기 중엽은 신라가 적대적인 세력 가야를 병합하고도 한참 지난 시점이다. 가야가 임나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멸망시킨 가야의 외교권을 인정하면서 야마토와 교섭을 한다는 것은 국제관계의 상식에 어긋난다. 힘들게 멸망시킨 가야가 100년 가까이 적대국 왜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방관하는 어리석은 신라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무리한 해석의 이면에는 마치 무력하고 어리숙하게 한일병합을 수용한 을사오적을 바라보는 일본 정한론자들의 조소가 배어있는 듯해서 씁쓸하다.
국내의 임나일본부 비판론자들이 일정 부분 임나일본부가 가야에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다양한 사료 비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덕일 교수팀의 지적대로 임나=가야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않고 그 틀 속에 무비판적으로 안주한 것은 엄밀한 연구자의 태도와는 영 거리가 있다. 임나가 대마의 일부 혹은 전체를 뜻할 수 있고 동시에 『일본서기』 편찬자가 한반도의 가야를 임나인 것처럼 각색했을 가능성도 열어 두었어야 했다.
여기서 국제정치학자로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싶은 점이 있다. 국내 임나=가야설 추종자들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중국, 한반도, 일본이 복잡하게 뒤엉킨 국제관계를 연구하면서 국제관계 전문가들의 이론을 전혀 참고하지 않았다. 종종 가야사 학자들은 다양한 국가들의 행동원리 중 편의적으로 하나의 국제관계 모델을 적용하면서 왜 그런 이론 선택이 정당한지 설명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김현구 교수는 다이카(大化) 개신 와중의 코토쿠(孝德) 천황과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간의 친신라와 친백제 대외전략을 비교하면서 하바드대 스티븐 월트의 일종의 토사구팽 편승 위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도 균형동맹과 편승동맹의 전략 논리에 대한 국제정치학자 월트와 스웰러의 이론적 논쟁을 소화하지 않고 무의식적이고 편의적으로 월트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동일한 무의식적 월트 학설 지지는 일본의 친백제 노선을 설명하면서 반복된다. 연관된 맥락에서 야마토 정권이 두려워했던 나당연합군의 일본 열도 상륙이 왜 중지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에서도 국제정치학과의 융합 검토가 생략되어 있다. 미어샤이머 입장대로 국력 극대화(power maximization)의 의한 절대안보를 추구하려면 나당연합군은 몽골제국처럼 현해탄을 건넜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 월츠 주장대로 안보극대화(security maximization)을 위해 일본 원정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학자인 김현구 교수는 왜 월츠의 설명대로 역사가 진행되었는지 국제정치학자와 협력해서 치밀한 이론 검토를 했어야 했다. 그래야 한일관계를 입체적인 국제관계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나당연합세력 내부의 야마토 일각의 순응(accommodation), 신라의 배신, 당나라 국내 정치 요인, 당나라 배후 토번 등의 위협 등 다양한 변수를 검토하지 않고 단정적으로 기술하였다.
현실 세계에서 하위 국제체제(international subsystem)의 행위자들은 자국의 국내외의 다양한 정치 다이나믹스 속에서 타 행위자의 행동을 입체적으로 관찰하면서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현실 국제관계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국가들의 행동은 변수 한 두개만 놓고 단선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서기』 국제관계 부분에 대한 엄밀한 사료 비판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 공동연구를 통한 융합적인 접근이 아니면 환원론(reductionism)의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도표 1) 『일본서기』의 외교 상대국 언급 빈도수 추이
(도표 1) 『일본서기』의 외교 상대국 언급 빈도수 추이

III. 사회과학으로 본 백제-왜 관계의 실체

 
국내 가야 학계의 가야=임나설을 비판하면서 이덕일 박사는 백제와 왜와의 관계에 대한 주객전도 현상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임나일본부의 관리 주체는 백제라는 학설도 백제가 야마토 왜보다 약소국이라는 『일본서기』의 조작을 수용하는 한, 본질적으로 동북아 고대사의 왜곡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빌려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일본서기』의 숭신천황부터 지통천황까지 텍스트 데이터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 임나, 가야의 국명이 언급된 빈도수를 조사해 보니 아래 <도표 1>과 같다.
사관의 취사선택, 사료의 제한 등 때문에 나라 이름이 언급된 것이 반드시 당대 그 나라와의 관계의 밀도를 비례하여 정확하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해당 시점에 어느 정도는 왜 조정 입장에서 해당 나라들과 관계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점은 특정 천황기에 한반도와 북방 이웃국가의 이름이 몰려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점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양상은 백제, 신라, 고구려 세력의 상호 국제관계에 일본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연루되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두 번째는 백제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야마토 왜에게 가장 중요하고 관심이 많았던 나라는 백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이 대륙과 교류하는 해상 항로로 보면 가야와 신라가 바로 국경을 마주한 나라임에도 한다리 건너에 있는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점은 주목할 대목이다.
 
또한 백제, 신라가 야마토 왜의 대외 교섭에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고 보고 일본과의 일대일 관계 이벤트 중에서 적대적인 내용의 사건만 추려서 빈도수를 조사해 보았다. 아래 <도표 2>에 보이듯이 더욱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되었다.
야마토 왜의 신라와의 적대적인 행위 이벤트의 빈도수는 백제에 비교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다. 더욱이 왜의 백제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꾸짖었다는 정도의 비난 수준을 넘지 않은 반면 신라에 대해서는 공격과 전쟁준비 등 훨씬 공격적인 강도가 강했다. 실제 야마토 왜가 백제에 대하여 군사적인 위협이나 공격과 같은 적대적 행동을 한 사례는 전무했다. 국제관계에서 야마토 왜, 신라, 백제간의 국제관계 이벤트에서 왜와 백제 간에는 적대적인 관계 기록이 사실상 없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텍스트 상에는 백제가 야마토 왜에 늘 굴종적이고 종속적인 국가로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 신라와 비교해 데이터 전체를 보면 새로운 양태가 노출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야마토 조정과 비대칭적인 관계였다고 하지만 신라와 비교하면 양국관계가 매우 우호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독립된 인접 두 나라가 수백 년 간 상호 전쟁의 사례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특수한 관계였음을 시사한다.
 
(도표 2) 야마토 왜의 신라, 백제와의 양국관계 중 적대적 사건의 빈도수 추이
(도표 2) 야마토 왜의 신라, 백제와의 양국관계 중 적대적 사건의 빈도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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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국제관계사를 더듬어 볼 때 이러한 특수한 예는 아마도 세 가지 관계 유형에서 가능하다. 매우 정서적 유대가 강한 후견-피후견(patron-client) 관계, 하나의 군주가 양국을 통치하는 연방국 같은 동군연합(同君聯合), 그리고 압도적으로 우월한 군사력으로 유지되는 제국-식민지 관계이다. 그렇다면 백제와 야마토 왜 어느 쪽이 후견국이고 피후견국인지, 혹은 어느 쪽이 제국이고 식민지였는지 규명하면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이 퍼즐을 풀면 자동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의 실체도 드러날 것이다. 통상 백제와 왜와의 국제관계를 규명하는 열쇠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 인물화상경, 규슈 중부 에타후나야마 고분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융합연구의 예로서 국제정치학의 이론과 개념을 차용하여 백제와 왜와의 국력 우열 관계를 가늠해 보기로 한다.
국제정치학의 동맹이론에는 안보-자율성 교환(security-autonomy trade-off) 모델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안보위협에 대응하여 약소국이 강대국과 동맹을 맺게 되면 안보는 증진되지만 그 대신 외교 자율성이 제약된다는 것이다. 강대국의 외교적 간섭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약소국 입장에서 안보와 자율성은 종종 역비례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백제와 왜가 오랜 기간 동맹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제임스 모로우의 동맹이론을 적용하여 흥미로운 함의를 얻을 수 있다. 『삼국사기』, 『일본서기』와 중국의 사서를 전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야마토 왜보다는 백제의 외교의 폭이 넓고 자유롭게 동맹의 형성 및 파기행위가 관찰된다. 예를 들어 백제는 고구려와도 여제동맹을 체결하고 상황에 따라 고구려에 대항하는 나제동맹을 형성했다. 중국의 남조와 동맹관계를 맺고 북위와 같은 세력에 대항해서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에서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반면 야마토 왜가 고구려나 신라와 동맹관계를 형성한 예는 매우 드물다. 외교의 자율성 측면에서 보면 백제가 자유롭게 외교를 한 강대국이고 야마토 왜는 외교적 자율성에 축소된 약소국의 지위였음을 시사한다. 물론 당대 사료의 동맹형성 데이터셋을 추출하여 엄밀하게 검증한 것은 아니지만 통상 당시 국제관계 상식만을 동원해도 야마토 왜의 외교범위는 백제보다 제한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제임스 모로우의 안보-자율성 교환모델을 염두에 두면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와 야마토 왜 둘 중, 백제가 상대적으로 강대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1= 나라현 코료초의 백제사와 백제식 관모가 나온 큐슈 에타후나아먀 고분
사진= 나라현 코료초의 백제사와 백제식 관모가 나온 큐슈 에타후나아먀 고분

두 번째로 동맹관계의 두 나라 사이에서 기술수준 요소가 작동하는 과정을 짚어 보자. 로버트 길핀과 데이빗 레이크의 패권안정이론의 상대적 기술 수준(relative productivity)이라는 개념을 차용해 볼 수 있다. 세계수준의 주기적 패권질서의 부침을 논하는 패권안정이론을 지역 내 양국 관계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백제가 주도하는 미니 해양 패권질서 이해를 위해 원용해 볼 수 있다. 중국 여러 사서에 중국 요서와 진평의 백제군 기록과 중국 남조의 백제의 영향권을 암시하는 기록은 많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 각지에 백제계 유물과 유적은 수십만 점이 넘는다.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왜계 토기와 극소수 전방후원분에는 비교할 수도 없다. 비교할 수 없이 비대칭적인 유물의 분포 비율은 백제의 세력권이 일본 열도에 상당히 넓게 미쳤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동북아 일부에서 일종의 하위 국제체제(international subsystem)으로서 백제 중심의 하위국제질서가 존재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지역하위체제의 수준의 패권질서의 원동력은 장주기론자 모델스키의 개념을 일부 차용하면 해양력과 제철기술과 같은 당시의 첨단 선진 기술이다.

 
사진= 오사카 카시와라시의 백제계 떼무덤과 칠지도의 이소노가미 신궁
사진= 오사카 카시와라시의 백제계 떼무덤과 칠지도의 이소노가미 신궁

 

『일본서기』 자체에는 일관되게 백제의 선진 학문과 기술이 야마토 왜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국제관계학에 의하면 기술선진국과 후진국의 관계는 기술이 앞선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상식이다. 일본이 제국이었고 백제는 추종하는 국가였다고 묘사한 『일본서기』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수십만 점 이상의 유물과 유적은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오사카와 나라 지역의 백제계 떼무덤과 셀 수도 없는 양의 백제계 유물의 존재는 간헐적인 도래인의 이주가 아니라 당시 야마토 왜에서의 백제인의 대량 식민 활동을 담담히 실증하고 있다.
횡혈식석실고분과 미즈키 토성 등 일본의 주요 유적에 적용된 백제식 판축기법과 토목기술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이 고대 제국이었다고 자랑하는 오사카 사카이시의 초대형 고분 다이센릉(구 인덕천황릉)의 일부가 무너졌을 때 발굴된 갑주 등 유물도 백제계와 가야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이 철의 원산지에 있다. 고대 첨단 기술 수준의 핵심은 제철기술이다. 일본 열도에서는 6세기까지 자체 제철기술이 없었다. 자급능력이 없어서 늘 가야 덩이쇠 혹은 백제의 철제품을 수입해야만 했다. 첨단기술이 없는 나라가 첨단기술을 가진 가야를 무력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넌센스인 이유다. 마치 전투기 생산능력이 없는 약소국이 압도적 항공력을 구사하는 군사 선진국을 무력으로 지배했다는 말과 같다.
백제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백제, 왜의 문화를 종합한 백제 국제네트워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후지키노고분의 유물에서는 동남아로 이어진 백제인의 적극성을 보여준다. 정창원에 보관된 의자왕이 선물로 하사한 바둑판의 스리랑카 재료와 상아 바둑알을 보면 남아시아 및 동남아로 이어진 백제의 국제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모두 백제는 동남아까지 확장된 해양 물류네트워크를 운영했던 해양강국이었음을 입증한다. 한국의 남북조 시대에도 일본은 해양력이 부족해서 신라선을 차터해서 견당사를 보내곤 했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 왜인들이 대한해협을 마음대로 건너다녔다면 그 함대 운용의 주체는 왜인들이 아니라 백제 선단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처럼 제철기술, 토목기술, 해양지식, 조선술에서 앞선 백제를 일본이 지배했다고 하는 것은 국제관계사의 상식을 뒤엎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IV. 임나일본부설과 정한론(征韓論)
 
한일 양국 관계의 악재가 중화되지 못하고 감정의 앙금이 축적되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보수정권 시기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제되지 못한 천황(일왕) 관련 발언이 양국 관계 훈풍에 찬물을 끼얹었다. 우익들로부터 정치적 쇼라고 평가절하된 독도 시찰 때문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일본 여론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바톤을 이어 받듯이 박근혜 정부부터 한일 셔틀외교가 중지되더니 급기야 문재인 정부의 한일관계는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일본 우익들은 물들어 올 때 노 젓는다고, 정치인을 앞세워 소모적 반한 감정에 풀무질을 했다. 징용공 배상 문제에 대해 100가지 경제 보복 리스트 엄포를 놓기도 하고 비자면제 취소와 단교를 주장하는 혐한 우익의 목소리도 커졌다. 일부에서는 신 정한론을 들먹이며 반일 일변도인 한국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극언도 한다. 5030 클럽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에게 시대착오도 유분수지, 과잉대응이라는 외무성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망령인지 정한론을 들먹이는 일부 극우세력의 시대착오는 다시 19세기 말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정한론의 본격적인 실행 세력의 출신지는 초슈번 하기 마을이었다. 실행을 독촉한 것은 규슈 남단 가고시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였지만 처음 거론한 사람은 초슈번의 요시다 쇼인이었다. 1930년에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태어난 요시다는 명치유신 핵심 인물들의 스승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키 신사쿠, 이노우에 카오루, 키도 코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그는 국수주의 미토학파에 영향을 받으며 전략가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리 신성한 신국(神國)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막부에 대항한 존왕파였던 요시다는 서양의 외압을 이웃 아시아로의 팽창으로 보상받으려 했다. 1854년 저술한 유수록에서 그가 남긴 말이다.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를 제후로 삼고 조선을 다그쳐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약 100년 후인 1944년 미군의 반격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대동아공영권의 영역과 유사한 대제국의 꿈을 꾸었던 점이다. 조선으로 하여금 옛날처럼 조공하도록 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이야기를 거론한 것이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 구상은 사실 그만의 것은 아니었다. 에도 말기 미토학파 등 일본의 국학자들은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필수 교재로 가르쳤다. 이 고대 역사서는 하늘에서 강림한 천손이 일본 천황의 뿌리이며 일본은 따라서 신성한 나라라는 민족 우월주의를 고취했다. 현대 우익의 과대망상증의 뿌리이기도 하다. 명치유신 전후에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네 곳의 혁명 주도세력의 출신 번이 있었다. 큐슈의 히젠(현 사가현), 사츠마(현 가고시마현), 쵸수(현 야마구치현)과 토사(시코쿠의 코치)가 서남 지역이라 이곳을 서남웅번(西南雄藩)이라고도 불리운. 이중 사츠마 출신 하급무사 사이고 타가모리는 정한론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조선을 제압하자는 주장이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만을 품고 낙향할 정도였다. 1877년 큐슈를 무대로 벌어진 내란인 서남전쟁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명치유신 직후 일본의 근대화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봉건 토쿠가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방행정 조직으로 재편하는 폐번치현(廢蕃置縣)이 단행되었다. 다이묘들의 위용을 과시했던 천수각과 성은 버려지고 중앙에서 파견한 지사들이 행정권을 장악했다. 사무라이들은 칼을 빼앗기고 월급으로 보장된 봉토도 반납했다. 세금 납부 방법을 바꾸는 지조개정(地租改正)과 무사의 특권적 소득원을 해체하는 질록처분(秩祿處分) 과정에서 무사들은 박탈감에 빠졌다. 불만이 쌓인 무사들은 사이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해외로의 정벌이 무사들의 존재감을 살려 줄 출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조정의 단짝 친구 오쿠보 토시미치는 일본의 국력이 아직 모자라므로 조선 출병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1877년 명치유신의 동지끼리 싸우는 서남전쟁이 일어났다.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 전투에서 실패한 사이고군은 결국 가고시마에서 패배했다.
정한론의 실행 시기를 놓고 대립했을 뿐 동경의 명치유신 정부도 언젠가는 조선을 병합하겠다는 목표는 동일했다. 오쿠보의 우려대로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했지만 힘이 모자란 일본은 서양 강국의 압력에 못 이겨 요동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선의 독립을 위태롭게 한다는 명분으로 전리품을 반환하게 한 것이다. 천황이 히로시마의 대본영(전쟁지휘본부)까지 와서 총력을 다해 얻은 성과물을 빼앗기자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된다. 10년 후 발발한 노일전쟁의 씨앗이 이미 이때 심어졌다.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영향력 확보를 위해 부국강병에 절치부심하게 된다.
요시다 쇼인부터 사이고 다카모리를 거쳐 이토 히로부미까지 이어진 한반도에 대한 인식에는 정한론의 논리구조가 작동했다. 과거에 일본에게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던 나라인데 건방지게 대등한 대우를 요구하므로 버릇을 고쳐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 강점이라는 집단행동을 추동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주의 정체성의 뿌리는 놀라울 정도로 깊다. 17세기 국학파들은 712년의 고사기와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를 정한론의 근거로 삼았다. 특히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관련 기사를 실제 역사로 믿고 조선 침략의 명분을 찾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369년 일본 신공황후의 가야 7국과 4읍을 정벌 후 설치한 식민통치기관을 말한다. 이후 562년 신라에 의해 가야지역의 임나일본부가 멸망할 때까지 약 2백년을 존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임신한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당시 비굴하게 항복을 구걸한 신라왕의 이야기도 그림으로 일본인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임나일본부의 위세에 눌려 백제와 신라는 굽실굽실하며 조공을 바쳤고 심지어 고구려까지 일본을 두려워했다는 스토리텔링이다.
이 주장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지배했다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로 발전되어 일선동조론의 근거로도 이용되고 나아가 만주를 한국사에서 분리하는 남선경영설로 확대되었다. 매우 집요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된 고대사 관련 정보공작인 셈이다. 명치유신 초기 일본 참모본부에서 임나일본부 관련 서적을 출판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아가 임나일본부라는 설화는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항일 심리를 마비시키는 일제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스에마스 야스카즈라는 고고학자의 일본서기에 대한 종교와도 같은 신념은 또 다른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냈다. 1949년 『임나흥망사』라는 책을 펴내면서 오히려 가야지역을 넘어서 임나의 영역을 전라도 지역까지 확장하였다. 일본 고대사학계의 통설과 달리 임나일본부설의 잔영은 일본 출판계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일본 시중의 서점가에서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히라 히요시라는 민간연구자가 정리한 『임나로부터 풀어본 고대사』라는 책의 예를 들어보자. 2017년 출판된 것이므로 최근에 나온 것이다. 그는 우선 일본 고대사학계가 『일본서기』의 방대한 임나일본부 기록을 무시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전라도 광주 월계동 고분, 명화동 등과 함평, 남해 등의 전방후원분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임나일본부와 연결하여 기술하고 있다. 전라도까지 임나일본부를 확장한 쓰에마쓰의 학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가야와 안라가 임나일본부라는 그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련 지명의 한반도 비정이다. 탁순을 대구인 달구벌로 비정하거나 다라(多羅)의 비정에 무리한 억측이 난무한다. 놀라운 점은 국내의 한국 사학계 일부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 점이다. 규슈의 쿠마모토 서북쪽 사가현에는 버젓이 다라라는 지명이 발견된다. 멀쩡히 다라라는 지명이 있는데 조선총독부 관변학자들은 억지로 한반도 남부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가야가 임나라는 전제는 한국 사학계에서도 광범하게 공유되었다. 전혀 의심할 바 없는 통설처럼 일부 고대사학계에 횡횡하고 있다. 임나가 가야라는 전제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 사학계는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어정쩡한 결론을 내고 말았다.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한 것이다. 하지만 가야와 임나를 등치시키는 순간 임나일본부가 회생할 수 있는 숨통을 열어준다고 시민사회는 비판한다. 임나가 가야라는 전제가 바로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이 횡횡하는 징검다리를 놓아주고 있다는 시민단체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
 
 
V. 다원적인 역사학 생태계 복원의 과제
 
국제정치학자로서 사학계의 소위 주류와 비주류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일부 사학계에 만연한 심각한 편의주의적인 사료 편식증의 문제이다. 기존 통설에 배치되는 사료는 신뢰할 수 없다고 치부되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확증 편향의 문제는 논쟁적인 고대사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이 보편성을 확인받기 위해서는 가장 다른 주장, 즉 대척점에 있는 논거들을 인용하면서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상식이다. 필자가 속한 정치학계 논문에서는 입론을 할 때 반대되는 패러다임, 학설, 논점과 비교하는 것이 철칙이다.
아래 <도표 3>은 1945년도 해방 이후 민족사학이라고 자칭하는 비주류 학파의 단행본 출판 빈도수를 전수 조사한 것이다. 소위 재야사학이라는 대학 강단 밖의 연구성과도 포함했다. 우선 보여지는 두드러진 경향은 1982년 이후 증가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2016년 한해에만 35권 이상이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2010년 이후 최근 출판된 이덕일, 복기대 교수 등 비주류 사학의 연구성과들이 주류학계의 논문에서는 늘 외면받기 일쑤였다. 아무리 자신들의 주장과 배치된다고 해도 그 많은 연구성과들을 유령 취급하는 행태가 놀라웠다.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끼리만 서로 인용하는 동종교배 행태는 학문공동체에서는 금기사항이다.
 
 
(도표 3) 비주류 사학계의 단행본 출판 추이(1945-2018)
(도표 3) 비주류 사학계의 단행본 출판 추이(1945-2018)

 

지난 10년간 국제정치학자인 제3자로서 필자는 비주류 사학자들에 대해 유령 취급이나 집단 따돌림에 머무르지 않는 경우도 목격했다. 학술 논쟁을 법정으로 끌고 가거나, 연구비 지원을 중지하라는 외압을 가하거나 언론 플레이를 통해 사이비 사학의 프레임으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 반대되는 학설에게 언어 폭력과도 같은 “유사역사학”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려는 행태도 목격했다.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고려 국경에 대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팀의 국책연구 성과에 대해 영토를 확장하는 연구는 “파시즘의 욕망”에 불과하다며 색깔론으로 논점을 몰고 갔다. 80년대 신군부가 부족한 정통성을 만회하려고 “국수주의 역사학”을 조장했는데 그 유산이 재야사학이라는 주장도 흘렸다.
하지만 <도표 3>은 그 주장이 설득력 없음을 보여준다. 신군부 통치기간인 1980년에서 1987년 사이 비주류사학의 출판물이 급증한 바 없었다. 1980년과 1981년에는 오히려 가장 적은 시기에 포함된다. 오히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비주류 사학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전체시기를 놓고 보면 독재 혹은 권위주의 시기인 1950년-1987년의 평균 출판물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족사학의 단행본 출판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재야사학(민족사학)이 권위주의와 내통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 반대로 권위주의 시기에 민족사학 혹은 재야사학이 지지부진했다는 점을 <도표 3>은 보여주고 있다. 민주화가 공고화되면서 다원적 학문 풍토가 확산되면서 결국 강단사학계에도 근본적인 논쟁이 시작되어 건강한 학문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임나일본부설과 그 디딤돌로 작용하는 임나=가야설은 한일 고대관계와 동북아 고대 국제관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분기점으로도 그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다. 임나=가야설은 명쾌한 사료적 근거도 없이 일부 사학계에서 남용되고 있다. 가야가 임나라거나 가야 일부에 임나가 있었다는 인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유령을 부활시키는 앙콜 요청이라는 시민단체의 성토도 고조되고 있다. 어쩌면 일본회의 소속 출판사들로 하여금 임나일본부설의 한반도 재상륙의 징검다리를 놓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임나일본부설의 정체성을 되살리며 한국에 대한 우월주의적 외교를 주문하는 일본회의라는 우익단체가 거칠게 세력을 늘리고 있다. 종교단체가 신도정치연맹 등을 통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한국에 대한 무모한 수출규제까지 감행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과 가야=임나설이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면 시대착오적인 일본 내 新정한론자들의 사상적 뿌리는 사라지게 된다. 한일 관계 악순환의 오래된 근원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 팽창주의 공동 대응과 북한 핵의 평화적 해결에 양국이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난다. 이제 영토욕을 채우기 위해 고대사를 왜곡했던 과거 암흑기 일본 참모본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한일 양국 시민사회와 양심적인 학계가 힘을 합해 한일관계를 객관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점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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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식 2020-03-14 18:53:37
뭐? 이덕일이 교수라고? 잘 알아보고 써라!

금나라 2020-03-05 01:13:14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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