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는 시장경제의 적
‘갑-을 관계’는 시장경제의 적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08.1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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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시장경제는 '갑과 을', '공급자와 수요자'가 균형된 힘을 갖고 있을 때 되는 것이지 갑이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다가 '너 하기 싫으면 관둬라. 할 사람은 많다'라는 상황에서는 올바른 시장경제가 정립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늘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한 말이다.

낯설다. 이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사실 그랬다. 이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구호만 있었을 뿐, 그 ‘비즈니스’ 내부의 시장 관계망, 예를 들면 원청-하청 관계나 노사관계와 같은 ‘불균등 관계’, ‘공정한 거래질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갑․을 관계의 불공정성, 불공정 시장경제학에 대한 뒤늦은 관심 표명은 그래서 차라리 낮설다.

대통령의 오늘 발언 중 주목할 부분이 또 있다. “근본적인 것은 내수의 진작”임을 강조한 부분이다. 철저한 수출주도형 중상주의 정책이 우리 정부의 경제 기조였음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수출이 핵심 전략이다보니 대기업 우선 정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갑을관계의 권력적 시장질서를 뒷받침할 수밖에 없었다. 환율 정책도 그런 오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차원에서 ‘수출’보다는 ‘내수’를 강조한 대통령의 발언은 대전환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통치자가 피치자가 되고, 피치자가 통치자가 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 말을 그대로 전용하자면 을이 갑이 되고, 갑이 을로 되는 것이 시장 경제다. 갑이 영원한 갑이라면 이는 중세 신분제 사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소유권 중심의 사회(ownership society)를 고착화시킬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갑․을관계는 계약 관계의 상대방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져야 할 뿐, 그 이상의 권력이나 반시장주의적 색채를 도려내야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의미의 갑․을 관계는 차라리 시장경제의 적이다.

마지막으로, 경계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실질 소득이 감소 일로에 있는 절대 다수의 중산층과 서민들, 소위 ‘을’을 정책적으로는 방치하면서,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에 대한 기대로 대기업들만 ‘반시장적’으로 으르고 달래는 데 집착하다가는 머지 않아 ‘친서민 레토릭’의 내용에 동의하는 많은 서민들로부터도 결국 그 진정성이나 실현 가능성에 있어 의구심을 사게 될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오랜 시간 갑․을 관계에 속고 시달리면서 단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래는 지난 해 1월 [아시아경제]에 기고한 바 있는 "'갑을관계'의 사회학"이라는 칼럼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필자의 논지는 변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발언으로 갑․을 관계의 반시장성이 지적되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예전의 글을 꺼내 올린다.

'갑을관계'의 사회학
(2009. 1.29. 아시아경제 기고)

대한민국에 언제부터인가 '갑을관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여기서 갑과 을은 권력관계를 상징한다. 갑은 권력자, 을은 종속자라는 말이다. 한국에서 갑은 대기업이 되고, 을은 중소기업이 된다. 갑이 원청업체라면 을은 하청업체가 된다. 또한 갑은 사용자이며, 을은 노동자다.

원래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계약관계는 동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계약은 서로의 권리, 서로의 의무를 주장할 수 있는 대등관계를 전제로 한다. 쌍무성, 대등성이야말로 자유계약의 기초가 된다. 그렇지만 헌법으로부터 시작해 정치인, 기업인들이 입만 열면 자유시장 경제를 외치지만 정작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기본원리인 계약의 대등관계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계약의 권력성ㆍ종속성을 인정하며 불평등한 관계를 당연하게 여긴다.

이제 갑이 된 정규직은 통근버스에서 앞쪽 자리에, 을이 된 비정규직은 뒤쪽 자리에 앉는 차별이 이뤄진다. 갑인 대형유통업체는 을인 상품공급업체를 입맛 따라 마음대로 부린다. 연예기획사 갑은 연예인 을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바라보고 노예계약을 맺는다. 갑이 을을 대등한 계약의 당사자로 보지 않고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상대로 여기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시장경제 문화는 싹틀 수 없다.

한국에서 중소기업ㆍ납품업체ㆍ하청업체가 대기업과 동등한 계약관계를 기반으로 한 동반관계를 가져 본 적이 있었나? 민주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노사협력ㆍ상생협력을 외치지만, 한국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의 정당한 파트너로서 한번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한 시장관계ㆍ계약관계가 지속되는 데는 이를 시정해야 할 국가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도 원인이 있다. '기업간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며 '불공정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설립된 '공정거래위원회'는 갑과 을의 동등한 거래를 보장하지 못한다. 정부의 모든 경제부처가 대기업을 지원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관련 부처마저 노사대립의 순간에 한결 같이 사용자의 편을 든다.

우리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갑과 을의 대립항으로만 바라보는 인식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그것은 권력관계ㆍ종속관계를 인정하는 봉건사회적 속성을 갖는다. 이런 사회에서 현대판 노예계약문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둘째,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가 만들어나갈 공동의 목표ㆍ공공의 가치ㆍ공공성을 훼손하게 된다. 사회는 강자만을 위한 리그가 되며, 조화로운 사회ㆍ통합의 가치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에서 제시되는 대부분의 해법은 '노력해라. 그러면 을도 갑이 될 수 있다'는 역할변화만을 주문한다. 여기에는 갑을 관계가 갖는 권력적 속성, 사회적 구조는 도외시된다. 이런 '갑을관계'가 온존하는 한, 을이 갑이 되어도, 또 다른 을은 사라지지 않는다. '갑을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함께 평등을 그 기초 원리로 한다. 평등성ㆍ대등성이 보장되지 않은 자유시장체제만으로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서도 불평등에 기반 한 '갑을관계'는 극복돼야 한다. 갑과 을은 단순한 계약서상의 당사자를 부르는 호칭으로만 머물러야 한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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