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스님] 탁발을 허(許)하라
[허정 스님] 탁발을 허(許)하라
  • 허정 스님
  • 승인 2020.05.0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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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루앙쁘라방 지역의 한 사찰의 스님들이 아침 탁발하는 모습.
라오스 루앙쁘라방 지역의 한 사찰의 스님들이 아침 탁발하는 모습.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승가는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 이외에 새로운 계율을 만들 수 있을까?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규칙을 정하고 사소한 규칙은 없을 수 있는 권한이 승가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불멸후 227개였던 ‘빨리율’이 ‘사분율’에서는 250개가 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불상과 탑에 관련된 새로운 규칙을 20여개나 더 만들고 율장에 포함시킨 것은 부처님과 같은 권위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의 권한을 불멸후에는 승가가 물려받은 것이다. 제1차 결집이나 제2차 결집의 내용을 주석서에 넣어 전승하지 않고 율장에 넣어 전승하는 것도 그 만큼 승가의 결집이 중요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600년이 흐른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의 모습은 어떤가? 제 2차 결집에서 비법(非法)으로 결정된 10가지 조항들이 모두 정법(正法)인 것처럼(금은을 받는 것, 오후불식 등) 행해지고 있다.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승려와 재가자의 하는 일이 모호해져서 종단이 수익사업을 하고 승려가 생존을 위해 각종사업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분율’로 구족계를 받고 보살계를 받도록 하고 있는데 각 계본의 내용을 안다면 계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2가지 이질적인 계를 수계하는 모순조차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삼고 있다.

율을 배우지 않고 종헌·종법으로 종단을 운영하니 이제 개인적인 일이나 사찰의 업무를 처리할 때 율장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종헌·종법의 역할이 그처럼 중대해 졌는데도 종헌종법이 어떤 내용인지 아는 승려들도 거의 없다. 종헌종법은 사판승들이나 보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율장도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종헌·종법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승려들이 종단과 승가에 관심과 애정 없는 이유일 것이다. 율장에는 객스님을 맞아하는 법, 탁발하는 법 등 승려들의 의식주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종법(宗法)으로 탁발 등을 금지시킴으로서 율장이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렸다.

조계종 <승려법> 제47조에는 공권정지 5년 이상, 제적의 징계에 처하는 범계(犯戒) 행위들에 대해서 열거해 놓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상습적인 탁발 행위자'이다. 즉 조계종에서는 상습적으로 탁발을 하면 승복을 벗기는 제적의 징계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습적으로 금전을 걸고 도박행위를 하는 자’와 동급의 징벌이다. 탁발을 하는 것이 도박을 하는 것과 같은 나쁜 짓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보시면 통탄할 일이다.

수행자의 생계수단인 탁발은 종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종단 지침으로 객승으로 다니는 것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큰 사찰을 방문해도 주지가 객실이 없다고 하면 잠을 자기 위해 저자거리의 여관으로 가야한다. 작년 가을에 선배 스님을 모시고 전국 사찰을 탐방하면서 절실하게 느꼈다. 템플스테이를 원하는 재가자는 환영해도 수행자는 거부하는 것이 종단의 현실이다. 탁발이 포함하고 있는 긍정적인 면들이 너무 많다. 열 가지만 열거해보자.

1. 수행자가 항상 생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살게 하니 번뇌가 줄어든다. 적어도 성착취물로 장사를 하였던 n번방 승려 같은 이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2. 내 생명이 재가자들에게 의지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음식을 보시하는 재가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3. 승려의 삶이 소욕 지족하는 삶으로 전환된다.

4. 탁발문화가 살아나면 객실문화도 살아나서 전국의 사찰에서 승려들이 눈치 보지 않고 머물게 된다.

5. 승려들이 비싼 차를 타거나 비싼 호텔에 드나드는 것이 줄어들게 된다.

6. 자연적으로 오후 불식을 하게 된다.

7. 사미도 장로·총무원장도 똑같이 탁발을 하므로 승려들 간의 평등이 이루어진다.

8. 승려 사이에 빈부차이가 지금보다 많이 좁혀진다.

9. 이제까지 호화스럽게 살아왔던 승려들은 불편하여 승가를 떠나게 된다.

10. 청정화합승가에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물질에 지배받는 자본주의에서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가 어렵다. 더구나 승려들에게 개인통장, 자동차, 개인사찰 등 사유재산이 마음껏 허락되는 현재의 풍토에서 소욕지족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소유한 만큼 번뇌도 많아지게 마련일진데 지금 종단의 현실에서는 소유의 홍수를 막을 뾰쪽한 수가 없다. 탁발을 되살려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고 대중공의를 모아 승가를 운영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본다. 만약 사찰의 위치가 마을과 거리가 멀거나 몸이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여 가가호호 방문하는 탁발을 할 수 없다면 사찰에서 간접적으로 탁발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다.

종단에서 대중공의제가 사라지고 탁발을 금지했듯이 승가를 ‘스님들’로 번역한 것도 승려들의 무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승가를 ‘스님들’ 쯤으로 이해하니 승가공동체의 중요성이 사라지고 승가의 역할을 알지 못하고 승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승려들이 각자가 가진 권리를 모르니 승가의 주인노릇을 하지 못하고 눈치 보며 사는 주변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승려 간에는 빈부차이가 벌어져 세속의 갑을관계로 전락하고 사찰은 이익 추구하는 사업장이 되고 말았다.

현대사회에서 승려의 탁발을 금지하는 것이 ‘다른 종교인에 대한 배려 차원’이라는 주장을 본적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탁발을 했기에 다른 종교를 배려하지 않은 것인가? 부처님은 왜 가뭄이든 마을에서도 탁발을 했던가? 부처님 제자로서 의무를 망각한 대답이라고 본다. 승가공동체에 속한 승려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참담한 모습이다. 탁발을 나갔다가 음식을 구하지 못하였다면 그날은 굶어야 한다. 음식을 얻지 못하는 날에 굶는 수행자, 이런 수행자들이 있다면 불교가 저절로 부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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