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하심(下心)’은 일상적인 단어다. 사전에서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라 설명한다. 가르침에 “범유하심자 만복자귀의(凡有下心者 萬福自歸依)라 했다. 탐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자에게는 만 가지 복이 따라온다는 의미다.
하심과 대비되는 ‘상심(上心)’은 무엇일까? “임금의 마음”이라는 뜻이고, 맥락에 따라서는 “주의하다”라는 의미다. 반면, 불교에서 하심의 반대어는 상심이 아니라 탐심 혹은 아집의 발현을 의미한다. 하심이라는 말 자체는 명사이지만 동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심은 자신의 마음에 각인되어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되기 때문이다. 최고위급 지도자에게도 하심은 중요한 덕목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복(福)’은 정각을 이루는 것이지 결코 세속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하심을 하는 자는 재화의 복도 중요하나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 복이 아닐까 한다. 재화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심’은 기독교에서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다만 신약성서나 설교 시 ‘낮은 곳’ 또는 ‘가장 낮은 곳’이라는 유사한 구절이 자주 언급됨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라는 문장이 그렇다. 이 단락은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승려에 대한 수행의 척도 중 하나가 하심이다. 종단을 운영하는 고위급 스님의 우선적 구족사항이 하심이다. 당연하게도 하심은 비굴함을 의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심은 무위로써 세상을 보기에 평등과 차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이기 때문이다.
조계종단에 방장이나 조실 등 선지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은 선지식에게 수행의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불제자로서의 상(象)에 그릇됨이 없는지 늘 살펴서 어긋남이 발견된다면 지체없이 바로잡아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갖는다.
상월선원에서 수행한 아홉 분 스님의 수행기가 필름에 담겼다. 그런데 이번 다큐영화의 포스터 상단에 불교에서는 좀 낯선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지상명령과도 같은 문장을 보면서 궁금증과 더불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영화 관람 후 등 각자가 느낀 대로 해석할 일이겠으나, “가장 낮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라” 한 명령의 수용 대상이 바로 아홉스님들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아홉스님들의 이후 행로에 관한 선언적 모토인지, 아니면 아홉스님들이 선지식의 입장에서조계종 출가자들에게 내린 명령구인지 궁금하다.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