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밭의 화초
채소밭의 화초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09.3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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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채소 값이 금값이다. 배추 한 포기가 만 원을 훌쩍 뛰어 넘었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파트 베란다에 푸성귀를 심을 걸 그랬다고 투덜대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나는 남해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다리가 이어져 육지와 다름없지만 남해대교가 가설되지 않았을 때에는 다른 섬과 마찬가지로 채소가 귀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서너 평 남짓한 귀틀마당을 온통 야채 밭으로 삼았는데 내가 그 틈을 비집고 화초라도 심어 놓으면 영락없이 뽑아버리곤 했었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채소밭에 뿌리를 내리면 잡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 그것이 분수(分數)다. 그러나 그 분수에 맞지 않는 엉뚱한 자리에 가서 일을 그르치고, 그 자리마저 욕되게 하는 경우가 흔하다. 얼마 전, 장관이란 사람이 휘하 공직에 자신의 자녀를 특별 채용하여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것도 분수를 몰랐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그 분수라는 것이 자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시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비록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 역시 분수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옛날 중국 전한의 개국공신 장량(張良)은 ‘고조사(高鳥射)면 양궁장(良弓藏)이요, 적국멸(敵國滅)이면 모신망(謀臣亡)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높이 나는 새를 잡았으면 좋은 활은 갈무리 하는 법이고, 적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그 일을 도모한 자는 죽음을 당한다는 뜻이다. 즉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얻기 위해 전장을 누빌 때는 장량의 지모와 책략이 필요했으나, 천하를 얻고 난 뒤에는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물러나는 슬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장량, 소하와 더불어 한나라 개국 3걸의 한 사람이었던 한신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자리를 고집하다 유방으로부터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를 읽어야 영웅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 근대한국불교의 자존심이었던 성철, 법정 두 스님도 시대를 잘 읽고 시대가 요구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철 스님은 혼돈의 시대에 자기 분수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모범을 보였다. 법정 스님은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칠 때 무소유를 실천하며 시대정신을 이끌었다.

두 분 스님들이 시대가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어느 산골의 이름 없는 스님에 불과했을 것이다. 우리 불교가 사회적 신뢰와 존경을 받으려면 누군가가 그 두 분이 살아간 초탈(超脫)의 경지를 이어가야 한다.

한국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2,000년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까닭도 늘 현실을 초탈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을 열어온 대덕이 끊임없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불교는 과연 그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가? 법정 스님의 입적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마지막 초탈인’이라며 스님을 기렸었다. 그 말은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처럼 시대적 귀감이 될 만한 스님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종교가 사회적 귀감이 되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야채 밭에 뿌리 내린 화초나 다름없다.

그러나 요즘 불교계에서 보여주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충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침묵하고 있다가 민주화가 된 이후에야 목소리를 높인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다. 아프게 새겨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성철 스님이 나타나고, 더 많은 법정 스님이 나타날 것이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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