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1912년 통도사 강연 중 '우리의 새 생명'
[전문] 1912년 통도사 강연 중 '우리의 새 생명'
  • 법응 스님
  • 승인 2020.06.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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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우리의 새 생명』 -자유 · 평등 · 박애

어 - 다른 변사(辯士)는 많은 수양(修養)으로 이 연단(演壇)에 올라와서 여러 사람을 무한(無限)한 감복(感伏)을 시킬 것이나, 이 사람은 본래(本來) 수양(修養)이 부족(不足)하고 지식(知識)이 천박(淺薄)하여서 저의 일언일발(一言一發), 일주일족(一厾一足)으로 여러분을 감복(感伏)시키기는 제(除)쳐놓고 도리어 염증(厭憎)을 내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퇴보(退步)를 끊어내고(決斷)서 진보(進步)를 하려고 이곳에 모인 여러분(滿堂諸氏)은 나의 잘못을 용서(容恕)하시고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차 마시고 휴식)

제가 여러분 앞에 말하려는 연설 제목(演題)은 곧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새 生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라 함은 우리 이천만(貳千萬)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을 말함이요, 새 생명(生命)이라 함은 시들고, 낡아서 오래(久陳)된 옛 생명(生命)이 아니요, 신선(新鮮)한 생명을 지목(指目)함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의 새 생명(生命)을 말하려 함은 무슨 철학적(哲學的)으로 인생(人生)의 심오(深奧)한 관념(觀念)을 가지고서 해석(解釋)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과 같이 평범(平凡)한 생활상(生活上)에 있는 그 범위(範圍) 내(以內)의 소감(所感)을 말하려합니다.

우리의 새 생명(生命)이라 함은 다른 것이 아니며 다만 자유 · 평등 · 박애(自由 · 平等 · 博愛) 이 세 가지입니다.

만약(萬若)에 우리에게 자유 · 평등 · 박애(自由 · 平等 · 博愛) 이 세 가지가 부족(不足) 하다면(時)나는 도저(到底)히 우리의 완전(完全)한 생명(生命)을 얻는(得)다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연고(緣故)냐 하면 이 자유 · 평등 · 박애(自由 · 平等 · 博愛)를 뒤집으면 부자유 · 불평등 · 비박애(不自由 · 不平等 · 非博愛)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 세상(世上) 사람이야 죽던지 말든지 어이하든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이기적(利己的)이거나, 또는 어떤 사람은 사람의 키를 높은 태산(泰山)과 넓은 바다와 같이 하나, 어떤 사람은 담배와 같이 사람의 키를 여겨서 편애적(偏愛的)으로 한다면 그 사회(社會)에 화기(化氣)를 거두니 그 사회(社會)에 모든 것이 남아있다 하여도 부자유 · 불평등 · 비박애(不自由 · 不平等 · 非博愛) 뿐입니다.

즉 이 부자유 · 불평등 · 비박애(不自由 · 不平等 · 非博愛)의 아래(下)에서 어찌 우리의 새 생명(生命)을 맛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즉(則) 새 생명(生命을 얻고(得)자 하면 먼저 풍부(豊富)한 자유(自由)와, 탐스러운 평등(平等)과 꽃다운 박애(博愛)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남용(濫用)하여서는 안 됩니다.

박애(博愛)라 하여도 그 박애(博愛)를 빌미(口實)로 삼아서 전(全) 세계世界)를 정복(政伏)해서 자기(自己)의 지배(支配) 하(下)에 두려 한다든지, 저급지위(低級地位)에 있는 자(者)가 고급지위(高級地位)에 있는 자(者)를 기(忌)탄 없이 멸시(蔑示)한다든지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 가지를 대단히 오해(誤解)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者)에게 이 세 가지는 도리어 세계(世界)의 대(大)원수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과연(果然) 그들에게 자유 · 평등 · 박애(自由 · 平等 · 博愛)를 비유해 말하면 누에가 제 입으로 줄을 내여 서 자기의 한 몸(一身)을 감아 죽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今日) 삼십세기(三十世紀) 문명자(文明之緟)로서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누가 그런 소극적(消極的)으로 생각(生覺)을 할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려 합니다.

자유(自由)라는 것은 비유(譬)하건 데 물과 같다 하겠습니다.
별안간 식수(瞥眼間 饮水)가 떨어질 때(時)에 우리의 목마름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때(時)에는 은(銀)보다 귀(貴)하고 금(金)보다 더 중(重)한 것은 오로지 먹을 물 뿐입니다.

또 평등(平等)은 태양(太陽)의 광선(光線)과 같습니다.
태양(太陽)의 광선(光線)은 지면(地面)의 높고 낮음과 유치(流峙)가 우뚝하고 오목하고, 산(山)과 들의 험지(險地)와 평지(平地)와 기타(其他) 여러 짐승과 식물(飛禽走獸 動植物)은 물론(勿論)하고 두루 평등(平等)하게 비쳐 줍니다.  과연(過然) 하늘 가운데(中天)에 뚜렷이 떠 있는 해는 만물(萬物)을 뚜렷이 비춰줍니다.

또 박애(博愛)는 무엇인가?
봄기운이 온화한(春氣溫和)한 공기(空氣)와 같습니다. 봄(春)의 온기(溫氣)는 능(能)히 겨울에 싸인 눈(嚴冬積雪)을 녹이며(純化) 모진 바람에(狂風一點에) 생기를 잃은 나무와 풀들(草木群生)의 원기(元氣)를 회복(回復)시킵니다.

그런 즉(則) 자유(自由)는 마시는 물(食水)과 같고, 평등(平等)은 태양(太陽)이 비춰주는 그 힘(遍照力)과 같은 것이며, 박애(博愛)는 봄기운(春氣)의 따스함과(消化力)  같다 하겠습니다.

만약(萬若)에 자유(自由)가 없으면 마시는 물(食水)이 끊어진 것과 같으며, 평등(平等)을 얻지 못하면 균일(均一)을 잃은 것이고, 박애(博愛)가 없다(無)면 봄날(春)의 따스한 기운(溫氣)를 맛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경우(境遇)에 어찌 생명(生命)을 유지(維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자유(自由)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남에게 절제(節制)를 받지 않고 자기(自己)의 뜻에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바야흐로 사람된 의의(義意)와 가치(價位)가 있습니다.

만약(萬若)에 부자유(不自由)로 말미암아서 완전(完全)한 입이 있어도 뜻대로 말을 못하게 되고, 완전한 손발이(手足)이 있어도 의미(意味)대로 하지 못하면 진실로 죽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미국(米國)이 영국(英國)의 식민지배(覊律)를 벗어나기 전(前)에 미국(米國)의 패트릭 헨리는 영국(英國)을 향하여 말하기를 ‘우리에게 자유(自由)를 주라 아니하거든 죽음을 달라’ 말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자유(自由)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助重)한 것인지를 가(可)히 알 것입니다.
또 평등(平等)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남보다 ()()가 되지 말고 다 - 같이 동등(同等)한 지위(地位)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등(平等)이라는 것을 인생(人生)의 근본적(根本的)으로 해석(解釋)해 볼 것 같으면 인인구족(人人具足)이요, 개개원성(個個圓成)이라 하였으니, 어느 사람이나 평등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은 사람의 삶에 대(對)하여 보면 평등(平等)이 못되고 차별(差別)이 됩니다.

보십시오. 이 - 세상(世上)에 어떤 이는 중학교(中學校)를 졸업(卒業)하고 어떤 이는 대학교(大學校)를 졸업하기도 하였으며, 누구는 부리는 사람을(傳/束)을 두고 누구는 그 지배(支配) 하(下)에서 절제(節制)를 받으니 어찌 사람마다 다 두루 평등(平等)하다 하겠습니까?

그러면 중학교(中學校)를 졸업(卒業)한 이는 대학교(大學校)를 졸업하여야 평등(平等)이 될 것이며, 절제(節制)를 받는 이는 절제(節制)를 안 받을 능력(能力)이 있어야 평등(平等)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對)하여 … … … -

또 나는 박애(博愛)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무릇 널리 여러 사람을(衆人)을 사랑하되 자기(自己)의 자신(自身)과 같이 아끼는(愛護)는 것입니다.

대략(大約) 세 가지의 뜻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런 박애주의(博愛主義)를 버리고 편애주의(偏愛主義)를 실행(實行)하기 때문에 개인(個人)과 개인(個人)이 싸우고, 사회(社會)는 사회(社會)끼리 싸우며, 국가(國家)는 국가(國家)끼리 싸워서 그 죽은 목숨이 태산(泰山)을 이루고 피가 강과 바다(江海)물과 같이 이룬 때(時)가 많습니다.

보시지요, 삼국풍진(三國風振)과 일로전쟁(日露戰役)과 유럽전쟁(歐羅巴戰爭)이 다 오직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利己主義) 아래(下)에서 이와 같은 전쟁(戰爭)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아니라 말하십시오.

그런 즉(則) 우리는 화탕세계(火湯世界)를 버리고 평화세계(平和世界)를 맛 보고자 하거든 비박애(非博愛)를 버리고 박애(博愛)를 실행(行)하여야 할 입니다.

남 앞에 비굴한 자(者)가 되지 말고 다 같이 당당(堂)한 우수한 사람(者)이 되려면 불평등(不平等)을 버리고 평등(平等)을 추구해(得)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이 죽어 청산(靑山)에 무덤이 되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 되기 전(前)이라도 생명(生命)이 있는 자(者) 되고자 하거든 부자유(不自由)를 버리고 자유(自由)를 구(求)하여야 합니다.

고금(古今)을 관(寬하고 동서(東西)를 통(通)하여 한나라(一國)에 생명(生命)을 바치게 되는 것도 이 세 가지(三者)(자유 · 평등 · 박애를 말함)를 구(求)하려고 했던 것이며, 간간(間間)이 영웅현철(英雄賢哲)이 위대(偉太)한 일들(事業)을 경영함도 이 세 가지(三者)에 불과(不過)한 것입니다.

살펴보건데 서양(西洋) 16세기경(十六世紀頃)에 문예부흥(文藝復興) 운동(運動)이 발생(發生)된 것도 이 세 가지(三者)(자유 · 평등 · 박애)가 불충분(不充分) 한데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또 인도(印度)의 <釋帝罖種과 吠奢種과 戒陀種/확인필요> 등 삼종(三種)이 바라문종(婆羅門種)에게 무한(無限) 한 압박(壓迫)을 받는 것을 보고 거기 사회(社會)의 부패(腐敗)함과 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 등 이에 마음이 동하여서(感動) 아 - 중생(衆生)을 제도(濟度)치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生覺)에 이르러(下) 궁궐(宮庭)을 버리고 설산(雪山)에 들어가 온갖 고행(難行苦行)을 한지 6년(六年) 만에 깨달음(解脫法)을 얻어서 이후(邇來) 오십(五十) 여(餘) 년(年)을 교화(敎化)하던 석가모니부처님(釋迦世尊)을 보십시오.

로마장군(羅馬將軍)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猶太首府耶路撤怜/추측)을 습격한 후(后)로 유태(猶太)의 국권(國權)이 로마(羅馬)의 판도(版圖)에 들어가고 민심(民心)은 점점(漸漸) 이반(偏벽)되어서

대세(大勢)에 통(通)치 못하며 종교(宗敎)는 구습(舊習)만 가득해져서 엄격(嚴格)하던 율려(律呂)는 하나의(一種) 빈 문서(虛文)와 같이 되고, 일신기독교(一神夜化)의 신앙 (信仰)은 위선(僞善)으로 변(變)하여서 로마(羅馬)의 허정(虛政)이 유태(猶太)에 낱낱이 증가(增加)해 감을 보고 기독(基督)은 (슬퍼하면서?) 아 - 이래서는 우리가 죽을 것이다 하고 특별(特別)히 일신교(一神敎)를 주창(主創)하여서 몰교(沒敎)한지 삼년(三年) 만에 법정(法庭)에서 사형(死刑)을 받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은 예수(耶蘇基督)께서나, 이것들이 다 -자유 · 평등 · 박애 (自由 · 平等 · 博愛) 이 세 가지(三者)를 위(爲)하여 일생(一生)에 ()生을 받친 것이 아니거든 아니라 말하시기 바랍니다.

이뿐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누누이 거리에서 연설(演說)을 실행(實行)한 것이나 대종교의 선생(大宗敎罖喆先生)이 십년(十年) 고행을 연속(積苦)하다가 구월산(九月山)에서 신선이(仙化) 된 것이나 이것은 모두 다 세 가지(三者)(자유 · 평등 · 박애)를 위(爲)해 큰(大) 활동(活動)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고금(古今)을 통(通)하고 동서(東西)를 달(達)하여서 위대(偉太)한 인물(人物)의 사업(事業)은 하나도 이 세 가지(三者)를 위해 활동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三者)를 위(爲)해 큰 활동(大活動)을 하는 사람(者)을 비교(比較)해 말하면 곡식(穀食)을 뿌리기 위(爲)해 논과 밭(田畓)을 써는(가꾸는)자(者)와 같습니다.

만약(萬若)에 전답(田畓)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곳에 아무리 좋은 종자(種字)를 뿌리더라도, 무성한 풀 줄기 사이에서 어찌 곡식(穀食)이 자라(發達)겠습니까?

그러면 먼저 풀 넝쿨과 (똑을 사비분?) 둑을 잘 다듬은 전답(田畓)이라야 완전(完全)한 곡식(穀食)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유 · 평등 · 박애(自由 · 平等 · 博愛)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 아무리 좋은 종교(宗敎)가 있고 예술(藝術)이 있으며, 과학(科學)이라 할지라도 그 폭악(暴惡)한 부자유 · 불평등 · 비박애(不自由 · 不平等 · 非博愛) 아래(下)서 어찌 잘 발달(發達)이 되겠습니까?

과연(果然) 종교(宗敎), 예술(藝術), 과학(科學) 외 모든(類) (利正盛哀)것이 이 세 가지가 잘되고 못 되는 것에 따를(表現)뿐 입니다.

보시요. 그를 증(證)거로 말하면 오늘날(今日) 위대(偉大)한 세력(勢力)을 가진 기독교(基督敎)가 법왕시대(法皇時代)에는 부자유(不自由)로 인하여 무수한(如何) 타격(打擊)을 받았습니다. 또한 정치상(政治上)으로 봉건제도(封建制度)로 인(因)한 부자유(不自由)로 말미암아서 동은 유프라테스강 하반으로부터, 서는 스페인(西班亞)에 이르(至)고, 북(北)은 目耳(曼)人種 의 청국(淸國)으로부터, 남(南)은 아라비아해(亞米加比海/추측)에 도달(至)하기까지 위세 당당(雄雄)한 인()印 국기(國旗)를 휘날리던 로마(羅馬)의  속국[(屬)國?]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선조(先祖)가 제조(製造)한 고려청자기(高麗靑瓷器)는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理解)를
못하는 철갑선(鐵甲船)은 무엇인지?

우리가 명칭(名稱)조차 잊게 되며,  ()()()()(紋绵罖彼)?는 굴건비?로 화(化)하고 높고 큰 누각(高樓巨閣)은 작은 오막살이로 변(化)하여서 오늘(今日)의 우리사회(社會)가 혈안냉냉(皿顔冷冷)하고 이리저리 세상을 보아도 적적고요(俯仰寂寞)하게 된 것도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도 다 이조(李朝) 5백년(五百年) 간(間)의 유교(儒敎)의 압박(壓迫 ) 치하(下)에서 자유가 없는(不自由)이유로 인(因)하여서 모든(萬般) 과학(科學)이 퇴보(退步)된 까닭입니다.

그런 즉(則) 오늘(今日) 여러분 무엇을 사랑합니까?
아마 빵 문제(文題) 아래(下)에서 의식주(衣食住)를 많이 사랑하는 줄로 압니다.

의식주(衣食住)가 있어야 하기는 하겠지만은 고금동서(古今東西)를 통(通)하여 이 의식주(衣食住)에 주려 죽는 자(者) 그(畿) 사람(個人)들이 몇이나 됩니까?

그렇지만 이 세 가지(三者)(자유 · 평등 · 박애)에 굶주려 죽은 자(者) 많으며, 또 죽음에도 참혹히 죽은 사람(者)들도 많습니다. 보시오 이 부자유(不自由),  불평등(不平等)으로 인(因)하여 영미전쟁(英美戰爭)을 통하여서 그들이 얼마나 죽었으며, 만국회의(萬國會)에서 할복하여 돌아간 이준열사(李俊氏)의 죽음이 얼마나 비참(悲慘)합니까?

과연(果然) 이 세 가지(三者)에 굶주려서 죽은 자(者) 많으며, 죽음에도 참혹하게 죽은 자(者)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三者) 있는 사회(社會)는 봄기운(春氣)이 방창(方暢)한 봄날 같고, 세 가지(三者)가 없는 사회(社會)는 상풍(霜)楓)이 소설한 겨울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새 생명(生命)을 구(求)하자면 먼저 자유 · 평등 · 박애(自由 · 平等 · 博愛)부터 구해야 하겠으니 오늘 자리한 여러분(滿場諸氏)은 이 세 가지부터 구(求)하기를 바라고 일로 강연(講演)을 마칩니다.

대정 13년 양5월 31일 하오 1시에
통도사 불교소년단 주최로 학림 내에서 강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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