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회의장 주변이 ‘포템킨 빌리지’인가?
G20 회의장 주변이 ‘포템킨 빌리지’인가?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10.1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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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러시아 예카테리나 황제의 정부(情夫) 그레고리 포템킨

‘포템킨 빌리지’ 혹은 ‘포템킨주의’란 말이 있습니다.
그레고리 포템킨은 18세기 제정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의 궁정 대신이었습니다. 프러시아 출신으로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황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황제는 우리에게 친숙한 중국 당 왕조의 측천무후에 비견될 만한 여걸이었습니다. 그녀는 계몽사상가 볼테르에 경도되어 계몽군주임을 자처하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으며 사회 각 층의 대표를 소집해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농노제를 유지하고 여러 정부(情夫)를 거느리며 이들에게 국정의 요직이나 봉토를 하사하기도 하고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사실 포템킨 빌리지의 어원인 포템킨 공도 그녀의 정부 중 한 사람으로서 여러 고위직을 두루 거치게 됩니다.

▲ 표토르 대제 이후 러시아에 단 하나 뿐인 '대제' 예카테리나 2세(좌)와 그의 애인 그레고리 포템킨(우)

포템킨이 거친 직책 중 최고위직은 예카테리나 황제가 새로 합병한 지역인 ‘뉴러시아’의 지사직이었습니다. 뉴러시아는 당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크림반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포템킨은 이 지역을 풍요롭게 탈바꿈시켜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포템킨 빌리지’ 이야기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1787년 마침내 황제가 바지선을 타고 드네프르강을 여행하며 뉴러시아를 순시하는 기회가 왔습니다. 여기서 유명한 ‘포템킨 빌리지’의 일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포템킨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두꺼운 종이에 마을 전체 풍경을 그려 놓고, 바지선을 타고 가는 황제 일행이 볼 수 있도록 이를 강둑에 세워놓았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지나가면 이 가짜 마을 풍경을 서둘러 강 하류로 가져가 다시 세워놓는 식으로 여제의 눈을 속여 뉴러시아의 빈곤을 감추고 이 지역이 마치 잘 개발된 곳인 양 보이게 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포템킨과 황제의 은밀하고도 가까운 관계나 서신 또는 메모와 같은 사료를 종합할 때, 당시 포템킨의 적대 세력이었던 러시아 주재 작센(Saxony) 공사 헬비크가 포템킨을 폄하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조엘 레비, 서지원 역,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 (휴먼앤북스, 2010), p.188 참고)

상식적으로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해도 그림과 실물을 혼동한다는 것이 그리 납득이 갈 만한 상황은 아니지요. 어쨌든 이 이야기는 임시방편으로 근본적인 문제점을 감추고 위기를 모면하는 ‘눈가림식’ 책략을 표현하는 ‘포템킨 빌리지’라는 비유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이렇듯 포템킨주의 혹은 포템킨 빌리지는 18세기 러시아 귀족 그레고리 포템킨과 예카테리나 황제 사이에 얽힌 일화에서 유래한 관용어인 셈입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몽타주 기법으로 유명한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 등장하는 포템킨 함도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군함이었지요.

▲ 영화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포스터

‘포템킨 빌리지’는 지금도 건설 중

문제는 포템킨주의가 19세기의 유산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포템킨 빌리지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포템킨주의는 지금도 간간이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 말이 특별히 유행한 계기도 있습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자신들의 체제 선전을 위해 서방의 비판적 지식인들을 초청해 의도적으로 잘 조성되고 연출된 장소들만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남북 분단이라는 냉전시대의 마지막 유산을 아직까지 지닌 우리에게도 이는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 휴전선 근처에 조성된 북한의 ‘기정동’ 마을은 포템킨 빌리지의 대표적인 예로 영문판 위키백과에 등록되어 있기도 하지요.

▲ 북한의 최남단 기정동 마을. 마을 가운데 높이 160m, 무게200kg의 대형 인공기 탑이 눈에 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의 포템킨 빌리지

북한 뿐 아니라 지금도 여러 국가들이 소위 ‘국가적 이벤트’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치안이나 경관 등을 구실로 포템킨의 그림에 비견될 만한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사실상 ‘봉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던 중국의 과도한 베이징 치안 통제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성화 봉송 중 곳곳에서 펼쳐진 티벳 분리 독립 요구 기습 시위에 놀란 중국은 올림픽 개막을 앞둔 베이징에 소수 민족이나 탈북자들이 아예 머물지 못하도록 이들을 추방하거나 통행을 차단했습니다.

▲ 베이징올림픽 공식 엠블럼 '춤추는 베이징'을 패러디해 티벳 시위를 무력 진압한 중국 정부를 비판하다

'86, '88올림픽과 개고기집

물론 이미 86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다수의 크고 작은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나 국제회의 등을 개최한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 있어 중국을 비롯한 그 어떤 나라에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일례로 88올림픽 당시 개고기 식습관에 대한 서구의 비판을 의식해 도심이나 대로변에 개고기집이 들어설 수 없게 규제를 가한 적이 있지요. 이 사례는 우리 사회에 문화의 상대성과 보편성에 관한 거센 논쟁을 촉발한 바 있습니다.

G20 정상회의를 이유로 노점상들을 생업에서 내쫓고 있는 서울시

최근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도심 중 한 곳에 또 다른 ‘포템킨 빌리지’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G20 회의가 개막하는 11월11일을 전후해 20일 동안(10월27일~11월15일) 코엑스~선릉역 구간과 수서역 인근 노점 90곳을 철거키로 한 것입니다.
사실 G20 정상회의를 앞둔 서울시의 노점상에 대한 압박 논란은 몇 달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프레시안 6.9.자 “'G20 회담'에 또 쫓겨날까 불안한 강남 노점상들 - 2000년 아셈 때도 갈등…"G20 관련 없다" 부인”) 그러다가 최근 1박2일간 열리는 행사를 위해 20일간 수많은 노점상들의 생업을 아무런 대책 없이 중단시키겠다는 서울시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2000년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때와 2002년 월드컵 때에도 1주일 이상 쉬게 한 적은 없었다는데 말입니다.(경향신문 10.2.자 “G20 앞두고 인권침해 심화”)

G20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는 중요한 행사라는 데 대해서 동의합니다. 더구나 환율전쟁, 화폐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시기라서 그 중요성은 더합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임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때 우리는 외국을 향해 어떤 얼굴로 손님을 맞이해야 할까요. 포템킨 빌리지일까요, 아님 빈부 귀천 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권과 민주와 시장의 대한민국일까요. ‘생얼’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 얼굴인데 말이죠. 오랫동안 관리통제 하에 그 존재를 묵인해온 노점상을 굳이 국제 행사 기간에만 이렇게 일방적인 방식으로 몰아내는 것은 국제 행사나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또 다른 편견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많은 외국인들이 노점의 주요 메뉴인 떡볶이에 대해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미관이나 청결에 정 문제가 있다면 시 당국에서 그런 문제를 노점상들과 머리를 맞대고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몇 년 만에 다시 포템킨 빌리지가 부활하고 포템킨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이 못내 불편합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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