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궤만 문화재인가
왕실의궤만 문화재인가
  • 이기표 원장
  • 승인 2010.11.2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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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의 세상이야기]

# 일제 강점기인 1912년 11월, 조선총독 데라우찌가 가을빛 곱게 물든 경주 남산에 올라 석굴암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인물로 각 지방의 군수나 경찰서장 등 일본인 관리들을 동원하여 수많은 이 땅의 문화재를 강탈해간 원흉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석굴암을 통째로 들어다 서울 남산기슭에 있던 총독관저로 옮겨가기 위해 직접 경주로 내려왔던 것이다.

데라우찌가 자신이 데려온 일본인 토목기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가? 이것을 총독관저로 옮겨가서 그대로 복원할 수 있겠는가?”
토목기사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데라우찌를 수행한 경주경찰서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석굴암 이전계획이 알려지면서 조선인들의 저항이 거셉니다. 서두르다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데라우찌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남산을 내려와 경주시내로 들어서다 길가에 있는 석불 앞에 멈춰서더니 수행원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아름다운 작품이야! 석굴암 대신 이거라도 가져가야겠네.”
그러자 옆에 있던 경주금융조합이사 고히라 료조가 말했다.
“총독각하! 제가 책임지고 보내드릴 테니 안심하고 기다리십시오.”

며칠 뒤, 서울로 실려 온 그 불상은 총독관저 마당에 세워졌다가 데라우찌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져가려 하자 그의 휘하에 있던 일본승려가 물었다.
“이것을 본국으로 가져다 무엇에 쓰시렵니까?”
“우리 집 정원에 세워두려고 하네.”
“이것은 조선인들의 혼이 담겨있는 유물입니다. 남의 민족혼을 집안에 들여놓아 좋을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일본행을 면한 경주 유덕사지 석조여래좌상은 1939년 총독관저가 서울 남산에서 북악산 밑으로 옮겨갈 때 같이 옮겨졌고, 해방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이 그 총독관저를 경무대로 고쳐 대통령관저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지금껏 청와대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 일제 36년 동안 일본인들에 의해 강탈당한 우리의 문화재는 수십만 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미국 등지로 팔려가기도 했지만 지금도 일본의 고궁이나 박물관을 비롯해 옛날 세력가의 저택에는 어김없이 우리의 문화재가 모셔져 있다. 대부분이 석조불교유물로 그 수가 수 만 점이나 된다고 한다.

필자도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몇 해 동안 우리의 불교유물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이 문화국이라면 남의 나라 문화재는 돌려줘야 마땅하다고 하자 ‘일본에 건너온 한국의 불교유물은 일본인들의 신물(神物)이 된지 오래’라며 펄쩍 뛰었다.

일본은 신(神)의 나라다. 일본인들이 섬기는 신의 종류만도 80여 만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하다못해 바늘 하나에도 신령성을 부여하고 섬기는 것이 그들이다. 그러니 남의 나라 것이라 해도 신령성이 깃들어있을 법한 것이면 무엇이든 우러르고 받들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그들에게 한국의 불교유물은 대단히 거룩한 존재다. 그들에게 불교를 전해준 선진문물이지 않은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이 땅의 불교문화재를 집중적으로 강탈해간 까닭도 그 때문이다.

# 근래 들어 해외유출문화재 되찾기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외규장각도서와 조선왕실의궤 등이 환수될 전망이다.

물론 반갑고 다행한 일이지만 한 가지 납득하지 못할 것이 있다. 우리 정부에서 외규장각도서나 왕실의궤 같은 왕실유물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유출문화재 가운데 80%가 불교유물인데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가 없다. 데라우찌에게 유덕사지 석조여래좌상의 반출을 말린 일본 승려의 말처럼 이 땅의 불교문화재는 한민족의 얼과 혼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민족유산이다.

그리고 이 땅의 천년 숨결을 간직한 불교문화재 절만 가까이가 외국으로 유출되었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 어찌 문화대국임을 자처할 것이고 선진국이기를 바랄 것인가.

현재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유출문화재 환수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 없이는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G20정상회의 등으로 국격이 높아지고 외교력이 커졌음에도 우리 것을 되찾는데 소홀히 한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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