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사무라이와 주신구라 이야기
현대판 사무라이와 주신구라 이야기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1.03.2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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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전 세계가 사상 최악의 대지진과 이어서 벌어진 원전 폭발의 위험 속에 있는 일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방사성 물질 누출이 계속되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폭발사고와 화재가 발생해, 작업하던 요원들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죽음의 현장'을 향해 스스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로의 냉각작업 성공 여부에 따라 '일본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방사선의 공포를 무릅쓴 180명의 긴급요원

뉴스에 따르면 지방 원전 회사에서 오는 9월 정년퇴직하는 시마네(島根)현의 59세 남성이 원자로 냉각작업에 자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며 자원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폭발사고 이후 원전에서 철수했던 도호쿠(東北) 엔터프라이즈의 회사 직원 3명도 안전지대에서 다시 원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 베테랑 직원 3명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 지역,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원전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는 원전 폭발 상황을 막기 위해 퇴직을 앞두고 자원하거나 철수했다가 다시 돌아간 사람들을 포함하여 180명의 긴급요원들이 투입되었습니다. 방사선의 공포와 위협을 무릅쓴 이들 180명의 긴급요원은 지금 일본인들의 희망이자, ‘현대판 사무라이’로 불리며 국가적 영웅으로까지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희망, 현대판 사무라이

도쿄대학병원 나카가와 게이치 교수는 이들의 사투를 “마치 전쟁터에 투입된 ‘자살 부대’”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전쟁터와 같은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이들은 팀을 나눠 10~15분 동안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10~15분이 지나면 방사선 노출로 피폭 피해가 허용치를 초과하게 됩니다.

작업요원들은 특별 제작된 방호복, 필터가 탑재된 안면마스크, 헬멧, 두 겹으로 된 장갑과 산소통으로 방사선 노출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일반인의 연간 피폭 한도의 수천 배에 달하는 양의 방사성물질이 유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원전의 방사선 농도가 점점 높아지자 근로허용 방사선 수치를 두 배 이상 올렸습니다. 사실상 죽음을 각오하고 원전 폭발을 막으라는 것입니다.

47인의 사무라이, 주신구라

원전 폭발 상황을 막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투입된 긴급요원들을 보면서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 <주신구라>가 생각났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리는 위험 상황에서도 원전에 남아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기술자들에게서 일본 사무라이의 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일본 사무라이 전통을 그저 찬양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신구라>는 도쿠가와 막부의 태평시대에 47인의 무사들이 주군의 원수를 갚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장렬하게 복수를 감행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막부 이래로 일본에서 연극, 가부키, 영화 드라마의 소재로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신구라>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어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재생되어 왔듯이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사고체계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사 계급의 행동규범이 일본인 전체의 행동규범으로

사무라이정신, 무사도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본의 도덕을 유지해온 중핵적인 요소였습니다. 후지와라 마사히코가 쓴 <국가의 품격>에 보면 무사도는 가마쿠라 막부(1192~1333) 시대 이후 일본인의 행동 기준, 도덕 기준으로서 기능을 발휘해 왔다고 합니다. 무사도에는 자애, 성실, 인내, 용기, 측은 등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사도는 원래 가마쿠라 막부시대 ‘전투의 규칙’, 말하자면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260년 동안의 평화로운 에도시대에 무사도는 무사도정신으로 세련화 되어 모노가타리(이야기), 조루리(낭송 대사곡), 가부키(전통무대극), 강담(야담) 등의 예술 양식을 통해서 상인 계층인 초닌과 농민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무사 계급의 행동 규범이었던 무사도가 일본인 전체의 행동규범으로 변모해 간 것입니다.

일본의 무사도를 최초로 영어로 집필해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니토베 이나조는1899년 미국에서 <무사도, 일본의 정신(Bushido: The Soul of Japan)>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의 최고 미덕으로서 ‘패자에 대한 공감’, ‘약자에 대한 애정’, ‘열등한 자에 대한 동정’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측은’을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품격>, 후지와라 마사히코 저, 오상현 역, Book Star)

무사계급의 도덕률을 최초로 성문화

1600년대 중반에 유학자 야마가 소코는 무사계급의 도덕률을 최초로 성문화했습니다. 야마가는 이를 무사도라 불렀습니다. 야마가가 활약하던 시대는 역사적으로도 미묘한 시기로, 무사계급의 기력을 소진시키던 일련의 전쟁을 도쿠가와 집안이 막 종결짓고 난 참이었습니다. 한가해진 무사들은 지방을 다스리거나 에도의 거대한 관료체제에 흡수되었습니다. 부유한 도시상인들은 무사의 문화를 단편적이고 저속한 형태로 계승했습니다.

     

무사의 관습은 어느덧 세속적인 목적을 띠게 되었고 ‘정신에 내재하는 일본인다움’ 같은 무사의 이념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전통 깊은 무가의 법도를 글로 남기는 일은, 일본 전체를 하향식으로 사무라이화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습니다. 야마가 소코의 제자였던 무사 한 명은 ‘47인의 사무라이’에서 두목으로 등장합니다.(<일본의 재구성>, 패트릭 스미스 저, 노시내 옮김, 마티)

무사는 무사도정신이라고 하는 미덕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금전보다도 도덕적 가치를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평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사도정신은 전쟁이 끝난 1945년 이후부터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쇼와시대(1925~1989) 초기 무렵부터 조금씩 상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은 중국 침략이라는 비겁한 행위를 하게 되었고, 히틀러와 동맹을 맺는 등의 어리석은 일을 자행하게 됩니다. 후지와라 마사히코는 이 모든 것이 무사도정신이 쇠퇴했기 때문이라 고 보고 있습니다.

세계 3대 병서,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다른 한편 일본의 전국시대 말기를 살아가며 검을 친구삼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는 <오륜서>(1645년)라는 병법서를 서술합니다. 그는 책 서문에서 “불교나 유교 경전을 인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전의 전쟁사나 병법에 기록된 경험들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로지 끝없는 수련과 번뇌 끝에 깨닫게 된 자신만의 독특한 무사도를 그는 자연을 본보기로 삼은 노력의 결과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손무가 쓴 <손자병법>, 19세기 프로이센의 클라우제비츠가 저술한 <전쟁론>과 함께 세계 3대 병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야모토 무사시는 손무처럼 천군만마를 거느리며 변경을 누비던 장군도, 클라우제비츠처럼 국가의 대사를 관리하며 교육에 힘을 쏟던 군사이론 교육가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본 전국시대 말기의 무사로 그의 병법은 일본 무사계층의 한 유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병법이 3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베스트셀러로 서점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은 <오륜서>를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의 목록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기업인 GE의 CEO였던 잭 웰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는 위대한 세계적 군사이론 서적이다. 책 속에 서술된 전술원칙은 성공을 위한 기업은 물론 각 개인에게도 훌륭한 귀감이 되어 주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그림으로 읽는 오륜서> 미야모토 무사시 지음, 양원곤 옮김, 봄풀)
 
무사도정신의 부활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에서 ‘무사도의 장래’라는 제목을 붙인 제일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사도는 하나의 독립된 윤리적 규범으로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힘은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상징으로 삼고 있는 사쿠라꽃처럼 사바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 떨어진 후에도 그 향기를 가지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며 인류를 축복할 것이다.”(<국가의 품격>, 후지와라 마사히코 저, 오상현 역, Book Star)

방사성 물질 누출이 계속되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원전 폭발 상황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180명의 긴급요원들에게서 일본의 무사도정신이 다시 부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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