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
'민족' 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1.05.0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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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군인은 군에 입대하거나 장교가 될 때 대통령령(令)인 현행 군인복무 규율 5조에 따라 이렇게 선서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민족’이란 말 대신 ‘국민’이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우리 군(軍)이 장교 임관선서와 병사 입대선서에서 '민족'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이를 '국민'으로 대체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취지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군에 입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제 4월 26일 있을 군의(軍醫) 장교 임관식부터 개정된 내용의 임관선서를 적용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군 선서문에서 민족 개념 삭제

국방부에 따르면 현재 다문화 가정 자녀(남자)는 2010년 말 기준으로 6만여 명, 이중 16~18세 학생만도 4000여명에 이릅니다. 군은 외관상 명백한 혼혈인을 제2국민역으로 편성하던 종전 제도를 폐지하고 이들이 현역으로 복무하도록 병역법을 개정해 지난 1월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 중에서 만 19세가 된 남자 350여명이 지난 해 처음으로 징병 검사를 받았고 현재 아시아계 다문화 가정 자녀 100여명이 군에 입대해 복무하고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다른 말로 대체하는 조치는 이미 있어 왔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열심히 암송했던 ‘국기에 대한 맹세’ 기억하시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맹세문이 지난 2007년엔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도 수정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1968년 충남도 교육위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보급하다가 1972년 문교부가 이를 받아들여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시행하게 됩니다. 1980년 국무총리 지시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병행 실시하도록 했고 1984년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으로 법제화되었습니다. 1996년엔 다시 개정되어 국기강하식·각종행사에서 애국가를 연주할 경우 국기에 대한 맹세문 낭송을 생략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7년 7월 행정자치부에서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한다는 비슷한 이유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군 선서에서나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헌법에는 민족이라는 용어가 명시되어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로 시작됩니다. 헌법 제1장 제9조 역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민족’도 폐기해야 하나

대한민국 헌법 제4장 제69조에는 대통령의 취임선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변화에 맞춰 우리 헌법의 전문과 본문, 대통령 취임선서도 수정해야 하는 것일까요? 더 이상 '민족'이라는 말은 사용해서는 안 될, 그래서 이제 폐기처분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말일 뿐일까요? 맹목적인 한 핏줄, 단일종족의식을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배제해 왔던 지나친 민족의식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약화시키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민족과 민족주의에는 이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한국이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반식민주의와 근대화 세력으로서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영감과 자존심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민족주의는 한국의 사회, 문화, 정치에 비싼 댓가를 요구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경쟁적인 목소리들을 주변으로 밀어냈으며 (남북한 모두에서) 독재정부에 의해 추상적인 불멸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시민권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신기욱,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공동체에 대한 애착심은 필요

하지만 분명 공동체에 대한 공통의식과 그에 대한 애착심은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동안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기능했던 순기능적인 역할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사회발전에 기여했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그저 다문화주의가 확산되고 있으니 그와 맞지 않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폐기하자는 식의 일차원적 대응으로는 안됩니다. 헌법에 버젓이 명시되고 있는 민족 개념은 그대로 둔 채 하위의 선서나 공식 문서에 등장하는 ‘민족’ 개념만 폐기하거나 수정하는 식의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이에 대한 좀 더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신기욱 교수는 “지역과 지구화 세력의 존재와 점증하는 힘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종족적 민족정체성은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사라지거나 약화될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조직 원리로 남아 있을 종족적 민족정체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단순한 신화나 공상으로 취급하거나 단지 그것을 즉흥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그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애착심이 갖는 역할이 한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애국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애국심이란 것이 극도의 민족주의, 국가주의로 흘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애착심을 좀 더 민주화된 사회에 맞게 바꾸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공화주의적 애국심

민족주의를 넘어 ‘공화주의적 애국심’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애국심이란 단순한 국가주의에서 말하는 조국과는 다른,  좀 더 자유로운 정치공동체에 대한 애착을 의미합니다. 지난 2008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부인 미셸은 애국을 논하는 연설에서 조국에 대해 부정과 긍정의 두 가지 용법을 동원해 말했습니다. 전자는 비록 태어난 공간이지만 그간 인종주의로 물들어 애국하고 싶지 않은 조국입니다. 반면 후자는 이제 민주공화국으로서 존경과 충성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조국입니다. 그녀는 오직 민주공화국만이 애국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진보주의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공화주의적 애국주의’의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롤리는 <공화주의>에서 “애국심의 대상인 진정한 조국은 오직 자유로운 공화국일 수밖에 없으며, 나라 사랑이라는 것은 생래적으로 타고나는 감정이 아니라 법을 통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좋은 정치와 공적인 삶에 대한 시민의 참여를 통해서만 불붙게 되는 열정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비롤리가 말하는 진정한 조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단지 태어난 장소에 따라 자동으로 나라 사랑이 이루어지는 민족주의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로운 국가의 삶에서 나오는 인위적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국주의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민주공화국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면적 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안병진, “3장 애국”, <좌우파사전>)

학계의 연구와 논의부터

배타적 민족주의와 구분되는 애국심, 맹목적 국가주의와 동일시되지 않는 애국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민족을 대체하려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애국심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때 애국심은 국가주의적 위험성을 초래하지 않으며, 나아가 문화적 다양성이 증가되는 현실 속에서도 배타성을 초래하지 않고 다양한 문화의 공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로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해 온 인종,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치적 삶이 구현되는 정치공동체로서의 조국을 애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유지하면서도 민족개념이 갖는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는 애국심이 필요한 것입니다.(조계원, “한국사회와 애국심: 공화주의적 애국심의 검토”, <시민과 세계>).
 
그동안 공동체에 대한 일체감, 공통성, 애국심을 민족주의에서 찾았다면 그것을 대체할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민족’이라는 용어를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만 삭제하는 단순한 접근만으로는 안됩니다. 민족정체성을 좀 더 공개적이고 시민적이고 민주적인 정체성으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공화주의적 애국심’으로 부르던지 그저 ‘애국심’으로 부르던지  '민족'이라는 용어를 폐기해야 할  이유가 먼저 제시되어야 합니다. 먼저 학계에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부의 조치는 그 다음이어야 합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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