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도인처럼 사는 게 유일한 꿈”
“한가한 도인처럼 사는 게 유일한 꿈”
  • 박선영 기자
  • 승인 2020.11.13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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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죽비 그리는 박주남 작가

박주남 화백은 충남 보령을 대표하는 작가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오랜 시간 보령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보령에서 그를 만난 날은 그가 수덕사에서 전시를 마치는 금요일이었다. 다음날부터는 갤러리 탑에서 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전시작품을 옮겨놓아야 했다. 봄에 하기로 한 수덕사 전시가 코로나19로 미뤄졌고, 다음 전시는 이미 잡아놓았기 때문에 전시가 이어진 것이다. 박 작가는 작은 지역이라 전시를 보러 오는 이가 겹칠 거라며 새로운 작품을 추가하기로 했다.

전시회를 마감 삼아 작품에 정진

올해는 코로나19로 공연·전시가 많이 줄었는데, 박주남 작가는 개인전을 포함해 26회의 전시를 했다.

이렇게 전시를 많이 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차피 힘이 달리면 작업을 못하게 되니 더 힘들기 전에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냥 있다 보면 놀러 다닐 수도 있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어요. 전시회가 잡히면 그걸 핑계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면 무리해보여도 전시를 계속 잡는 겁니다.”

화가는 마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마음이 헤이해질 수 있으니, 전시를 잡아 스스로에게 숙제를 주며 다그치는 것이다.

여기에 박 작가는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자기처럼 제자들을 지도하는 경우는 제자의 그림을 봐주다보니 ‘매일 그림 그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보편적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니까 붓을 잡고 있으면 뇌가 스스로를 속이며 편하게 살라고 속삭인다. 그런 착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시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다 몸도 마음도 지쳐 서울살이를 접고 1996년 고향인 보령으로 왔다. 이후로 근 25년간 보령에서 활동했다.

산 중턱에 있는 집 마당 한편에 컨테이너 작업실을 마련했다. 작업실에 작은 부처님을 모셔서 법당으로 꾸며놓고 조촐하게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올린다.

시내의 개인 작업실에서 수강생을 가르치고 또 정기적으로 문화원 등에서 산수화, 사군자를 지도하는 외에는 주로 집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업을 한다.

워낙 말수가 적은 데다 숫기도 없는 그는 대다수 수강생인 주부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많이 늘었다는 평가를 듣는다며 웃었다. 예전의 그는 칭찬보다는 지적을 많이 하는 스승이었다.

수강생이 산수화를 그릴 때 나무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꼭 지적을 하고 넘어갔다. 예쁘게 균형을 맞춰 그려야 눈에 어긋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먹으니 생각이 변했다. “부처님이 자빠져도 부처님이지.”라면서 형상은 본질을 대변하지 않는다던 형님 스님의 말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내 그림도 30점 중 맘에 드는 건 2점뿐입니다. 부족한 것도 내 그림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됐지요.”

형의 출가로 불교 인연 깊어져

그는 불교와 지중한 인연을 갖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불자셨다. 아버지가 한의사이셨는데 300호가 넘는 마을이라서 돈을 벌려고 작정했다면 충분히 벌 수 있었다. 같은 마을에 아버지의 친구인 양의사도 있었는데 두 분 다 돈을 번다는 생각으로 의술을 펼치지 않았다. 그저 동네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술, 담배는 물론 육식도 하지 않으셨다. 그 시절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고기를 잡고 바로 먹지 않으면 상하기 쉽고, 그걸 먹으면 탈이 났다. 또 없이 살며 못 먹던 고기를 먹는 기회에는 너무 많이 먹게 돼 탈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한의사인 아버지는 고기를 아예 먹지 못하게 했다.

의사로서도 그랬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도 철저하게 금하셨다. 어린 자식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물고기를 잡아오는 날이면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서인지 박 화백도 술, 담배를 하지 못하고 고기는 최근에야 서너 점 먹기 시작했다.

불교와 그를 더욱 깊게 묶어준 것은 바로 위, 두 살 터울의 형이다. 박 작가는 8남매의 7째로, 6째인 형과 친하게 지냈다. 형은 서울에서 미대에 다니다가 출가했다.

그를 데리고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열리는 현대미술관에 데리고 간 것도 출가 전의 형이었다. 박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강한 꿈을 꾸게 한 자리였다.

형의 출가로 불교는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불교를 알고 싶어서 대한불교천태종에서 운영하는 금강불교대학 2년 과정의 강의를 들었다. 목정배, 정병조, 고익진 등 당대 최고의 교수진에게서 불교의 기본을 쌓았다. 그 뒤로는 형님 스님이 편지로 공부하는 방법을 전해주었다. 스님은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앉아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아침, 저녁 예불을 올리며 108배를 하고 앉아있는 시간을 갖는다.

불교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의 동생에게도 영향을 준다.

박 작가의 두 살 아래 동생 박주부 씨는 돌 조각가로 한국석조각예술인협회장으로 있다. 역시 보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목어(木魚)를 돌로 조각해 ‘구도(求道)’를 표현한다.

한 집안에 출가승이 나오고 그 동생 둘이 불교를 예술로 표현하니,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박 작가도 출가에 마음이 있었다. 자신에게 그림을 지도해준 분이 먼저 출가를 하더니 그에게 출가를 권했다. 그래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출가를 권하던 분이 자신의 은사의 상좌가 되길 강하게 권유하는 등 간섭을 했다. 박 작가는 본인이 원하는 출가의 길이 아니라 생각해 결국 행자생활을 접었다.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박 작가는 출가자와 다름없는 삶을 사는 듯 보인다. 결혼하지 않고 조석으로 예불을 모시고 108배를 하며 길을 나서면 관음정근을 한다. 붓을 들면 깨달음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까 늘 고민한다.

한편 박 작가의 형은 출가 이후로 다시는 붓을 잡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다.

대중생활보다 홀로 수행하는 무문관에 들어가 화두를 잡는다. 박 작가는 출가하면서 “친정식구가 왔다갔다 하면 좋지 않다”는 형의 말을 기억하며 보고 싶어도, 궁금해도 참았다. 그래서 그쪽에서 먼저 연락 오기 전에는 소식을 모른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 동안거를 날지 알지 못한다. 스님이 편지를 해 어디 있는지 알리면 아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알고 지낸다. 스님은 당신이 가끔 보시 받는 옷 등을 동생에게 보내주고 당신에게 선물 한 스님에게 줘야한다며 박 작가의 그림 한 점을 부탁하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의 것을 챙기지 않고 수행만 하는 형은, 동생들에게 불교 수행자의 본보기로 남았다.

▲ 禪 | 한지 수묵 | 72.7x60.6cm (2020)

장군죽비는 깨어있음의 상징

박 작가는 풍경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다가 불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거기서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훗날 작품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점점 선(禪)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불법(佛法)을 이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하안거는 대나무 발과 댓돌 위 고무신으로 표현했고, 동안거는 눈 오는 날의 털신을 그렸다. 그런데 자신의 의중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안거를 표현한 작품을 보고는 “이렇게 하면 시원하겠다”고 하고 털신을 보면 “마실 가고 싶다”고 했다.

한번은 전시에 대나무 빗자루를 소재로 작품을 출품했다.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얼마 후 열린 전시였는데 그림을 본 동료 작가가 “과격하십니다”라고 했다. 불의(不義)를 쓸어버리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투영한 결과이리라. 그 말을 들으니 박 작가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사실은 ‘마음을 쓸어 깨끗이 한다’라는 불교적 의미였는데 말이다.

박 작가는 전시회에서 그런 관람객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재미있다고 했다. 자신의 그림에 있는 여백을 보는 이가 채워간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다 2016년부터는 장군죽비를 그려야겠다고 작정했다. 죽비는 선가에서 수행자가 졸거나 좋지 않은 자세일 때 내리쳐서 지도하는 도구인데, 죽비 중에서 2m 가량으로 큰 것을 장군죽비라 한다.

“죽비는 깨어있음의 상징인데 깨어있다는 것은 또 살아있음을 의미하지요. 살아있다는 의미로 장군죽비에 가지를 그려 넣어보았습니다. 죽비만 그리면 너무 단순해서 변화를 줄 요소가 필요한 거지요.”

그의 그림에서 장군죽비는 비뚤어지고 가지가 움튼다. 장군죽비의 쓰임새로 보면 쓸모가 없는 상태다. 하지만 회화란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보니 장군죽비의 주제, 깨어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그리게 되었다.

그것 외에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장군죽비의 뒤편에 글씨를 넣어 선(禪)의 정신을 더욱 드러내면서 단조로움을 해소한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배운 서예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글은 주로 〈증도가〉, 〈자경문〉, 〈예불문〉, 〈증도가〉, 《금강경》 등을 쓴다.

그냥 글씨를 써넣는 것이 아니라 보기좋고 의미를 더하는 고민이 계속된다.

처음에는 글씨를 써서 돌에 새기고 탁본을 했다. 동생이 돌 조각가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동생에게 배워 돌에 각을 해서 탁본을 뜨는 작업을 했는데 문제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렵게 〈증도가〉를 각을 해놓았는데 한번 쓰고 난 그 돌이 사라져버렸다. 한번 쓰려고 뙤약볕에서 그 고생을 했나 싶어 탁본 작업은 접었다.

현재 주로 하는 방법은 글씨를 쓰고 그 위에 부분적으로 한지를 붙이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연한 농도로 먹을 갈아 은은하게 쓰고 그 위에 점점 농도를 올려서 여러 겹 쓰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경전의 감춰진 뜻을 끌어내야 한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글씨에도 남다른 생각을 가졌다.

“글씨야 오래 쓰면 잘 쓰게 되지만 오로지 남의 글씨 따라한다면 그게 무슨 작품이겠어요?”

대부분 스승의 글씨를 따라 쓰는 서예문화가 박 작가에게는 맞지 않는다. 남과 다른 자기만의 것을 찾으려 애쓰는 그는 ‘장인’이 아니라 ‘예술가’인 것이다.

명예·돈 쫓지 않고 그림만 그려

그는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참 드문 ‘원시인’이다.

비행기를 한 번도 타 보지 않았고 운전을 할 줄도 모른다. 심지어 형광등도 갈지 못할 정도의 심한 기계치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쭉 그린 것이지 전업을 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그림 그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잘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말수가 없고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느릿느릿 말하지만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 누군가 자신에게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면 그가 답한다. “내가 잘 그리면 시골에 쳐 박혀 살겠냐?”

그는 자신이 이 정도로 사는 건 주변의 도움이 있어서라고 덧붙였다.

“내가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두 번 수상을 하고 또 같은 데에서 심사위원을 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간 거예요. 진짜 여기까지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겁니다.”

화실에서 먹고 자는 서울생활이 힘들어 고향에 내려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하다 보니 꿈도 꾸지 않았던 것들을 이루게 되었다는 그. 이런 이유로 그는 바라는 것이 별로 없다.

그가 두 가지 정도 작은 걱정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보령에 한국화 분야를 하는 작가가 별로 없어서 자신이 계속 문화강좌를 맡았는데 자기 때문에 후배들의 설 자리가 없을 수 있겠다는 걱정이 조금 있다.

전시회를 많이 하다 보니 개인전을 하면 제자들이 찾아와 작품을 사려고 할 때가 간혹 있다. 스승의 전시니까 억지로 사주려는 것을 그가 왜 모르겠는가. 그런 인사치레가 영 불편한 그는 “나는 혼자 살고 돈을 쓸 데가 많이 없다”며 제자들에게 그림을 팔지 않는다. 그래서 강사 자리가 아직은 필요하다.

또 한 가지는 몸의 이상이다.

그는 작년부터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증상을 겪었다. 심장의 문제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는데 검사를 해도 이상이 없었다. 폐의 문제도 아니었다.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진단을 듣자 목까지 찬 숨이 쑤욱 꺼져 내려가며 증상이 사라졌다. 약을 처방 받았지만 ‘마음의 문제라면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약 없이 참아보기로 했다. 아직도 사람 많은 버스에 타면 간혹 증세가 나오지만 ‘관세음보살’을 집중해서 정근하는 방법으로 극복하고 있다. 실제 많이 좋아져서 이제 살만하다고 했다.

박 작가는 어렸을 때 행자생활을 하다 절은 나왔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아있다. 한참 후 다시 출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형님 스님께 했더니 “스님 공부는 어려서부터 해야 하는 거고, 또한 건강이 받쳐줘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형님은 어릴 때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몸집이 좋고 건강했는데 오랜 무문관 생활에 몸이 많이 상했다.

몸이 약한 박 작가는 그 말을 듣고 출가의 마음은 접었지만 죽기 전에 암자를 지어놓고 〈증도가〉에 나오는 말처럼 살고 싶다. 박 작가의 ‘꿈’이다.

그는 영가 현각 스님의 〈증도가〉를 좋아해서 작품에도 많이 쓰고 있다.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이 문장은 그가 추구하는 삶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정도 한가한 도인처럼 보였다. 요즘 세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순수한 예술가가 한가한 도인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았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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