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세단을 탄 진보주의자
고급 세단을 탄 진보주의자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1.06.2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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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이어야만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서민의 친구로서 서민의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이어야만 할까요? 부자가 좌파 이념을 갖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요? 우리 사회가 가진 선입견 중 하나는 서민의 친구는 고급 세단을 타거나 취미로 요트를 즐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민의 친구는 위스키와 고급 와인을 즐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주의자는 허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 맞다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는 부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합니다.
 
진보주의자는 고급 세단을 타거나 요트를 즐기면 안되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민적 이미지와 요트를 타는 취미가 조금 어긋나 보였던 것도 그런 선입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선입견을 악용해 보수신문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취미를 고급 요트를 즐기는 것으로 교묘하게 몰아갔지만 실제로 선실과 엔진을 갖춘 우리가 상상하는 크루저급(호화 요트)이 아닌 몇 백만 원도 안되는 작은 범선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서민의 편에 서겠다는 정치가라면 애써 자신이 가진 고급 취미나 기호를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하원의장에 오른 낸시 펠로시 현 민주당 원내대표는 가장 대표적인 급진적 페미니스트 정치가입니다. 그녀가 미국 하원의장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급진적인 정치 성향과 달리 고급 수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전형적인 중산층 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급진적 이념을 가진 정치가라는 선입견이 외모에 신경을 덜 쓰는 운동권 투사의 모습을 상상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미국 역시 진보주의자는 수수한 옷차림에, 부자가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부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이념 때문에 이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려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더 돋보였습니다.

강남좌파가 뜬다

요즘 한국 사회에선 강남좌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강남좌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서울대 조국 교수가 꼽히기도 합니다. 강남좌파란 계급적으로는 상층에 있는 사람들이 진보적인 좌파 이념을 따르는 경우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강남에 살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이고 반기업적이면서 친노동자적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계급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좌파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들은 외국에서도 다양하게 있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고급 승용차인 리무진을 몰고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을 비아냥대는 의미로 ‘리무진 리버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고급요리인 캐비어(철갑상어알)를 먹으면서 사회주의를 논하는 이들을 ‘고슈 캐비어’(캐비어 좌파)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영국에서는 런던 북부의 부촌 햄스테드의 부자들이 진보적인 노동당에 표를 많이 주자 보수주의자들이 이들을 ‘햄스테드 리버럴’이라고 불렀습니다. 샴페인 사회주의자, 살롱 좌파 등도 모두 ‘부유한 좌파’를 지칭하는 데 흔히 사용된 용어들입니다.(경향신문 “서구의 ‘부자좌파’”)
 
리무진 리버럴, 고슈 캐비어, 살롱 좌파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부자좌파는 엥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장파 역사학자 트리스트럼 헌트가 지은 <엥겔스 평전>의 부제는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입니다. 프록코트는 상의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19세기 중상류층 남성의 정장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자라면 우리나라 경찰의 통속적인 수배전단처럼 ‘노동자풍 외모’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도 있습니다. 엥겔스는 바닷가재 샐러드와 보르도산 최고급 와인 샤토 마고, 여우사냥을 즐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다 방직공장의 경영자였습니다.

“엥겔스는 평등주의자도 국가통제주의자도 아니었다. 행복한 인생을 열망했고, 개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했으며, 사람들이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장으로서 문화, 문학, 미술, 음악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이 평가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조직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뒤에서 엥겔스를 “물주선생”이라고 불렀듯 그는 마르크스의 영원한 지적, 물적 후원자였습니다.(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바닷가재 샐러드와 최고급 와인 샤토 마고를 즐긴 공산주의자

진보정당 소속의 국회의원이라고 한다면 기사가 딸린 고급 세단을 타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동자를 위하고, 서민을 위한다면 서민과 같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 퇴근 해야만 한다는 것은 선입견일 뿐 입니다. 국민의 대표로서 많은 업무를 봐야하는 국회의원이라면 주어진 시간 안에 보다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이동시간을 줄여야 하고 이동에 드는 수고를 아껴 생산적인 활동에 투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하나라도 더 챙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서민들과 같이 지하철을 타는 일보다 더 서민을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시간을 단축하고 편안한 차안에서 다음 일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서민들을 위해 더 의미 있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때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서 서민들을 만나고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 맞습니다. 늘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리는 보통 사람들의 고민을 몸소 느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민과 똑같은 조건에서 힘들게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것이 서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은 단견일 뿐입니다.
 
얼마나 서민적인지가 아니라 진정 서민을 위한 정치인

보수주의자들은 강남좌파를 위선자처럼 바라봅니다.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배신하는 그들의 의식이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는 그저 위선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정치인이라면, 더군다나 그가 서민의 편을 자처한다고 하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가 무슨 서민의 편을 드냐,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면서 서민을 입에 올리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런 불편한 시선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진보적인 이념을 가진 정치인들이 모두 서민과 같은 경제수준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진보주의적 이념을 갖는 다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정치인의 평가는 그가 고급 취미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 부자인지 아닌지, 얼마나 서민과 닮았는지가 아니라 진정으로 서민의 편에 서서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지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강남좌파가 보다 많아져야 하듯 고급 세단을 탄 진보주의적 정치가들 역시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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