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마빈 밀러, 그리고 프로야구 선수협의 권리
최동원, 마빈 밀러, 그리고 프로야구 선수협의 권리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1.09.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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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최동원 선수가 세상을 떠났다. 1982년 출범한 이래 한국 프로야구는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지만, 최동원 만큼 주목할 만한 삶의 자취를 남긴 선수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언론매체들이 고인을 추도하는 찬사에서 앞다퉈 말하듯, 고교시절 전무후무한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를 이뤄냈다거나 프로입단 후 1984년 한국시리즈 일곱 경기 중 다섯 경기에 출장해 4승을 거두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그의 자취는 오히려 그에게 그늘의 시기로 불려지곤 했던 1988년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이다.

최동원과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1988년 당시는 뜨겁게 달아오른 민주화의 열기는 사회 각 부문으로 퍼져나가던 때였다. 시민사회에서는 민주화를 통해 획득한 자유를 바탕으로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결성되었다. 대학생들은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대학 운영의 민주화 그리고 학생복지 향상을 위해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뭉쳤다. 교사들은 권위주의 시대 관제교육에 맞서 ‘민족, 민주, 인간화’를 내걸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창설했다. 노동현장에서도 조직화의 물결은 거셌다. 재벌대기업 사업장에서부터 어용노조를 대체하려는 민주노조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런 움직임은 이내 중소기업 작업장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환경, 여성, 평화, 통일, 복지 문제 등에 대응하는 시민운동단체들이 족출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물론 스포츠 분야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리고 최동원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리와 복지를 위한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물론 최동원이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처럼 민주화에 대한 신념이나 사회변혁 이론에 영향 받아 선수협을 결성하려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선수협에 대한 결심은 당시 해태 타이거즈 김대현 투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데서 기인한 바 컸다. 그 배경에 대해 최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같이 운동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의 활동을 명예욕으로 욕심 부린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수협 결성 시도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구단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최동원은 삼성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경남고 출신으로 롯데를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최고선수에게 다른 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선수로서의 자존심에 큰 손상을 가하는 치욕이었다. 그 후 최동원은 프로야구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 정도만큼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가고 말았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2000년에는 마침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선수협은 여전히 구단의 회유와 협박 속에 선수 결사체로서 자신의 권익과 복지를 실천할 만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마빈 밀러와 미국 프로야구 선수노조

그렇다면 프로야구 원조인 미국에서는 선수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결사체를 통해 선수 권익과 복지를 실현할 수 있었을까? 한국 야구팬들에게 미국에느 프로야구 선수 ‘노동조합’이 존재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겠지만, 1950년대 이전에는 미국에서도 선수 노조는 불온과 경원의 대상이었다. 구단이 형편없는 금액으로 선수들의 연봉을 낮춰 잡아도 “야구는 스포츠지 사업이 아니다”라는 통념에 밀려 선수들은 자기 조직화를 통해 지위향상을 시도할 수 없었다. 선수들의 불만은 계속 커져갔지만, 그렇다고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노조는 사회적으로 떳떳치 못한 극렬분자들이나 만드는 악질적 조직이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 피츠버그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던 최초의 움직임은 쉽게 분쇄됐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구단 경영진이 막을 수는 없었다. 산업노조들은 위용을 키워가며 집단행동이 조합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주는지 보여주었다. 또한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 인종 차별의 벽을 깨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 프로야구 선수들도 자신들의 복지향상을 위한 조직을 만들 여건을 갖추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형국임에도 구단주들은 ‘너희들끼리 할 테면 해봐라’는 식으로 대하며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마침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Players Association)이 창설됐다. 처음 이 조직은 연금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전력을 기울였다. 초기 선수협의회는 ‘노조’라는 냄새는 전혀 피우지 않으려 했으며 몇몇 유명 선수들이 협회 운영을 주도했다. 이 당시 미국 선수협 활동은 오늘날 한국 선수협과 비슷한 수준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미국의 야구사가들은 이 시기까지를 프로야구 노동관계의 중세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관계는 1966년 노동경제학자 출신으로 자동차부문 산업노조에서 단체협상 실무를 쌓아온 마빈 밀러(Marvin Miller)가 선수협 수석 고문을 맡으면서 크게 변화했다. 경영진을 생리를 꿰뚫으며 산업노조 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뒀던 밀러는 구단과 대등한 화력의 무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협상에 이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무기는 노동법에서 구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수협회를 법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조합으로 전환해야만 구단에 애걸복걸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역설했다. 미국 사회의 어느 업종을 둘러봐도 보수와 노동조건을 협상하면서 야구선수들처럼 저자세를 취하는 데는 없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마빈 밀러의 설득과 선수들의 결의가 합쳐진 이후의 사태 전개는 미국 야구계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로 나타났다. 1967년 사상 처음으로 단체협상이란 것이 이뤄졌다. 그 결과 ‘선수 협약’(players agreement)이 마련됐고, 실제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을 7,000달러에서 1만 달러로 올려놓기도 했다. 그 외에도 구단측이 협약을 어겼을 경우 적법한 고충처리 절차도 마련했고, 2년 협약 유효기간 중에는 연봉조정 원칙을 변경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노동협상 전문가 마빈 밀러의 도움으로 그들이 직접 참여하고 운영하는 결사체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복지를 온전히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민주적 결사체로서의 선수협의회

한국의 최동원과 미국의 마빈 밀러가 선수협의회, 선수노조 활동을 통해 보여준 실천의 의미는 단지 프로야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반 미국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은 새로운 대륙에서 무르익어 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현장을 지켜보며 그것을 가능케 만든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자 했다. 두 차례의 미국 여행 끝에 그가 찾은 답은 미국인들이 ‘결사의 예술’을 통해 자신의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것이 미국 민주주의를 유지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시민 개개인의 권리와 이익은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결사체를 구성하고 그 결사체를 통한 적극적 실천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선수노조가 보여준 활동은 구단주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적 전통 속에서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화 이후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운영하고 그 조직의 힘으로 자신들의 권리와 복지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우리 민주주의가 아직도 시민사회 수준에서는 허약한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지연, 혈연, 학연이 압도하고 그 꼭대기에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기득이익을 지키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전근대적 연고의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 민주주의에 희망은 없다고 말한다. 21세기에서조차 이와 같은 전근대적 연고의식이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결사체,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부문의 기능이익을 대표하는 단체들이 활성화되지 못하는데서 전근대적 가치와 획일주의 문화가 자라나는 것이다. 최동원은 이런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최고이며,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최고답게 던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늦었지만 우리사회도 미국처럼 다양한 부문과 영역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며 자기 영역에 속한 사람들의 권리와 복지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결사의 예술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권리(your rights)이다.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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