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2. 허공에 말뚝을 박아라.
제 1부 2. 허공에 말뚝을 박아라.
  • 혜범 스님
  • 승인 2021.01.2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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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미륵 2

버스 정류장 건너편 쪽으로 실개울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건너 논바닥 쪽으로 추수하고 난 볏단들을 말똥처럼 돌돌 굴려 하얀 비닐로 친친 감아 멀칭 해 놓은 것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일찍부터 잠에 깬 참새들이 안개 낀 빈 논을 부지런히 까불며 돌아다녔다.

부처행을 하면 부처가 되고 도적행을 하면 도둑이 된다?”

어둠과 외로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지명은 절밥 도둑놈들이란 생각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다. 다시 깜깜한 어둠속에 파묻히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찾지 말라. 답은 그대 안에 있다.

어릴 적 논바닥의 볏단들을 모아 모가지 쪽을 묶고 세워 놓았는데. 소년만 아니었으면 세상의 끝을 향해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안개는 실연당해 자살한 여귀가 흘려 놓은 눈물처럼 선뜩하기까지 했다.

소설(小雪)이었다. 나무에 몇 닢 남아 있지 않은 나뭇잎들이 저마다의 마지막 몸짓으로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눈이 올 거 같은데…….”

일곱 시 반차, 아홉시 이십사 분 차하고 열 시 삼십분 차가 있어요. 요금은 만 팔백 원, 한 시간 오십 분 정도 소요된답니다.”

홍성이라고 했지?”

, 스님.”

지명의 물음에 소년이 주먹을 쥔 채 대답했다.

조금 더 늦은 시각이라면 말린 고추며 누런 골판지 라면박스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는 강아지나 보자기로 싼 닭들을 장에 내다 팔 거를 챙기는 아낙네들, 이발소로 머리를 깎으려 나가는 할아버지 미장원에 염색을 하려는 할머니들이 기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른 시각이라 버스를 타려고 하는 이는 지명과 소년뿐이었다.

애초로워하는 눈빛, 소년의 얼굴빛에 홍조가 보였다. 눈치를 보니 지난밤을 꼴딱 세운 모양이다. 지명도 그런 적이 있었다. 세시 반이면 일어나야 하는데 새벽 두 시까지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새벽예불을 해야 하는데 졸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졸린다고 잠깐 눈을 붙이면 잠들어 일어나지 못할까봐 책을 손에 잡곤 했다.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오전에 5 미리에서 10 미리정도 눈이 내린데요.”

땅바닥에 비벼 담뱃불을 끄던 지명은 이미 검색을 해보았다는 소년의 말에 희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도 참 기막힌 운명이로구나.”

그러나 그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하얀 찍찍이 끈이 달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설렘으로 인해 긴장했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검은 바지에 초록이 짙은 카키색 점퍼, 속에는 회색 티셔츠를 입었다. 새 옷은 아니었다. 삭고 바랐으나 찢겨진 곳도 없었고 기운 곳도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견뎠는지 얼마나 고독한 부대낌을 견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소년에게서 누추함도 또 꾸밈이나 구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하찮은 목숨이나마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한 자태의 청정함을 보는 듯했다.

그때였다. , 개울 건너편 쪽에서 1톤 트럭 하얀색 포터가 다리 쪽에서 꺾어지는 모퉁이를 돌아 두 사람 가까이 다가와 멈춰 섰다.

너 정우 아니냐?”

. 안녕하세요?”

어디 가?”

모란 시외 버스터미널요.”

지명도 추워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지명도 너는 아버지에게로 나는 열반(涅槃)도 해탈(解脫)도 없는 길로하며 걸망을 손에 든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도 소년이 간절히 원했던 필사적인 일이었다면.

. 타세요.”

감사합니다.”

해인은 한 손으로 합장을 해 보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스님, 먼저 타세요.”

니가 먼저 타.”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지명의 고집스러움에 또랑또랑한 소년은 하더니 가방을 벗었다. 일체 서두르지 않는 지명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명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지명을 바라보던 소년이나 지명은 생각, 감정들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곰살궂게 대하지 못하는 성격탓이기도 했다. 이윽고 소년이 가방을 내어주었고 차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등에 매었던 가방을 받고 손을 내밀었다. 지명도 소년의 가방을 든 채 걸망을 벗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두 사람의 행동들이 오래 이어진 것 모양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았다. 당연히 부탁을 들어주리라 예견한 것처럼. 그런 소년의 눈을 보다 지명도 순순히 바랑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거절해도 좋고 무시해도 좋다는 눈빛으로 바랑 속에는 가사와 장삼, 목탁과 요령 그리고 밥을 빌어먹는 발우, 겨울 내의 한 벌 양말 두 켤레가 전부였다.

윗절에 계셨던 스님이시죠?”

…… .”

지명이 짧게 대답했다. 돌아보면 문득 왔던 길들은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남은 건 추레한 몸뚱이 뿐이었다.

사십 대 중반의 운전을 하던 사내가 묻는 말에 그만 소년과 동행을 허락한 셈이 되고 말았다. 지명은 무심하게 차창 밖 풍경을 내다보다 눈을 감았다. 추수를 하고 난 뒤의 빈 논. 안개가 야산을 타고 꿈틀거리다 흘러내리는 산밭을 휘어 감다가 나타나는 촌락들, 고만고만한 풍경들의 경치였다. 저렇게 사람들 사는데, 이 땅 어디에도 내려앉아 뿌리 내리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어디로 또 떠나는 것인가. 지명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것도 모르는 채 소년은 안심이다, 이젠 됐다하며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지명에게까지 들려왔다. 차가 굽잇길을 돌아들며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기색을 보니 차를 얻어 타게 된 것에 여정이 덜 힘들게 되었다는 듯 소년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지명은 소년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늘 배가 고팠다. 배고픔도 서러웠지만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도 견디기 어려웠다. 소년은 먼저 말을 걸어 물어보지 않으면 입을 열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며 그림자를 따돌리기라도 할 까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은행알을 줍는 소년에 대해 공양주보살에게 물어보았다.

, 그 얘요? 장대비가 쏟아져도 천둥이 치고 벼락이 쳐도 끄떡하지 않을 아이에요.”

공양주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명에게도 그리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세 명을 살해한 살인범으로 감옥에 가 있고 무기수며 이모할머니에게로 와 살다 지난 해 그 애의 할머니가 죽어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를 보면 그 애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십은 데 팥 안 나는 교?”

하품을 길게 하던 지명은 공양주보살의 말에 ……. 그래도 모르죠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었다.

지명은 입을 쩝 다셨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유일한 피붙이이리라.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지명은 소년과 같은 데칼코마니 같은 고통을 앓았다는 생각을 했다. 상처 상실 고통이라는 것이 지명의 가슴에도 똑같이 데칼코마니처럼 찍혀 있었다. 부친 위독 급래. 지명은 이복 여동생에게 전보를 받았지만 영안실도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

스님 무슨 생각하세요?”

각즉부동 동즉유고 과불리인고(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라고.”

……무슨 뜻이래요?”

깨어있는 사람은 주위의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이 없으며 마음에 흔들림이 있으면 고통이 생긴다, 는 뜻이래요.”

……, .”

차가 방지턱을 지나가자 덜커덩거렸다. 그리고 앞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하품이 쏟아지고 잠이 솔솔 오고 있었다. 눈앞이 침침하고 가슴이 답답해왔다. 잠깐 졸았나, 했는데 차가 또 방지턱을 넘어가며 삐걱대는 소리에 깨어보니 차는 모란시장에 다다라 있었다.

순간 차에서 내린 해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여기가 할머니랑 칼국수 장사를 했던 장터에요.”

어느 샌가 미명(未明)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장사가 되던 안 되든 할머니랑 여기 나오면 세상사는 거 같았어요.”

그럼 나랑 여기서 칼국수 장사를 해볼까?”

지명의 말에 소년이 맑게 웃었다. 순간 지명은 시간이 일러 아직 개장하지 않은 쓸쓸한 장터에 서서 눈을 껌벅이는 소년의 눈가가 젖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본각 유여미인 의방고미 약리어방 주무유미(本覺 猶如迷人 依方故迷 若離於方 則無有迷).”

?”

운전을 해준 처사가 운전석에서 내려 가슴에 두 손을 합장하고 옆에 서있다 무슨 깁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며 눈을 크게 떴다. 소설(小雪)의 새벽 찬 바람이 세 사람의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사람 모여 사는 곳이면 누구에게도 상처는 있었다.

깨어있지 못함(不覺)은 곧 고통이요 중생이며 세간이라. 마치 방향을 잃어 혼란스런 사람이 방향에 의지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과 같으니, 만약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혼란스러울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

지명의 말에 처사가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내두르며 합장했던 손을 양쪽으로 벌려보였다. 소년도 어깨를 우쭐 해보이더니 처사랑 눈을 맞추며 역시 마찬가지로 두 손바닥을 양쪽으로 벌려보였다.

모르겠는데요.”

소년의 말에 처사가 낄낄대고 웃었다. 그러자 지명도 나도 모르겠는 데요하며 처사와 소년처럼 잠시 두 손을 벌려 머리 위에 올려 보이고는 표정을 바꿔 두 손을 가슴에 합장한 채 좌우지간 여기까지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가볍게 허리를 수그렸다.

...계속...

혜범 스님

1976년 입산, 1991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바다, 뭍, 바람」당선. 1992년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이 영화화되었으며, 1993년 대전일보에 장편소설 『불꽃바람』을 연재했고, 1996년 대일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장편소설 『언제나 막차를 타고 오는 사람』(흙출판사), 『손을 잡으면 마음까지』(청림출판사), 『천기를 누설한 여자』(흙출판사) 『반야심경』(밀알출판사), 『업보』(밀알출판사), 『남사당패』(태일출판사), 『시절인연』(밀알출판사), 『플랫폼에 서다』(북인) 등을 출간했으며,

산문집으로는 『행복할 권리』(도서출판 북인), 『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밀알출판사), 『달을 삼킨 개구리』(북갤럽), 『숟가락은 밥맛을 모른다』(북갤럽)를 펴냈다.

현재 강원도 원주 송정암에서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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