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 스님 추도사] 청년 백기완의 넉넉한 무릎, 이제 우리가
[명진 스님 추도사] 청년 백기완의 넉넉한 무릎, 이제 우리가
  • 명진 스님
  • 승인 2021.02.1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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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야, 스님 가시는데 차비 좀 드려라."

조계종에서 승적이 박탈된 뒤, 선생님께서는 뵐 때마다 당신도 넉넉지 않으셨을 텐데 꼭 얼마라도 용채를 손에 쥐어주셨다. 지난 가을 병상에 누워계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말씀도 못하실 때였는데 내가 찾아뵙자,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채원희씨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내셨다. 채원희씨가 주머니에서 얼마간의 노자를 내어주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시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는 것이었다. (조계종에서) 짤린 중이 그렇게 안쓰러우셨던 모양이다.

2017년께, 50년 동안 몸을 담고 있던 조계종에서 승적을 박탈당하자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신 분도 백기완 선생님이셨다. 50분이 넘는 우리 사회 원로분들께 사발통문을 돌려 '명진스님 제적철회를 위한 원로모임'을 조직하시고 기꺼이 좌장을 맡아주셨다. 그리고 연이어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도 나의 제적 문제에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셨고 그렇게 1000명이 넘는 시민운동가들이 제적철회와 조계종의 적폐청산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단식천막에 오신 날엔

권력이든, 정치권이든, 시민사회든 이상하게 종교의 잘못에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종교가 유형무형의 힘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그런 고정관념마저 훌쩍 뛰어넘으셨고 오로지 진실과 정의를 기준 삼아 세상을 보고 걸음을 내딛으셨다. 조계사 앞에서 조계종 적폐청산을 위해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도 수시로 찾아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백 선생님께서 단식천막을 찾아오신 날은 나도 응석받이가 되어 선생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쉴 수가 있었다.

ⓒ채원희
ⓒ채원희

군부독재와 모진 고문에도 쓰러질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으셨던 노투사는 단식이 스무날에 가까워져 갑자기 혈압이나 혈당 등이 급속도로 떨어지자 사람을 보내 "그 몸 상하면서 싸울 생각말고, 건강하게 계속 싸우라"는 말씀을 전해주시기도 했다. 아마도 당신께서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정권에 맞서 수없이 투옥되면서 고문을 받아 반쪽이 성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 여러 차레 투옥되시기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특히나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된 뒤 81kg의 거구였던 몸이 40kg 반쪽으로 축이 났다고 한다.

인간을 인간 아니게 만들어 항복시킨다는 게 그 시절의 고문이었다고 한다. 여러 민주인사들이 끌려갔지만 특히 목소리도 크고 기개가 남달랐던 백 선생님의 기를 꺾으려고 했다. 고문기술자들은 매질은 물론 공중에 매달기도 하고 손톱을 뽑기도 하는 등 할 수 있는 고문은 죄다 동원해 선생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만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못 견디고 항복을 하기 마련인데 선생께서는 "때려라 이놈들아! 더 때려봐라"라고 호통을 치는 통에 더 미움을 사서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맞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불의한 권력도, 어떤 못된 고문기술자도, 백기완 선생님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친일경찰들이 독립투사들을 고문할 때부터 이어져 오던 못된 버릇을 한국 경찰은 오래 동안 버리지 못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는 속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 조작을 통해 간첩으로 둔갑하던 시절이었다.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무지막지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고 그중 김병걸 평론가는 후유증으로 앓다가 작고했을 정도였다. 백 선생님께서도 내내 고문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셔야 했다. 내가 그 시절에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까를 여러번 생각해 본 적 있다. 아마, 백기완 선생님처럼은 살지 못했을 것이다.

체게바라가 90살까지 살았다면... 재야의 외로운 고목

우리 사회가 혁명의 열기로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돌멩이 한 번 안 던져본 사람이 없고 최루탄에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분투가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그나마 이만큼은 민주화되고 살만해졌다. 하지만 그 시절 뜨겁게 외치던 민중이 해방되고 주인되는 세상, 갈라진 조국이 하나로 통일되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루지 못한 그 해방의 외침, 통일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 것일까.

폭풍 같은 시절 혁명의 길을 가기는 오히려 쉽지만, 햇살 난만한 시절 혁명의 길을 가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말이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세월은 무섭다. 그 몸에서 난 자식도 변하게 하는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사람들은 세월 속에 변해갔고, 그 뜨거웠던 혁명의 열의는 식고 변화의 열망은 흩어져 버렸다.

백기완 선생님의 빈소에서 어느 분은 말씀하셨다. "체 게바라가 90살까지 살았다면 우리가 아는 체 게바라일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라고. 그렇다. 한생을 일관되게 살기란 참으로 어렵다. 더욱이 모두가 혁명을 포기하고 다만 약간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는. 모두가 대의보다는 일신의 편안함에 익숙해진 이 시대에는.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뜻'으로 살아오셨다. 민중을 위해, 민족을 위해, 간난신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대열에서 한 번도 이탈하신 적도, 뜻과 몸을 흐트러지게 하신 적도 없다. 남아공에 태어났다면 만델라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고, 쿠바에서 태어났다면 피델 카스트로 국가수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 민중의 지도자였던 백 선생님께서는, 김구 선생님의 뜻을 이은 민족의 지도자였던 백 선생님께서는 투쟁하는, 고통받는 많은 이들의 환한 등대이셨으나 동시에 재야의 외로운 고목이기도 하셨다.

민중과 민족의 지도자가 태어나길 바라지 않는 70년 분단기득권 체제의 집요한 공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선생님을 믿고 따랐던 이른바 뜻을 같이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열을 이탈해 안락한 소시민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소위 586으로 대변되는 80년대 민주화세대는 60~70년대 숨도 못 쉬던 박정희 치하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분들의 희생 위에서 대중의 지지라는 봄을 맞았다. 정치권으로 간 이들 다수는 그 뒤로도 안락한 일신의 봄을 쫓았고, 선생님의 길과 멀어졌다. 이들의 거리두기는 선생님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고, 혁명을 실현불가능한 헛된 것으로 전락시키는데 크게 일조했다.

극락과 지옥

백범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던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아흔해의 삶으로 그 뜻을 고스란히 이으셨다. 더 나아가 민중해방, 민족통일이라는 한국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꿰뚫어 보시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셨다. 타협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한길을 가셨다. 백범 선생님께서도 그만하면 잘 하셨다고 지하에서 말씀하셨을 것 같다.

'노나메기'. 백기완 선생님께서 바라시던 대동세상이다. 대동세상, 절집에서는 이를 '극락'이라고 부른다. 젓과 꿀이 흐르는 세상이라고 다 극락은 아니다. 먹을 게 넘쳐흘러도 자기 입에만 떠 넣으려고 다투다 상도 뒤집어엎는 게 지옥이고, 서로의 입에 먹을 것을 떠 넣어주는 게 극락이다. 극락과 지옥은 어떠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따라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함께 살려고 하면 그대로 극락인 것이고 자기만 잘 살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 자리가 지옥이 되는 것이다.

당신께서는 생전에 문정현 신부님과 당신의 삶을 담은 <두 어른>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몸뚱아리의 끝을 죽음이라고들 하는데 아니야. 진짜 죽음은 뜻을 저버렸을 때야. 뜻을 저버리면 죽되 싸그리 죽는 거야. (…) 우리 모두 한갓된 죽음은 뿌리치고 강요된 죽음과는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죽어야 사는 깨우침으로, 우리 새 세상을 빚어내야 한다 그 말이다."

아흔에 가까운 삶을 사셨지만, 우리는 외람되지만 선생님을 '청년 백기완'으로 기억한다. 당신께서는 민중을 위한 세상, 해방세상에 대한 뜻을 한 번도 저버리신 적도 굽힌 적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고난과 유혹이 와도 변함없이 꿈을 꾸셨고 그러한 세상을 향해 뜨거운 가슴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셨다. 끝내 그 길에 이르진 못하셨지만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는 삶으로, 온몸으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3.1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면서 끝끝내 변절하지 않으셨던 단 한 분의 애국투사 만해 한용운 스님을 떠올린다. 만해 스님께서도 일제에 고개 숙이지 않겠다며 서서 세수를 하시고, 볕이 들진 않지만 일제를 향해 집을 짓지 않겠다며 북향집을 짓고 사셨다. 무릇 모든 깨친 자는 자기 자신이 아닌 세상을 향한다.

만해 스님은 <님의 침묵>에서 노래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그렇다. 님은 갔지만,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청년 백기완의 뜻은, 꿈은,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내딛는 걸음걸음 속에, 숨쉬는 숨통 속에, 오래도록 함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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