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0. 1998년 중국 베이징 아젠다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0. 1998년 중국 베이징 아젠다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09.0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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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사찰복원사업에 대하여”

108개 암자가 있었던 금강산의 사찰은 6·25전쟁 때 대부분이 파괴, 소실됐다. 이외에 개성과 황해도, 강원과 함경도, 평안도와 평양 등의 사찰 파괴는 전쟁 초기보다 종전을 앞두고 일어난 일들이다. 모든 사암이 파괴된 평양지역을 비롯한 금강산 4대 사찰이던 내금강 장안사와 유점사, 외금강의 신계사 등 숱한 사암들은 미군의 폭격과 방화로 소실되고, 내금강의 표훈사와 정양사만이 부분적으로 피해를 봤다.

1951년 5월부터 UN군 예하의 미국 극동공군은 “금강산의 사찰에 인민군이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폭격을 가했다. 금강산 장안사는 같은 해 5월 6일 폭격으로 엿새 동안 불에 탔다. 유점사는 그해 5월 10일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60여 동의 건물이 사라져 폐허가 됐다. 북측 <조선중앙통신>은 2002년 12월 13일 기사에서 “미군의 유점사 폭격을 가리켜 ‘귀축(鬼畜) 같은 만행’이었다.”라고 했다.

북측 김일성 주석이 1948년 8월 22일에 직접 방문했던 해주 신광사를 비롯한 황해도 사찰은 1951년 5월 13일에 제58 전투 폭격비행단 소속 F-84기 20대의 폭격으로 해주시 일대가 75% 정도 피해를 볼 때 사라졌다. 1950년 11월 17일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J. Muccio)에게 공군 출격계획을 설명하면서 “불행히도 이 구역은 사막화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그 당시 피해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함경남도 함흥시 만세교 폭파 장면(1950.12.19.) 사진=나무위키 백과(Flicker)》 검색.



1970년대 말부터 복구되기 시작한 북녘사찰들은 남북불교 교류가 시작된 지 7년 만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필자는 그 당시 북측과 협의 단계에 머물렀으므로 제안서와 같은 뜻으로 ‘사찰복원사업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였다. 남북불교 교류의 새로운 화두가 된 사찰복원 논의가 시작된 배경과 그 추이를 다시 살펴본다.

북녘 사찰복원의 아젠다

누구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으로, 북녘의 사찰복원 사업이 그중 하나였다. 그것은 북측 최고지도자의 의중까지 반영하는 중대 사업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일 때, 불교 교류에 있어 새로운 아젠다(Agenda)로 제시된 분야는 사찰복원사업이었다.

그 당시 또는 지금에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북녘 사찰복원은 1988년 초부터 이래저래 회의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사라진 금강산의 유명 사찰이 주요 대상이었다. 북한 당국에 의해 1978년 하반기에 묘향산 보현사 만세루가 제대로 복구되면서 이곳을 방문했던 주요 인사들에 의해 회자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시작은 1992년 홍콩에서 설립한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에 의해서다. 통일교 측과 박경윤 회장, 북한이 공동 주주로 세운 북측 법인의 금강산국제그룹 박 회장은 1991년 4월 일본 나고야(名古屋)와 평양을 잇는 전세기의 직항로 개설로 재일교포 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의 주석공관에서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설립자와의 약 3시간 오찬 회담을 성사시켜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때 동행한 박 회장은 이 그룹 계열사에 속한 금강산국제무역개발・금강산국제관광・금강산개발・평양 양각도국제호텔・주일고려무역 등의 사장과 고려상업은행 총재 등을 겸직하기도 했다.

1935년 충북 청주 출생인 박경윤(朴敬允) 회장은 재일교포이면서 재미교포 여성으로 금강산관광 개발의 ‘원조’라고 불린다. 현재, 중국 베이징시에 거주하고 있는 박 회장은 200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와 ‘신의주밸리 계획(가칭)’으로 협의한 내용이 <전자신문>에 실린 바 있으나, 남북 직교류가 빈번했던 2000년대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다시 교류가 중단된 2013년 10월 초, 베이징에서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하고, “북한 서해에 채굴 가능한 원유 12억 배럴 있다.”라는 <동아일보> 기사에도 등장했다. 이후 그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1989년부터 국외 인사들의 테이블 메뉴로 등장한 북녘 사찰복원에 대한 논의사항은 1997년 7월 13일~15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신법타 평불협 회장에게 처음 소개되었다. 1996년부터 이슈화된 식량지원 방안을 모색하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약칭 아태・평화위원회) 베이징 대표부가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을 신법타 평불협 회장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 통일전선부 산하 단체로 1994년 5월 설치된 아태·평화위원회와 대외 관계를 맺고 있던 재일교포 박경윤 회장을 민간교류 차원에서 남측 인사에게 연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 등 미수교국가와 민간교류를 주목적으로 하는 아태·평화위원회는 북측이 1997년 내각(정무원) 개편으로 외자 유치를 담당하던 대외경제협력위원회가 해체되고 그 업무를 인수하였다. 이에 외국 및 남측의 대북 경협사업 파트너도 1961년 5월 13일에 설치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약칭 조평통)에서 아태·평화위원회로 변경됐다. 그때 북녘의 사찰복원 사항도 아태·평화위원회와 남측과 연계하는 데 금강산국제그룹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교류 창구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찰복원사업에 관한 문서에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국제그룹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8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처음 추진된 남북교류 분야에 있어 협의 사항으로 등장한 사찰복원 아젠다는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와 이를 코디네이터를 한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 여기에 신법타 평불협 회장이 참여하였으나, 북녘 사찰복원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설정된 첫 로드맵(roadmap)은 미완의 구상에 머물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03년도에는 또 다른 계획 주체들에 의해 추진, 발전됐다.



금강산 신계사 터와 팻말(1989년 7월) 금강산 신계사지. 사진=신법타 평불협 회장 촬영.



북녘 사찰복원의 로드맵

1994년 5월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가 설치되기 전까지 평양으로 가는 길은 홍콩의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박 회장은 “금강산개발을 위해 1992년에 북측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홍콩의 세계적인 개발조사 전문회사에 용역을 맡겨 금강산개발에 대한 계획서와 타당성 조사보고서를 1994년 1월 초에 완성한 다음, 세계평화연합 박보희 회장과 평양으로 들어가 그해 1월 27일 자로 ‘금강산관광개발타당성조사’에 대해 김일성 주석의 친필 서명까지 받았으며, 금강산국제그룹은 정무원(내각)으로부터 50년 동안 금강산 관광개발 예정지 안에 있는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냈다.”라고 최재영 목사가 쓴 《현대종교》(2019)에 전한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타계하면서 금강산 사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1998년 6월에는 갑자기 금강산개발사업이 현대 측으로 옮겨졌다. 현대그룹의 참여와 개발계획조차 없던 1994년도에 금강산국제그룹은 금강산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오염되지 않은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취지로, 10년에 걸친 단계적인 플랜을 세웠다. 초기 단계에서 연간 50만 명, 최종 완료 시점에는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목표로 계획을 수립했다. 초기에는 금강산 지역을 개발하고, 후속 단계에서 강원도 원산 방향의 해안지대를 따라 북쪽으로 지경을 넓혀가기로 한 것이다. 초기 계획에서 금강산의 사찰복원이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은 초기 방문객의 홍보와 시설 유입적 측면이 고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금강산개발에서 사찰복원을 주요 아젠다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남측이나 미국 등에서 유입된 종교들을 통해 자칫 인민들이 잘못된 사대주의에 물들거나 그동안 지켜왔던 반일반미 정신과 반제정신이 쇠퇴해지는 것을 경계한 북조선에서 종교 참여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점을 설득한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이 1998년 3월 14일 남측 조국통일평화불교협회(평불협)와 함께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참사 황철)를 참여시켜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하게 됐다.

이 합의서에는 금강산에 소재한 전통사찰 문화재 중 신계사를 우선 복원하며, 복원과 관련된 비용과 기술은 평불협이 제공한다. 남북 정부가 금강산 탐방을 허용할 경우, 불교도를 대상으로 금강산 성지순례를 한다. 1998년도 상반기 중에 금강산 현지답사를 할 수 있도록 제반 절차상의 편의를 제공한다 등 5개 항목으로 구성하였으며,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평불협이 별도의 단체 구성을 인정하고 사업의 계속성을 보장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평불협은 1998년 6월 18일 오후 5시 한국불교종단협의회(종단협) 강당에서 ‘금강산문화유적복원 추진위원회’를 창립하고, 신법타 평불협 회장·성초 대한불교진각종 통리원장·김동현 박사가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9월 말, ‘금강산 신계사 복원추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조선으로부터 금강산개발을 위임받은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 강순이 각기 서명한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에 관한 협약서’가 체결됐다. 이때 평불협은 평양 백두산건축연구원에서 제작한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 복원설계도면’ 두 점을 전달받았다.



금강산문화유적복원추진위원회 창립식(1998.6.18. 종단협 강당). 사진= 《평불협 15년사》(2007년).



이 협약서에는 전문을 비롯하여 제1조 사찰복원의 순서, 제2조 사업의 당사자와 당사자의 의무, 제3조 재원조달과 기술협력, 제4조 복원사업의 중요과제 수행, 제5조 정부승인 및 사업추진일정, 제6조 평불협의 금강산관광 참여 등 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추진 방식에는 남측이 신계사 복원 고건축 기술자문 및 기술제공과 관련비용 부담을, 북측이 복원 원자재와 기술 및 노무인력과 남한 내 북한문화재 전시권 제공을 한다. 당시 예상투자 규모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비로 총 5억 원을 책정했다.

이처럼 북녘 사찰복원의 첫 길목에서 일종의 비망록, 계획표 또는 무언가 앞으로 할 일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가리키는 아젠다의 의미로 볼 때, 당시의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매우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교류 방안이었다. 그때까지 꿈 한번 제대로 꾸지 않던 불교종단에서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이 가시화될 무렵, 종단 기관지를 통해 부정과 비난의 화살을 쏟아냈다. 그 후, 남측 통일부와 대기업에서도 작은 불교단체의 일로만 무시하고 말았다.

# 다음 편은 ‘1998년 윤이상을 모시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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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시 만세교 폭파 장면(1950.12.19.) 사진=나무위키 백과(Flicker)》 검색.

1970년대 말부터 복구되기 시작한 북녘사찰들은 남북불교 교류가 시작된 지 7년 만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필자는 그 당시 북측과 협의 단계에 머물렀으므로 제안서와 같은 뜻으로 ‘사찰복원사업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였다. 남북불교 교류의 새로운 화두가 된 사찰복원 논의가 시작된 배경과 그 추이를 다시 살펴본다.

북녘 사찰복원의 아젠다

누구나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으로, 북녘의 사찰복원 사업이 그중 하나였다. 그것은 북측 최고지도자의 의중까지 반영하는 중대 사업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악화일로일 때, 불교 교류에 있어 새로운 아젠다(Agenda)로 제시된 분야는 사찰복원사업이었다.

그 당시 또는 지금에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북녘 사찰복원은 1988년 초부터 이래저래 회의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사라진 금강산의 유명 사찰이 주요 대상이었다. 북한 당국에 의해 1978년 하반기에 묘향산 보현사 만세루가 제대로 복구되면서 이곳을 방문했던 주요 인사들에 의해 회자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시작은 1992년 홍콩에서 설립한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에 의해서다. 통일교 측과 박경윤 회장, 북한이 공동 주주로 세운 북측 법인의 금강산국제그룹 박 회장은 1991년 4월 일본 나고야(名古屋)와 평양을 잇는 전세기의 직항로 개설로 재일교포 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의 주석공관에서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설립자와의 약 3시간 오찬 회담을 성사시켜 국제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때 동행한 박 회장은 이 그룹 계열사에 속한 금강산국제무역개발・금강산국제관광・금강산개발・평양 양각도국제호텔・주일고려무역 등의 사장과 고려상업은행 총재 등을 겸직하기도 했다.

1935년 충북 청주 출생인 박경윤(朴敬允) 회장은 재일교포이면서 재미교포 여성으로 금강산관광 개발의 ‘원조’라고 불린다. 현재, 중국 베이징시에 거주하고 있는 박 회장은 200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와 ‘신의주밸리 계획(가칭)’으로 협의한 내용이 <전자신문>에 실린 바 있으나, 남북 직교류가 빈번했던 2000년대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다시 교류가 중단된 2013년 10월 초, 베이징에서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하고, “북한 서해에 채굴 가능한 원유 12억 배럴 있다.”라는 <동아일보> 기사에도 등장했다. 이후 그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1989년부터 국외 인사들의 테이블 메뉴로 등장한 북녘 사찰복원에 대한 논의사항은 1997년 7월 13일~15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신법타 평불협 회장에게 처음 소개되었다. 1996년부터 이슈화된 식량지원 방안을 모색하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약칭 아태・평화위원회) 베이징 대표부가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을 신법타 평불협 회장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 통일전선부 산하 단체로 1994년 5월 설치된 아태·평화위원회와 대외 관계를 맺고 있던 재일교포 박경윤 회장을 민간교류 차원에서 남측 인사에게 연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 등 미수교국가와 민간교류를 주목적으로 하는 아태·평화위원회는 북측이 1997년 내각(정무원) 개편으로 외자 유치를 담당하던 대외경제협력위원회가 해체되고 그 업무를 인수하였다. 이에 외국 및 남측의 대북 경협사업 파트너도 1961년 5월 13일에 설치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약칭 조평통)에서 아태·평화위원회로 변경됐다. 그때 북녘의 사찰복원 사항도 아태·평화위원회와 남측과 연계하는 데 금강산국제그룹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교류 창구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찰복원사업에 관한 문서에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국제그룹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8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처음 추진된 남북교류 분야에 있어 협의 사항으로 등장한 사찰복원 아젠다는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와 이를 코디네이터를 한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 여기에 신법타 평불협 회장이 참여하였으나, 북녘 사찰복원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설정된 첫 로드맵(roadmap)은 미완의 구상에 머물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03년도에는 또 다른 계획 주체들에 의해 추진, 발전됐다.

금강산 신계사 터와 팻말(1989년 7월) 금강산 신계사지. 사진=신법타 평불협 회장 촬영.
금강산 신계사 터와 팻말(1989년 7월) 금강산 신계사지. 사진=신법타 평불협 회장 촬영.

북녘 사찰복원의 로드맵

1994년 5월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가 설치되기 전까지 평양으로 가는 길은 홍콩의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박 회장은 “금강산개발을 위해 1992년에 북측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홍콩의 세계적인 개발조사 전문회사에 용역을 맡겨 금강산개발에 대한 계획서와 타당성 조사보고서를 1994년 1월 초에 완성한 다음, 세계평화연합 박보희 회장과 평양으로 들어가 그해 1월 27일 자로 ‘금강산관광개발타당성조사’에 대해 김일성 주석의 친필 서명까지 받았으며, 금강산국제그룹은 정무원(내각)으로부터 50년 동안 금강산 관광개발 예정지 안에 있는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냈다.”라고 최재영 목사가 쓴 《현대종교》(2019)에 전한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타계하면서 금강산 사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1998년 6월에는 갑자기 금강산개발사업이 현대 측으로 옮겨졌다. 현대그룹의 참여와 개발계획조차 없던 1994년도에 금강산국제그룹은 금강산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오염되지 않은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취지로, 10년에 걸친 단계적인 플랜을 세웠다. 초기 단계에서 연간 50만 명, 최종 완료 시점에는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목표로 계획을 수립했다. 초기에는 금강산 지역을 개발하고, 후속 단계에서 강원도 원산 방향의 해안지대를 따라 북쪽으로 지경을 넓혀가기로 한 것이다. 초기 계획에서 금강산의 사찰복원이 집중적으로 거론한 것은 초기 방문객의 홍보와 시설 유입적 측면이 고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금강산개발에서 사찰복원을 주요 아젠다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남측이나 미국 등에서 유입된 종교들을 통해 자칫 인민들이 잘못된 사대주의에 물들거나 그동안 지켜왔던 반일반미 정신과 반제정신이 쇠퇴해지는 것을 경계한 북조선에서 종교 참여를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점을 설득한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이 1998년 3월 14일 남측 조국통일평화불교협회(평불협)와 함께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참사 황철)를 참여시켜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하게 됐다.

이 합의서에는 금강산에 소재한 전통사찰 문화재 중 신계사를 우선 복원하며, 복원과 관련된 비용과 기술은 평불협이 제공한다. 남북 정부가 금강산 탐방을 허용할 경우, 불교도를 대상으로 금강산 성지순례를 한다. 1998년도 상반기 중에 금강산 현지답사를 할 수 있도록 제반 절차상의 편의를 제공한다 등 5개 항목으로 구성하였으며,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평불협이 별도의 단체 구성을 인정하고 사업의 계속성을 보장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평불협은 1998년 6월 18일 오후 5시 한국불교종단협의회(종단협) 강당에서 ‘금강산문화유적복원 추진위원회’를 창립하고, 신법타 평불협 회장·성초 대한불교진각종 통리원장·김동현 박사가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9월 말, ‘금강산 신계사 복원추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조선으로부터 금강산개발을 위임받은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 강순이 각기 서명한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에 관한 협약서’가 체결됐다. 이때 평불협은 평양 백두산건축연구원에서 제작한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 복원설계도면’ 두 점을 전달받았다.

금강산문화유적복원추진위원회 창립식(1998.6.18. 종단협 강당). 사진= 《평불협 15년사》(2007년).
금강산문화유적복원추진위원회 창립식(1998.6.18. 종단협 강당). 사진= 《평불협 15년사》(2007년).

이 협약서에는 전문을 비롯하여 제1조 사찰복원의 순서, 제2조 사업의 당사자와 당사자의 의무, 제3조 재원조달과 기술협력, 제4조 복원사업의 중요과제 수행, 제5조 정부승인 및 사업추진일정, 제6조 평불협의 금강산관광 참여 등 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추진 방식에는 남측이 신계사 복원 고건축 기술자문 및 기술제공과 관련비용 부담을, 북측이 복원 원자재와 기술 및 노무인력과 남한 내 북한문화재 전시권 제공을 한다. 당시 예상투자 규모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비로 총 5억 원을 책정했다.

이처럼 북녘 사찰복원의 첫 길목에서 일종의 비망록, 계획표 또는 무언가 앞으로 할 일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가리키는 아젠다의 의미로 볼 때, 당시의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매우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교류 방안이었다. 그때까지 꿈 한번 제대로 꾸지 않던 불교종단에서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이 가시화될 무렵, 종단 기관지를 통해 부정과 비난의 화살을 쏟아냈다. 그 후, 남측 통일부와 대기업에서도 작은 불교단체의 일로만 무시하고 말았다.

# 다음 편은 ‘1998년 윤이상을 모시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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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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