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29.아버지 초상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29.아버지 초상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1.09.27 2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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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막걸리 한잔에
기분이 좋아 지게를 짊어 진 어깨가 흔들린다


아버지가 상여 위에서 막걸리 한잔에
가슴이 아파 손에 쥔 요령을 흔들다 어깨가 흔들린다


아버지 머리가 빈 벌집같이 구멍 숭숭 뚫려
나도 엄마도 동생도 지나간 추억도 기억 못 하고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얼굴로 묻는다
누구세요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며 세상 소식도 닫고 마음도 닫고
당신 세상에서 홀로 놀고 있다
밤늦은 시간 온 동네 사람들 손전등 들고
애타게 찾아 나선 줄도 모르고 동네 방송도 듣지 못한 채
 

아버지가 걸어간 철길 위 걷는 아들
비어버린 아버지 자리가 쓰려 할 말을 잃고
녹슨 선로위에 눈물만 떨구고 섰다.


#작가의 변
다짜고짜 재민 카드에 싸인 했느냐 물어 본다. 무슨 카드인지, 어떤 일이 있어 쓰는지는 말도 안 해 주고...
말 같지 않은 말엔 나도 말하기 싫어 대답도 안했다.
매니저와 파트 타임 슈퍼바이저 그리고 네팔출신 쿡 핼퍼가 같이 가는 듯 했다.
그들이 퇴근하고 필리핀계 동료에게 물었다. 슈퍼바이저한테 무슨 일이 있냐고.
아버지상이래. 아버지가 여기 캐나다에 같이 살았어. 아니 인도에서 돌아 가셨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지만 집에 가면 뭘 하나. 곡하는 것도 아닌데. 인도 사람들도 한국 사람처럼 모이면 고스톱 하려나.

문득 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가 생각났다. 다니던 기내식 회사가 9.11의 여파로 직원들을 대량해고 할 때 정리해고 당했다. 그리고 한아름 코퀴틀람 지점으로 출근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월요일 출발, 상이 났다고 연락이 온 것은 토요일, 애들 엄마가 많이 아픈 상황이었다. 애들 엄마는 애들도 챙겨야 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 아픈 옆지기를 두고 한국행을 해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당장 돈이 없으니 비행기 표를 카드로 사고 현금도 정말 손에 든 것 없이 슬픈 마음만 안고 고국을 향했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이미 장례는 끝난 상황이었는데 삼베로 된 건과 상복, 상주 지팡이를 짚고 나니 그제야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상주가 이러면 안 된다고, 어머니도 계시니 손님도 접대하고 슬픔을 삭이라고 했다.
치매로 제천에서 청주 오근정역까지 열차를 타고 가서 열차에 치여 객사하신 아버지.
시신은 처참해서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오근장 역사에서 좀 떨어진 커브로 된 철길을 걷다가 기차가 뒤에서 치고 밀었다고 오근정 역 관계자가 말하면서 보통은 철로에서 사망하게 되면 벌금이 나오는데 같은 철도가족이기도 하고 하여 벌금은 안 내도 된다면서 직원들이 성의를 모았다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그런데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큰아들이 장례비용에 대해 말이 없자 엄마는 장례비용을 좀 가지고 온 줄 알았는데 빈손으로 왔다니까 화를 내셨다. 화를 내시는 엄마를 보면 큰아들이 외국 가서 잘 산다고 자랑하셨을 텐데 남의 이목이 눈치 보이시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이해가 되면서도 오죽했으면 빈손으로 왔을까하는 생각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결국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니 내 사업이라고 벌려 놓고 형편은 더 안 좋아져서 가지 못했다. 물론 이번에도 빈손으로 갈 용기도 없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큰처남 상, 장모님 상, 작은 처남 상엔 애들 엄마만 다녀왔다. 사위로써 노릇을 못한 것이다. 어릴 때, 장례 치를 때 사위는 상여가 집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개울을 건널 때마다 돈 봉투를 상여 앞에 놓던 것이 생각난다. 이민 와서 슬픔은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상이 났을 때도 못 갔으니 결혼식엔 당연히 가보지 못했다. 대소사에 참여 하질 못하니 잊진 가족이 된 것이다. 그리움만 남은 가족은 거리만큼 시간만큼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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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막걸리 한잔에
기분이 좋아 지게를 짊어 진 어깨가 흔들린다

아버지가 상여 위에서 막걸리 한잔에
가슴이 아파 손에 쥔 요령을 흔들다 어깨가 흔들린다

아버지 머리가 빈 벌집같이 구멍 숭숭 뚫려
나도 엄마도 동생도 지나간 추억도 기억 못 하고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얼굴로 묻는다
누구세요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며 세상 소식도 닫고 마음도 닫고
당신 세상에서 홀로 놀고 있다
밤늦은 시간 온 동네 사람들 손전등 들고
애타게 찾아 나선 줄도 모르고 동네 방송도 듣지 못한 채
 

아버지가 걸어간 철길 위 걷는 아들
비어버린 아버지 자리가 쓰려 할 말을 잃고
녹슨 선로위에 눈물만 떨구고 섰다.

#작가의 변
다짜고짜 재민 카드에 싸인 했느냐 물어 본다. 무슨 카드인지, 어떤 일이 있어 쓰는지는 말도 안 해 주고...
말 같지 않은 말엔 나도 말하기 싫어 대답도 안했다.
매니저와 파트 타임 슈퍼바이저 그리고 네팔출신 쿡 핼퍼가 같이 가는 듯 했다.
그들이 퇴근하고 필리핀계 동료에게 물었다. 슈퍼바이저한테 무슨 일이 있냐고.
아버지상이래. 아버지가 여기 캐나다에 같이 살았어. 아니 인도에서 돌아 가셨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지만 집에 가면 뭘 하나. 곡하는 것도 아닌데. 인도 사람들도 한국 사람처럼 모이면 고스톱 하려나.

문득 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가 생각났다. 다니던 기내식 회사가 9.11의 여파로 직원들을 대량해고 할 때 정리해고 당했다. 그리고 한아름 코퀴틀람 지점으로 출근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월요일 출발, 상이 났다고 연락이 온 것은 토요일, 애들 엄마가 많이 아픈 상황이었다. 애들 엄마는 애들도 챙겨야 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 아픈 옆지기를 두고 한국행을 해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당장 돈이 없으니 비행기 표를 카드로 사고 현금도 정말 손에 든 것 없이 슬픈 마음만 안고 고국을 향했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이미 장례는 끝난 상황이었는데 삼베로 된 건과 상복, 상주 지팡이를 짚고 나니 그제야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상주가 이러면 안 된다고, 어머니도 계시니 손님도 접대하고 슬픔을 삭이라고 했다.
치매로 제천에서 청주 오근정역까지 열차를 타고 가서 열차에 치여 객사하신 아버지.
시신은 처참해서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오근장 역사에서 좀 떨어진 커브로 된 철길을 걷다가 기차가 뒤에서 치고 밀었다고 오근정 역 관계자가 말하면서 보통은 철로에서 사망하게 되면 벌금이 나오는데 같은 철도가족이기도 하고 하여 벌금은 안 내도 된다면서 직원들이 성의를 모았다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그런데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큰아들이 장례비용에 대해 말이 없자 엄마는 장례비용을 좀 가지고 온 줄 알았는데 빈손으로 왔다니까 화를 내셨다. 화를 내시는 엄마를 보면 큰아들이 외국 가서 잘 산다고 자랑하셨을 텐데 남의 이목이 눈치 보이시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이해가 되면서도 오죽했으면 빈손으로 왔을까하는 생각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결국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니 내 사업이라고 벌려 놓고 형편은 더 안 좋아져서 가지 못했다. 물론 이번에도 빈손으로 갈 용기도 없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큰처남 상, 장모님 상, 작은 처남 상엔 애들 엄마만 다녀왔다. 사위로써 노릇을 못한 것이다. 어릴 때, 장례 치를 때 사위는 상여가 집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개울을 건널 때마다 돈 봉투를 상여 앞에 놓던 것이 생각난다. 이민 와서 슬픔은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상이 났을 때도 못 갔으니 결혼식엔 당연히 가보지 못했다. 대소사에 참여 하질 못하니 잊진 가족이 된 것이다. 그리움만 남은 가족은 거리만큼 시간만큼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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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막걸리 한잔에
기분이 좋아 지게를 짊어 진 어깨가 흔들린다


아버지가 상여 위에서 막걸리 한잔에
가슴이 아파 손에 쥔 요령을 흔들다 어깨가 흔들린다


아버지 머리가 빈 벌집같이 구멍 숭숭 뚫려
나도 엄마도 동생도 지나간 추억도 기억 못 하고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얼굴로 묻는다
누구세요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며 세상 소식도 닫고 마음도 닫고
당신 세상에서 홀로 놀고 있다
밤늦은 시간 온 동네 사람들 손전등 들고
애타게 찾아 나선 줄도 모르고 동네 방송도 듣지 못한 채
 

아버지가 걸어간 철길 위 걷는 아들
비어버린 아버지 자리가 쓰려 할 말을 잃고
녹슨 선로위에 눈물만 떨구고 섰다.


#작가의 변
다짜고짜 재민 카드에 싸인 했느냐 물어 본다. 무슨 카드인지, 어떤 일이 있어 쓰는지는 말도 안 해 주고...
말 같지 않은 말엔 나도 말하기 싫어 대답도 안했다.
매니저와 파트 타임 슈퍼바이저 그리고 네팔출신 쿡 핼퍼가 같이 가는 듯 했다.
그들이 퇴근하고 필리핀계 동료에게 물었다. 슈퍼바이저한테 무슨 일이 있냐고.
아버지상이래. 아버지가 여기 캐나다에 같이 살았어. 아니 인도에서 돌아 가셨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지만 집에 가면 뭘 하나. 곡하는 것도 아닌데. 인도 사람들도 한국 사람처럼 모이면 고스톱 하려나.

문득 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가 생각났다. 다니던 기내식 회사가 9.11의 여파로 직원들을 대량해고 할 때 정리해고 당했다. 그리고 한아름 코퀴틀람 지점으로 출근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알아보니 월요일 출발, 상이 났다고 연락이 온 것은 토요일, 애들 엄마가 많이 아픈 상황이었다. 애들 엄마는 애들도 챙겨야 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 아픈 옆지기를 두고 한국행을 해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당장 돈이 없으니 비행기 표를 카드로 사고 현금도 정말 손에 든 것 없이 슬픈 마음만 안고 고국을 향했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이미 장례는 끝난 상황이었는데 삼베로 된 건과 상복, 상주 지팡이를 짚고 나니 그제야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상주가 이러면 안 된다고, 어머니도 계시니 손님도 접대하고 슬픔을 삭이라고 했다.
치매로 제천에서 청주 오근정역까지 열차를 타고 가서 열차에 치여 객사하신 아버지.
시신은 처참해서 눈뜨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오근장 역사에서 좀 떨어진 커브로 된 철길을 걷다가 기차가 뒤에서 치고 밀었다고 오근정 역 관계자가 말하면서 보통은 철로에서 사망하게 되면 벌금이 나오는데 같은 철도가족이기도 하고 하여 벌금은 안 내도 된다면서 직원들이 성의를 모았다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그런데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큰아들이 장례비용에 대해 말이 없자 엄마는 장례비용을 좀 가지고 온 줄 알았는데 빈손으로 왔다니까 화를 내셨다. 화를 내시는 엄마를 보면 큰아들이 외국 가서 잘 산다고 자랑하셨을 텐데 남의 이목이 눈치 보이시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이해가 되면서도 오죽했으면 빈손으로 왔을까하는 생각을 못하시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결국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 가시고니 내 사업이라고 벌려 놓고 형편은 더 안 좋아져서 가지 못했다. 물론 이번에도 빈손으로 갈 용기도 없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큰처남 상, 장모님 상, 작은 처남 상엔 애들 엄마만 다녀왔다. 사위로써 노릇을 못한 것이다. 어릴 때, 장례 치를 때 사위는 상여가 집에서 출발할 때 그리고 개울을 건널 때마다 돈 봉투를 상여 앞에 놓던 것이 생각난다. 이민 와서 슬픔은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상이 났을 때도 못 갔으니 결혼식엔 당연히 가보지 못했다. 대소사에 참여 하질 못하니 잊진 가족이 된 것이다. 그리움만 남은 가족은 거리만큼 시간만큼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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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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