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2. 1998년 북녘길이 열리다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2. 1998년 북녘길이 열리다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10.0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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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관광, 처음 시작하다”

해방의 열기로 가득 찼던 한반도에 “나는 펼쳐지고 있는 위대한 극적인 사변에서 귀국이 놀게 될 결정적인 역할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였습니다.”라고 트루먼 미정부의 국무성 대외정책 고문이던 존 포스터 덜레스(Dulles)가 1950년 6월 20일 자로 이승만 정권의 외무부장관 임병직에게 타전한 편지글과 같이 분단의 씨앗은 이미 그들에 의해서 뿌려졌다.

그로부터 5일 후 경인동란(6.25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7월 27일 22시 휴전협정에 따라 국토를 가로지른 군사분계선(북측에서는 분리선)이 생겨나기 전까지 남북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서로 다녔다. 1992년 10월 남측의 남포조사단 방북을 허용한 후, 다시 열린 적이 없던 판문점 길은 남북의 왕래에 ‘좁은 문’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해졌다.

그로부터 45년 만에 북녘으로 오가는 길이 처음 열렸다. 육로가 아닌 해상로인 뱃길이었다.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 유람선 금강호가 강원도 동해항에서 출항하면서 시작됐다. 2003년 9월 육로관광과 2006년 6월 내금강 관광 등으로 관광코스가 넓혀지면서 2006년에는 관광객이 35만 명에 달했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관광 중단 전까지의 누적 관광객은 196만 명에 달했다.

동녘에서 시작한 왕래는 서쪽 편에서 불어온 하늬바람(西風)이 일으킨 희소식이었다.

그 시작은 당시 한국・소련 경제협회장이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의해서다.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 초청으로 평양에 들어가 1989년 1월 31일 ‘금강산공동개발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10년 만에 그 빛을 보았다. 1994년에 설치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약칭 아태・평화위원회)를 포괄하는 경제협력 부문으로 시작한 정주영 회장의 금강산개발사업은 1992년과 97년도 대권의 꿈과 맞바꾼 셈이다. 1998년 6월 판문점 ‘1,001마리 소떼 방북’이 그것이었다. 정 회장은 평소 “무서울 게 하나 없지만, 전쟁만큼은 무섭다. 똑똑하고 훌륭한 우리 백성이 서로 싸우면서 죽어서야 되겠냐.”’고 자주 얘기했다며, 그때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결국 북한하고, 모든 걸 풀어야 한다. 적개심을 없애고, 북한의 1,000만 노동자를 활용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소떼 방북 프로젝트는 판문점을 남북대결의 현장이 아닌 ‘화해의 장’으로 열었다. 미국 CNN 등은 ‘소떼 방북’을 생중계했고,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 표현했다. 다섯 달 뒤부터 시작된 북녘 길 위에 선 불교계와 민간교류의 그때 모습을 다시 본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행사(1999.6.16. 판문점), 사진=《매일경제신문》 (2019.10.24.)



금강산관광의 비하인드스토리

그간 금강산 사업에 관해서는 박경윤 금강산 국제그룹이 1988년부터 추진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1998년 2월 14일 정몽헌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과 금강산 사업에 관해 처음 협의하면서 재개됐다. 같은 해 6월 22일 평양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은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과 금강산 개발 ‘의정서’와 ‘합의서’를 체결함에 따라 금강산관광 사업이 급물살을 탔다.

이때 뒷이야기로는 10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금강산 개발사업에 대해 정주영 명예회장이 “(민족의) 평화를 위해 다시 해보자며 아들인 고 정몽헌 회장과 내게 지시하면서 소떼 방북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한국일보》(2015년) 증언이다. 또 그는 “금강산 개발 관련해 사전 협의가 이뤄져 북한과 계약하는 날짜까지 잡혔는데, 정 회장이 육로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당시엔 비행기로 베이징을 거쳐 들어갔고, 육로 방북은 유엔군과 북한 군부의 동의가 필요했다.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이 군부를 설득할 명분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당시 서산에 키우던 소를 몰고 가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1년에 1,000마리씩 키워 북한에 보내는데, 소를 하늘로 보낼 수 없으니 걸어서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 결국, 정주영 회장의 진정성이 (북측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판문점에서 화해 분위기로의 전환은 1998년 6월 16일 오전 9시 6분부터 정주영 명예회장이 충남 서산목장에서 키운 암소 500마리를 태운 트럭 50대를 이끌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땅을 밟으면 시작됐다. 그해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다시 끌고 판문점을 넘어서 총 1,001마리의 소를 북측에 전달한 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한다.”라는 뜻으로 금강산 사업이 잘 진행됐으면 하는 바램을 담았다. 그것은 한 달 후, 금강산관광 출항이라는 동쪽 줄기와 2003년 6월 개성공단 착공이라는 서쪽 줄기를 뻗어내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 당시 현대그룹은 금강산 개발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남북경협사업단을 발족하고, 단장에 김윤규 현대건설 부사장을 임명했다. 같은 해 7월 5일 북측 실무대표단과는 금강산관광을 위한 계약서와 부속 계약서를 체결하면서 북측의 <금강산관광지구법> 근거에 따라 사업 진행에 필요한 절차가 마무리됐다. 금강산관광 개발사업은 기업 차원의 민간 경제협력사업으로, 남북의 교류나 협력에 관한 사항은 통일부의 허가조건이었다. 그해 9월 말경, 이 사업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현대그룹의 3사인 현대상선・현대건설・금강개발이 통일부 승인을 받고 본격적으로 시작해 현대아산에서 2008년 7월까지 금강산관광 사업을 담당했다.

현대와 아태・평화위원회 측은 “민족대단결의 정신에 민간급에서 각기 특색 있는 호상협력을 하려는 염원에서 우선 우리 민족의 자랑인 금강산에 대한 관광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금강산관광개발추진위원회(가칭)’를 내오고, 여기에 관심 있는 국내외의 모든 개인 또는 단체를 참가시키기로” 합의한 의정서를 채택했다. 본 의정서에는 “양측이 1989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평양방문 시 합의한 의정서에 따라 우선 1단계로 유람선에 의한 금강산조직관광은 준비되는 대로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다른 개인 또는 단체들이 유람선에 의한 금강산조직관광을 희망하는 경우 그들에게도 문을 열어놓기로 하였다.”라고 현대아산의 <금강산개발전략> 문건에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때, 금강산 개발의 주체가 1998년 상반기까지도 현대그룹이라고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측이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을 금강산국제그룹에다 맡겼다. 그와 연동되어 남측 평불협과 금강산국제그룹, 아태・평화위원회 3자는 그해 3월 14일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와 9월 16일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에 관한 협약서’를 중국 베이징에서 두 차례 맺었다. 현대그룹은 그해 10월 29일 베이징에서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 개발과 이용에 대한 독점권 합의서’ 체결을 통해 포괄적 사업을 설정했다.

그 후 통일부는 1999년 1월 16일과 2월 2일 두 차례 공문을 통해 ① 북한당국의 의사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② 금강산 관광지 개발권과 상충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이유로 평불협의 ‘협력사업자 승인유보’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정부가 현대그룹’에 손을 들어준 셈이 됐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같은 해 2월 23일 평양으로 들어간 김고중 현대아산 부사장 등 실무협의단이 아태・평화위원회에 신계사 복원을 새로 제안하면서 북측과는 일단락됐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허담 조평통 위원장 ‘금강산공동개발의정서’ 체결.(1989.1.31. 평양), 사진=《통일시대》 (2019년 2월호)





평불협 중앙회, 금강산 신계사 성지순례법회(1999.1.1.~4.). 사진=《평불협 15년사》(2007년)



20세기 금강산 순례의 효시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관광 첫 회부터 신계사는 경유하지 않았다. 이웃 종교인들이 싫어한다는 게, 현대 측이 관광코스에 반영하지 않은 이유였다. 자연경관 이외에 종교적 요소를 반영하는 것 또한 북측의 제한 사항이었다는 전언이다.

그로부터 약 2개월 후, 1999년 1월 1일 오전 10시 신계사 터에서 가진 평불협 중앙회의 새해맞이 법회는 20세기 마지막, 금강산 신계사 성지순례의 효시이다. 분단 이후, 천년가람 신계사의 텅 빈 절터에 처음 울린 목탁 소리와 반야심경 봉독은 당시 현대상선에 담당하던 금강산관광 유람선 1호 ‘금강호’를 타고 간 21명의 남측 불교도에 의해 장엄됐다. 같은 해 6월 3일에는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 주관으로 8개 불교종단 1,076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의 화합과 나눔을 위한 불교도 금강산 순례단’의 이름으로 신계사 터에서 합동법회와 방생의식 등을 가짐으로써 금강산 성지순례가 본격화됐다. 이 시기, 국내의 통일문화연구소가 1997년~1998년까지 추진한 ‘북한문화유산답사’는 일간신문 지면으로 북녘 하늘 밑의 이야기를 전했다.

육로가 아닌 해상로인 뱃길로 처음 열린 금강산관광은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 44분 강원도 동해항에서 유람선 제1호 금강호 출항으로 시작됐다. 이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실향민 등 관광객 8백89명, 승무원과 관광안내원 4백66명 등 모두 1천3백65명을 실은 2만8천 톤의 대형 유람선 금강호가 북측 장전항으로 출항했다.

분단 반세기 만에 금단의 땅을 향하여 돛을 올린 금강호가 ‘햇볕둥이’란 별칭을 얻었고, 2000년 3월 9일 오후 2시 부산 사하구 다대포항에서 ‘풍악호’(2만t)가 관광객과 승무원 등 960여 명을 태우고 첫 출항했다. 2001년 1월 6일 오후 1시 관광객 435명을 태우고, 강원도 속초항을 첫 출항한 초호화 크루즈선 ‘설봉호’ 등 금강산으로 가는 항로가 늘어났고, 2000년 5월, 금강산 고성항(옛 장전항) 부두가 준공되어 북측 지명도 바뀌었다. 그런데 2003년 9월. 관광버스를 통한 금강산 육로관광이 본격화되면서 그 해문(海門)과 뱃길이 모두 닫혔다.

금강산관광으로 시작됐던 남북 민간교류는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주도의 ‘소떼 방북’이 씨앗 되어 남북 경제협력의 새싹이 자랐다. 2008년 여름날 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불어온 ‘높새바람’이 영서지방의 초목을 마르게 하는 ‘녹새풍’으로 변해서 옛 뱃사람들이 ‘하늬・하람’이라 부르던 서쪽 편의 교류 협력까지 멈추게 하고 말았다. 급기야 2010년 4월, 북측은 금강산 내 체류 인원을 전원 추방하고, 남측 시설과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 다음 편은 ‘1999년 북녘에 새바람 불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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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행사(1999.6.16. 판문점), 사진=《매일경제신문》 (2019.10.24.)

금강산관광의 비하인드스토리

그간 금강산 사업에 관해서는 박경윤 금강산 국제그룹이 1988년부터 추진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1998년 2월 14일 정몽헌 현대그룹 해외담당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과 금강산 사업에 관해 처음 협의하면서 재개됐다. 같은 해 6월 22일 평양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은 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과 금강산 개발 ‘의정서’와 ‘합의서’를 체결함에 따라 금강산관광 사업이 급물살을 탔다.

이때 뒷이야기로는 10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금강산 개발사업에 대해 정주영 명예회장이 “(민족의) 평화를 위해 다시 해보자며 아들인 고 정몽헌 회장과 내게 지시하면서 소떼 방북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한국일보》(2015년) 증언이다. 또 그는 “금강산 개발 관련해 사전 협의가 이뤄져 북한과 계약하는 날짜까지 잡혔는데, 정 회장이 육로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당시엔 비행기로 베이징을 거쳐 들어갔고, 육로 방북은 유엔군과 북한 군부의 동의가 필요했다.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이 군부를 설득할 명분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당시 서산에 키우던 소를 몰고 가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1년에 1,000마리씩 키워 북한에 보내는데, 소를 하늘로 보낼 수 없으니 걸어서 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 결국, 정주영 회장의 진정성이 (북측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판문점에서 화해 분위기로의 전환은 1998년 6월 16일 오전 9시 6분부터 정주영 명예회장이 충남 서산목장에서 키운 암소 500마리를 태운 트럭 50대를 이끌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땅을 밟으면 시작됐다. 그해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다시 끌고 판문점을 넘어서 총 1,001마리의 소를 북측에 전달한 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한다.”라는 뜻으로 금강산 사업이 잘 진행됐으면 하는 바램을 담았다. 그것은 한 달 후, 금강산관광 출항이라는 동쪽 줄기와 2003년 6월 개성공단 착공이라는 서쪽 줄기를 뻗어내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 당시 현대그룹은 금강산 개발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남북경협사업단을 발족하고, 단장에 김윤규 현대건설 부사장을 임명했다. 같은 해 7월 5일 북측 실무대표단과는 금강산관광을 위한 계약서와 부속 계약서를 체결하면서 북측의 <금강산관광지구법> 근거에 따라 사업 진행에 필요한 절차가 마무리됐다. 금강산관광 개발사업은 기업 차원의 민간 경제협력사업으로, 남북의 교류나 협력에 관한 사항은 통일부의 허가조건이었다. 그해 9월 말경, 이 사업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현대그룹의 3사인 현대상선・현대건설・금강개발이 통일부 승인을 받고 본격적으로 시작해 현대아산에서 2008년 7월까지 금강산관광 사업을 담당했다.

현대와 아태・평화위원회 측은 “민족대단결의 정신에 민간급에서 각기 특색 있는 호상협력을 하려는 염원에서 우선 우리 민족의 자랑인 금강산에 대한 관광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금강산관광개발추진위원회(가칭)’를 내오고, 여기에 관심 있는 국내외의 모든 개인 또는 단체를 참가시키기로” 합의한 의정서를 채택했다. 본 의정서에는 “양측이 1989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평양방문 시 합의한 의정서에 따라 우선 1단계로 유람선에 의한 금강산조직관광은 준비되는 대로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다른 개인 또는 단체들이 유람선에 의한 금강산조직관광을 희망하는 경우 그들에게도 문을 열어놓기로 하였다.”라고 현대아산의 <금강산개발전략> 문건에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때, 금강산 개발의 주체가 1998년 상반기까지도 현대그룹이라고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측이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을 금강산국제그룹에다 맡겼다. 그와 연동되어 남측 평불협과 금강산국제그룹, 아태・평화위원회 3자는 그해 3월 14일 ‘금강산 문화재 복원을 위한 합의서’와 9월 16일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에 관한 협약서’를 중국 베이징에서 두 차례 맺었다. 현대그룹은 그해 10월 29일 베이징에서 북측의 아태・평화위원회와 ‘금강산 개발과 이용에 대한 독점권 합의서’ 체결을 통해 포괄적 사업을 설정했다.

그 후 통일부는 1999년 1월 16일과 2월 2일 두 차례 공문을 통해 ① 북한당국의 의사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② 금강산 관광지 개발권과 상충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이유로 평불협의 ‘협력사업자 승인유보’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정부가 현대그룹’에 손을 들어준 셈이 됐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사업은 같은 해 2월 23일 평양으로 들어간 김고중 현대아산 부사장 등 실무협의단이 아태・평화위원회에 신계사 복원을 새로 제안하면서 북측과는 일단락됐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허담 조평통 위원장 ‘금강산공동개발의정서’ 체결.(1989.1.31. 평양), 사진=《통일시대》 (2019년 2월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허담 조평통 위원장 ‘금강산공동개발의정서’ 체결.(1989.1.31. 평양), 사진=《통일시대》 (2019년 2월호)
평불협 중앙회, 금강산 신계사 성지순례법회(1999.1.1.~4.). 사진=《평불협 15년사》(2007년)
평불협 중앙회, 금강산 신계사 성지순례법회(1999.1.1.~4.). 사진=《평불협 15년사》(2007년)

20세기 금강산 순례의 효시

1998년 11월 18일 시작한 금강산관광 첫 회부터 신계사는 경유하지 않았다. 이웃 종교인들이 싫어한다는 게, 현대 측이 관광코스에 반영하지 않은 이유였다. 자연경관 이외에 종교적 요소를 반영하는 것 또한 북측의 제한 사항이었다는 전언이다.

그로부터 약 2개월 후, 1999년 1월 1일 오전 10시 신계사 터에서 가진 평불협 중앙회의 새해맞이 법회는 20세기 마지막, 금강산 신계사 성지순례의 효시이다. 분단 이후, 천년가람 신계사의 텅 빈 절터에 처음 울린 목탁 소리와 반야심경 봉독은 당시 현대상선에 담당하던 금강산관광 유람선 1호 ‘금강호’를 타고 간 21명의 남측 불교도에 의해 장엄됐다. 같은 해 6월 3일에는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 주관으로 8개 불교종단 1,076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의 화합과 나눔을 위한 불교도 금강산 순례단’의 이름으로 신계사 터에서 합동법회와 방생의식 등을 가짐으로써 금강산 성지순례가 본격화됐다. 이 시기, 국내의 통일문화연구소가 1997년~1998년까지 추진한 ‘북한문화유산답사’는 일간신문 지면으로 북녘 하늘 밑의 이야기를 전했다.

육로가 아닌 해상로인 뱃길로 처음 열린 금강산관광은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 44분 강원도 동해항에서 유람선 제1호 금강호 출항으로 시작됐다. 이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실향민 등 관광객 8백89명, 승무원과 관광안내원 4백66명 등 모두 1천3백65명을 실은 2만8천 톤의 대형 유람선 금강호가 북측 장전항으로 출항했다.

분단 반세기 만에 금단의 땅을 향하여 돛을 올린 금강호가 ‘햇볕둥이’란 별칭을 얻었고, 2000년 3월 9일 오후 2시 부산 사하구 다대포항에서 ‘풍악호’(2만t)가 관광객과 승무원 등 960여 명을 태우고 첫 출항했다. 2001년 1월 6일 오후 1시 관광객 435명을 태우고, 강원도 속초항을 첫 출항한 초호화 크루즈선 ‘설봉호’ 등 금강산으로 가는 항로가 늘어났고, 2000년 5월, 금강산 고성항(옛 장전항) 부두가 준공되어 북측 지명도 바뀌었다. 그런데 2003년 9월. 관광버스를 통한 금강산 육로관광이 본격화되면서 그 해문(海門)과 뱃길이 모두 닫혔다.

금강산관광으로 시작됐던 남북 민간교류는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주도의 ‘소떼 방북’이 씨앗 되어 남북 경제협력의 새싹이 자랐다. 2008년 여름날 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불어온 ‘높새바람’이 영서지방의 초목을 마르게 하는 ‘녹새풍’으로 변해서 옛 뱃사람들이 ‘하늬・하람’이라 부르던 서쪽 편의 교류 협력까지 멈추게 하고 말았다. 급기야 2010년 4월, 북측은 금강산 내 체류 인원을 전원 추방하고, 남측 시설과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 다음 편은 ‘1999년 북녘에 새바람 불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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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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