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 스님 없었다면 한글 아직까지 쓰이지 못했다"
"신미 스님 없었다면 한글 아직까지 쓰이지 못했다"
  • 조현성 기자
  • 승인 2021.10.08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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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정광 교수 "신미 대사의 모음 11자, '훈민정음'의 화룡점정"
BTN토크멘터리 ‘한글’ - ‘나랏말싸미는 역사왜곡인가?’에 출연해 신미 대사와 한글과의 관계를 설명한 정광 교수 (BTN 유튜브 갈무리)



 

지난해 영화 <나랏말싸미> 개봉 후, 영화 속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작업을 두고 역사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가 "한글은 세종과 왕실가족, 신미대사 협력의 결과물이다. 세종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고 했다.

BTN은 최근 영화 <나랏말싸미> 영화 방영권을 사들인데 이어, 한글 반포 제575돌 한글날을 맞아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와 한글 창제 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정광 명예교수(고려대)는 BTN이 지난달 29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한 '마음을 바꾸는 시간, 고인사이드'에서 한글 창제를 둘러싼 비밀을 이야기했다.

지난 2019년 정 교수는 저서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을 통해 "신미 스님은 실담(중국에 전래한 인도 범자)에 의거해 모음 11자를 추가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보다 앞선 2015년 저서 <한글의 발명>을 통해서는 "한글은 백지상태에서 고안된 문서가 아니라 파스파 문자 등 동아시아 문자와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문자"라고 했다.

다음은 정광 교수의 강연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나

중국어를 쓴 것이 한문이 아니다. 우리말을 한자로 쓰면 '이두'고 일본말을 한자로 쓰면 그건 '망요 카나'가 된다.
비트남 말을 한자로 쓰면 그건 '쯔놈'이 된다. 

중국어는 수쳔년 역사가 있고 나라 지방마다 전부 다르다. 중국어 표준어는 주나라 때는 낙양말(아언)이다가 진나라 때는 장안말(통어)였다. 불교 경전은 '통어'로 번역이 됐다.

원나라 이후에는 북경어가 표준어가 됐다. 우리 '동음'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한어도감'을 만들어 북경어를 배우게 했다. 세종의 어제 서문 첫 구절 "우리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서로 문자가 통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중국의 한자음을 바꾸라고 할 수 없으니) 세종은 우리 한자음을 바꾸려고 했다. <동국정운>(1448년, 세종 30년 반포한 한국 최초 표준음에 관한 책이자 운서)을 만들었다. 

<동국정운>은 실제 우리 발음은 아니지만 운서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한자음이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백성에게 가르쳐야겠다해서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글자나 문자가 아니고,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한자였다. 그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수양대군, 문종 동공, 안평대군 등 가족과 함께 만들었다. 세종에게는 둘째 딸 정의공주가 있었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어와 달리 교착어여서 중국어로 된 한문을 읽으려면 밑에 '구결'이라는 토시를 달아야했다. 중국어는 어미나 조사가 필요없는 의미만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구결을 달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구결을 달 때 한자로 달았는데 (말을 바꿔서 토를 다는) '변음토착'을 했다.

정의공주가 '훈민정음'으로 토를 달았다. 세종이 이것을 보고 "우리말도 '훈민정음'으로 적을 수 있지 않을까, 파스타 문자처럼 우리말로 적어보자" 했다. 그래서 <증수석가보>를 쓴 신미 대사와 김수원을 불러다가 수양대군 등과 <증수석가보>를 우리 말로 언해해 만든 것이 <석보상절>이다. <석보상절>이 우리말로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문언이다.

이것을 보고 세종이 "나도 써보자" 해서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모니의 공적을 노래하는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이어 <월인석보>를 만들어 언해본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훈민정음'의 제정 방식이다.
 



영화 '나랏말싸미' 상영 후,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참여한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BTN 유튜브 갈무리)



 


▷한글은 세종이 단독으로 만든 것인가 

세종은 가족 중심으로 처음에 신문자를 제정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남방의 '오아'라는 고립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교착어를 사용하는 소위 알타이족이라고 부르는 북방 민족이 서로 대결해 왔다.

남방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 '황제'이고 한자를 만들었다. 북방 대표는 도깨비 같은 '치우'이다. 북방민족은 언어가 중국어와 달라 '한자' 쓰기를 꺼리고 새 문자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남방은 이를 한자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새 문자를 만든다면 이는 명나라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가족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어 집현전 젊은 유신을 참가시키고 최종적으로 불가의 학승이 참여해 '훈민정음'을 완성했다. 신미 스님 참여는 '훈민정음' 창제의 화룡점정이었다.

원나라 때 중국인에게는 파스파문자로 몽골을 배우게 하고, 몽골인들에게는 파스파 문자로 한자 발음을 적어 한자를 배우게 했다. 이것이 고려에 전달돼서 고려인도 파스퍼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 세종에 이르러서도 파스파 문자는 한자의 발음을 읽어주는 중요한 발음기호였다.

세종이 가족들과 한글을 만들 때 가장 준거로 삼았던 것이 파스파 문자였다. 신문자를 두고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있자, 세종은 성리학 성운학, 그리고 '성명기론'에 정통했던 신미 스님을 모셔다가 해례본을 지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의 답변이었다.

최만리가 "그래봤자 새로운 기술, 하나의 재주에 불과하지 않느냐. 뭐가 대단하다고 밤을 세워가면서 그걸 하느냐"고 한 것 관련해, 세종은 해례본을 통해서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글자가 아니고 어려운 이론들이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은 최만리 등 사대주의자를 잠재우려 해례본에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 유학자들 이름을 넣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이름만 올렸을 뿐 실제 해례본은 신미대사와 김수온이 작성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해례본에는 불교 경전의 한문뿐 아니라 어려운 성명기론의 이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학자들이 알 수 없는 불가의 것이다.

신미 스님이 어떻게 세종을 도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수온의 <식우집>에 신미 대사와 세종대왕이 어떻게 만났는가가 나온다. 

최만리 반대 상소가 있자 세종은 신문자 제정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 문제가 있구나 생각 했다. 출가한 효령대군이 "신미라는 스님이 있는데 그 사람을 불러서 한번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고, 세종은 수양대군을 복천사(현재 복천암)로 내려보내 신미 대사를 모셨다.

세종을 만난 신미 대사는 불가의 비가라론 즉 '성명기론' 등 불경 관련 음성학적 지식을 이야기했다. 세종은 신미 대사를 궁으로 모셨고, (경복궁 내 문소전 옆에) 내불당을 만들어 거기에 상주케 하면서 '훈민정음' 제정을 전면적으로 돕게했다.

다른 문집에 세종에 내불당 만는 것에 반대하는 말들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지만 세종 때에 이미 궁궐 안에 내불당이 있었고 거기에 신미 스님이 있었다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신미 대사는 내불당에 불려와서는 세종과 가족들이 만든 '훈민정음'을 고쳤다. 세종이 가족들과 만든 것은 자음만 27자(언문 27자)였다. 모음자는 7자였다. 신미는 모음을 11자로 해서 자음 17자, 모음 11자 '훈민정음'을 완성시켰다.

산스크리트 문자인 '범자' '시따 문자' 등은 자음과 모음으로 돼 있다. 모음은 '마타르'라는데 이 마타르는 산스크리트로 '어머니'이다. 여기서 '모음'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와 비해서 오랫동안 생명을 갖고 우리말 표기에 이용되는 것은 신미 스님이 이 모음이라는 '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중심으로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를 보면 "훈민정음은 범자의 모방"이라고 했다. <용재총화>에는 '훈민정음' 중성이 실담과 같은 12자였다.

만약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우리글 모음이 (세종과 가족이 처음 만든) 7자에 불과했을 것이고 그 표기 능력은 현저하게 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파스파 문자처럼 한 때 사용되다가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미 스님은 우리 한글 제정에 있어서 공헌이 크다.



혜각존자 신미 대사(1403~1480)_ 복천암 홈페이지
BTN토크멘터리 ‘한글’ - ‘나랏말싸미는 역사왜곡인가?’에 출연해 신미 대사와 한글과의 관계를 설명한 정광 교수 (BTN 유튜브 갈무리)

 

지난해 영화 <나랏말싸미> 개봉 후, 영화 속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작업을 두고 역사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가 "한글은 세종과 왕실가족, 신미대사 협력의 결과물이다. 세종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고 했다.

BTN은 최근 영화 <나랏말싸미> 영화 방영권을 사들인데 이어, 한글 반포 제575돌 한글날을 맞아 다양한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불교와 한글 창제 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정광 명예교수(고려대)는 BTN이 지난달 29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한 '마음을 바꾸는 시간, 고인사이드'에서 한글 창제를 둘러싼 비밀을 이야기했다.

지난 2019년 정 교수는 저서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을 통해 "신미 스님은 실담(중국에 전래한 인도 범자)에 의거해 모음 11자를 추가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보다 앞선 2015년 저서 <한글의 발명>을 통해서는 "한글은 백지상태에서 고안된 문서가 아니라 파스파 문자 등 동아시아 문자와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문자"라고 했다.

다음은 정광 교수의 강연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나

중국어를 쓴 것이 한문이 아니다. 우리말을 한자로 쓰면 '이두'고 일본말을 한자로 쓰면 그건 '망요 카나'가 된다.
비트남 말을 한자로 쓰면 그건 '쯔놈'이 된다. 

중국어는 수쳔년 역사가 있고 나라 지방마다 전부 다르다. 중국어 표준어는 주나라 때는 낙양말(아언)이다가 진나라 때는 장안말(통어)였다. 불교 경전은 '통어'로 번역이 됐다.

원나라 이후에는 북경어가 표준어가 됐다. 우리 '동음'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한어도감'을 만들어 북경어를 배우게 했다. 세종의 어제 서문 첫 구절 "우리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서로 문자가 통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중국의 한자음을 바꾸라고 할 수 없으니) 세종은 우리 한자음을 바꾸려고 했다. <동국정운>(1448년, 세종 30년 반포한 한국 최초 표준음에 관한 책이자 운서)을 만들었다. 

<동국정운>은 실제 우리 발음은 아니지만 운서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한자음이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백성에게 가르쳐야겠다해서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글자나 문자가 아니고,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한자였다. 그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수양대군, 문종 동공, 안평대군 등 가족과 함께 만들었다. 세종에게는 둘째 딸 정의공주가 있었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어와 달리 교착어여서 중국어로 된 한문을 읽으려면 밑에 '구결'이라는 토시를 달아야했다. 중국어는 어미나 조사가 필요없는 의미만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구결을 달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구결을 달 때 한자로 달았는데 (말을 바꿔서 토를 다는) '변음토착'을 했다.

정의공주가 '훈민정음'으로 토를 달았다. 세종이 이것을 보고 "우리말도 '훈민정음'으로 적을 수 있지 않을까, 파스타 문자처럼 우리말로 적어보자" 했다. 그래서 <증수석가보>를 쓴 신미 대사와 김수원을 불러다가 수양대군 등과 <증수석가보>를 우리 말로 언해해 만든 것이 <석보상절>이다. <석보상절>이 우리말로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문언이다.

이것을 보고 세종이 "나도 써보자" 해서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모니의 공적을 노래하는 <월인천강지곡>을 짓고, 이어 <월인석보>를 만들어 언해본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훈민정음'의 제정 방식이다.
 

영화 '나랏말싸미' 상영 후,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참여한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BTN 유튜브 갈무리)
영화 '나랏말싸미' 상영 후,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참여한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BTN 유튜브 갈무리)

 

▷한글은 세종이 단독으로 만든 것인가 

세종은 가족 중심으로 처음에 신문자를 제정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남방의 '오아'라는 고립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교착어를 사용하는 소위 알타이족이라고 부르는 북방 민족이 서로 대결해 왔다.

남방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 '황제'이고 한자를 만들었다. 북방 대표는 도깨비 같은 '치우'이다. 북방민족은 언어가 중국어와 달라 '한자' 쓰기를 꺼리고 새 문자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남방은 이를 한자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새 문자를 만든다면 이는 명나라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가족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어 집현전 젊은 유신을 참가시키고 최종적으로 불가의 학승이 참여해 '훈민정음'을 완성했다. 신미 스님 참여는 '훈민정음' 창제의 화룡점정이었다.

원나라 때 중국인에게는 파스파문자로 몽골을 배우게 하고, 몽골인들에게는 파스파 문자로 한자 발음을 적어 한자를 배우게 했다. 이것이 고려에 전달돼서 고려인도 파스퍼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 세종에 이르러서도 파스파 문자는 한자의 발음을 읽어주는 중요한 발음기호였다.

세종이 가족들과 한글을 만들 때 가장 준거로 삼았던 것이 파스파 문자였다. 신문자를 두고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있자, 세종은 성리학 성운학, 그리고 '성명기론'에 정통했던 신미 스님을 모셔다가 해례본을 지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의 답변이었다.

최만리가 "그래봤자 새로운 기술, 하나의 재주에 불과하지 않느냐. 뭐가 대단하다고 밤을 세워가면서 그걸 하느냐"고 한 것 관련해, 세종은 해례본을 통해서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글자가 아니고 어려운 이론들이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은 최만리 등 사대주의자를 잠재우려 해례본에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 유학자들 이름을 넣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이름만 올렸을 뿐 실제 해례본은 신미대사와 김수온이 작성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해례본에는 불교 경전의 한문뿐 아니라 어려운 성명기론의 이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학자들이 알 수 없는 불가의 것이다.

신미 스님이 어떻게 세종을 도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수온의 <식우집>에 신미 대사와 세종대왕이 어떻게 만났는가가 나온다. 

최만리 반대 상소가 있자 세종은 신문자 제정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 문제가 있구나 생각 했다. 출가한 효령대군이 "신미라는 스님이 있는데 그 사람을 불러서 한번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고, 세종은 수양대군을 복천사(현재 복천암)로 내려보내 신미 대사를 모셨다.

세종을 만난 신미 대사는 불가의 비가라론 즉 '성명기론' 등 불경 관련 음성학적 지식을 이야기했다. 세종은 신미 대사를 궁으로 모셨고, (경복궁 내 문소전 옆에) 내불당을 만들어 거기에 상주케 하면서 '훈민정음' 제정을 전면적으로 돕게했다.

다른 문집에 세종에 내불당 만는 것에 반대하는 말들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지만 세종 때에 이미 궁궐 안에 내불당이 있었고 거기에 신미 스님이 있었다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신미 대사는 내불당에 불려와서는 세종과 가족들이 만든 '훈민정음'을 고쳤다. 세종이 가족들과 만든 것은 자음만 27자(언문 27자)였다. 모음자는 7자였다. 신미는 모음을 11자로 해서 자음 17자, 모음 11자 '훈민정음'을 완성시켰다.

산스크리트 문자인 '범자' '시따 문자' 등은 자음과 모음으로 돼 있다. 모음은 '마타르'라는데 이 마타르는 산스크리트로 '어머니'이다. 여기서 '모음'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와 비해서 오랫동안 생명을 갖고 우리말 표기에 이용되는 것은 신미 스님이 이 모음이라는 '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중심으로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를 보면 "훈민정음은 범자의 모방"이라고 했다. <용재총화>에는 '훈민정음' 중성이 실담과 같은 12자였다.

만약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우리글 모음이 (세종과 가족이 처음 만든) 7자에 불과했을 것이고 그 표기 능력은 현저하게 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파스파 문자처럼 한 때 사용되다가 없어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미 스님은 우리 한글 제정에 있어서 공헌이 크다.

혜각존자 신미 대사(1403~1480)_ 복천암 홈페이지
혜각존자 신미 대사(1403~1480)_ 복천암 홈페이지

 

▷한글은 과연 독창적인 문자인가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한반도 주변에는 여러 민족이 글자를 만들어서 사용했었다. 나는 그 시작을 고구려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유물들은 아직 발굴이 다 안되고 있지만 간혹 한자와 다른 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발해에도 문자가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자 가운데 티베트의 서장 문자가 있다. 토번 왕국의 송첸캄포가 만든 문자이다. 요나라 거한 문자, 여진 문자, 칭기스칸의 위구르 문자 등이 한글과 연결돼 있다.

해외 언어학계 세미나 등에서 실제로 한글의 우수성 과학성 독창성은 충분히 인정하고 극찬을 한다. 하지만 한글이 어떤 문자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없다.

한 예로 '국제고려학회'라고 유명한 학회가 있다. 국내 한 학자가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없는 글자를 독창적으로 만들었다"고 발표를 한 적이 있다. 국내 발표였다면 박수를 받았겠지만, 거센 반론이 있었다. 

세계 학계는 한글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독창적인 한글을 창제했다"는 신화 속에 살 게 아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세종대왕은 신이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은 성명이론, 성리학, 성운학 등을 깊이 연구하고 관련 학자들을 모으고 스스로 그것을 확인 감독해서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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