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33. 그리운 이 있어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33. 그리운 이 있어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1.10.25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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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바다 너머에 그리운 이 있어
내가 두고 온 시간들
내가 떠나 온 사람들


철썩거리는 바다
문지방 넘는 발소리처럼
겨울 화롯불 끌어안고
창호지 문틈으로 술술
들어오던 바람소리처럼
겨울 무 바람 들 듯
고향은 뼛속까지 스며든 바람처럼
아리게 한다.

 

#작가의 변
그리움이라는 것은 그만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전재로 한다. 머나먼 이억만리 타국에서 산지 벌써 27년이 다 되어 간다. 등산을 할 때 힘든 오르막길만 올라가면 어떻게 해결될 것만 같다. “저 봉우리만 올라가면 좀 더 편안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봉우리에 올라보면 그곳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더욱 힘들어 지고 실망하게 된다. 다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고 또 바위가 많은 너덜지대를 지나고 나면 두 발로 걸어가지 못해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 험준한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처음 시작할 때 힘들고 나중에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정작 내리막길을 만나면 또 두려움이 앞선다. 이젠 시원찮아진 무릎과 종아리가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행사고는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서 난다.
이젠 인생의 내리막 사고가 끝이질 않고 건강에도 늘 적신호가 켜진다. 나보다 연세 많으신 분 앞에서 글자를 읽지 못해 돋보기를 찾아야 할 경우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건강을 돌보기보단 삶을 쫓은 과거의 발자국들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리 열심히 살았던 지. 부당한 회사의 파트타임 정규직 임용 상황을 당하고보니 회사에서 내편은 없구나 하는 생각과 그걸 어디에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터지면 늘 도움을 주기보다는 원망을 들을 때 더욱 그렇다. 지금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매니저가 늘 입에 달고 하던 말이 있다. “너는 나의 베스트 프랜드”라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가 나보고 한 말은 “봐라 00은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쫓겨나듯이 회사를 나갔잖느냐”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원하는 걸 하느냐가 중요한 거라면서 너도 열심히 하지만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한 적이 있다.
캐나다 이민 오기 전 젊은 나이일 때는 꿈만 풍선처럼 잔뜩 들어 있을 때다. 그때도 인맥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히고설킨 회사의 직원구조는 부장 라인이냐, 차장 라인이냐로 나뉘어져 있었던 거 같다. 대외적으론 부장라인이었지만 부장 라인에서 찬밥이었던 난 그 상황이 싫었다. 외국엔 청소만 해도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이민가면 열심히 살 거야. 하지만 이민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민지도 한국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더욱 심하다. 학연, 지연보다는 같은 국가사람들끼리 뭉쳐 타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한다.
민족적 구분에서 다수를 차지한다는 자체가 파워이기도 하다.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늘 한국인이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늘 찍어내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고 아부와 딸랑거림을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캐나다가 다민족사회라고 하지만 늘 백인중심의 사회였고 백인이 없는 일부 직종과 직장에선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계 등이 주인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지면 나이가 든 표시가 아닐까한다. 내 맘 같지 않은 자녀들 특히 외국인 캐나다에서 살아서 한국에서 자란 자녀와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백인보다 더 보수 백인 같은 벽하고 말하는 것을 느낄 때 나 왜 여기 있나 하는 좌절을 맛본다. 그럴 때마다 바닷가 앉아 두고 온 이들, 떠나 온 고국을 그리워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고국으로 돌아 가”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거지처럼 다시 고향에 돌아 갈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젠 반겨 줄 부모도 없는 고향땅 아는 사람도 다 떠난 고향 땅. 그 고향땅이 아니더라도 고국엔 친구도 있지. 하지만 친구들도 혼자가 아닌 가정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곳에서도 외로움을 느낄거야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그리운 이는 어쩌면 현존 하지 않는 이일 수도 있다. 상상의 따스하고 자상한 이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좀 징그럽다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천수보살처럼 모든 아픔을 어루만져 줄 이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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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바다 너머에 그리운 이 있어
내가 두고 온 시간들
내가 떠나 온 사람들

철썩거리는 바다
문지방 넘는 발소리처럼
겨울 화롯불 끌어안고
창호지 문틈으로 술술
들어오던 바람소리처럼
겨울 무 바람 들 듯
고향은 뼛속까지 스며든 바람처럼
아리게 한다.

 

#작가의 변
그리움이라는 것은 그만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전재로 한다. 머나먼 이억만리 타국에서 산지 벌써 27년이 다 되어 간다. 등산을 할 때 힘든 오르막길만 올라가면 어떻게 해결될 것만 같다. “저 봉우리만 올라가면 좀 더 편안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봉우리에 올라보면 그곳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더욱 힘들어 지고 실망하게 된다. 다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고 또 바위가 많은 너덜지대를 지나고 나면 두 발로 걸어가지 못해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 험준한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처음 시작할 때 힘들고 나중에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정작 내리막길을 만나면 또 두려움이 앞선다. 이젠 시원찮아진 무릎과 종아리가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행사고는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서 난다.
이젠 인생의 내리막 사고가 끝이질 않고 건강에도 늘 적신호가 켜진다. 나보다 연세 많으신 분 앞에서 글자를 읽지 못해 돋보기를 찾아야 할 경우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건강을 돌보기보단 삶을 쫓은 과거의 발자국들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리 열심히 살았던 지. 부당한 회사의 파트타임 정규직 임용 상황을 당하고보니 회사에서 내편은 없구나 하는 생각과 그걸 어디에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터지면 늘 도움을 주기보다는 원망을 들을 때 더욱 그렇다. 지금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매니저가 늘 입에 달고 하던 말이 있다. “너는 나의 베스트 프랜드”라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가 나보고 한 말은 “봐라 00은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쫓겨나듯이 회사를 나갔잖느냐”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원하는 걸 하느냐가 중요한 거라면서 너도 열심히 하지만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한 적이 있다.
캐나다 이민 오기 전 젊은 나이일 때는 꿈만 풍선처럼 잔뜩 들어 있을 때다. 그때도 인맥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히고설킨 회사의 직원구조는 부장 라인이냐, 차장 라인이냐로 나뉘어져 있었던 거 같다. 대외적으론 부장라인이었지만 부장 라인에서 찬밥이었던 난 그 상황이 싫었다. 외국엔 청소만 해도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이민가면 열심히 살 거야. 하지만 이민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민지도 한국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더욱 심하다. 학연, 지연보다는 같은 국가사람들끼리 뭉쳐 타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한다.
민족적 구분에서 다수를 차지한다는 자체가 파워이기도 하다.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늘 한국인이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늘 찍어내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고 아부와 딸랑거림을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캐나다가 다민족사회라고 하지만 늘 백인중심의 사회였고 백인이 없는 일부 직종과 직장에선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계 등이 주인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지면 나이가 든 표시가 아닐까한다. 내 맘 같지 않은 자녀들 특히 외국인 캐나다에서 살아서 한국에서 자란 자녀와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백인보다 더 보수 백인 같은 벽하고 말하는 것을 느낄 때 나 왜 여기 있나 하는 좌절을 맛본다. 그럴 때마다 바닷가 앉아 두고 온 이들, 떠나 온 고국을 그리워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고국으로 돌아 가”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거지처럼 다시 고향에 돌아 갈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젠 반겨 줄 부모도 없는 고향땅 아는 사람도 다 떠난 고향 땅. 그 고향땅이 아니더라도 고국엔 친구도 있지. 하지만 친구들도 혼자가 아닌 가정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곳에서도 외로움을 느낄거야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그리운 이는 어쩌면 현존 하지 않는 이일 수도 있다. 상상의 따스하고 자상한 이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좀 징그럽다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천수보살처럼 모든 아픔을 어루만져 줄 이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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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바다 너머에 그리운 이 있어
내가 두고 온 시간들
내가 떠나 온 사람들


철썩거리는 바다
문지방 넘는 발소리처럼
겨울 화롯불 끌어안고
창호지 문틈으로 술술
들어오던 바람소리처럼
겨울 무 바람 들 듯
고향은 뼛속까지 스며든 바람처럼
아리게 한다.

 

#작가의 변
그리움이라는 것은 그만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전재로 한다. 머나먼 이억만리 타국에서 산지 벌써 27년이 다 되어 간다. 등산을 할 때 힘든 오르막길만 올라가면 어떻게 해결될 것만 같다. “저 봉우리만 올라가면 좀 더 편안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봉우리에 올라보면 그곳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더욱 힘들어 지고 실망하게 된다. 다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고 또 바위가 많은 너덜지대를 지나고 나면 두 발로 걸어가지 못해 네 발로 기어가야 하는 험준한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능하다면 처음 시작할 때 힘들고 나중에 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정작 내리막길을 만나면 또 두려움이 앞선다. 이젠 시원찮아진 무릎과 종아리가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행사고는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서 난다.
이젠 인생의 내리막 사고가 끝이질 않고 건강에도 늘 적신호가 켜진다. 나보다 연세 많으신 분 앞에서 글자를 읽지 못해 돋보기를 찾아야 할 경우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건강이 나쁘다는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건강을 돌보기보단 삶을 쫓은 과거의 발자국들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리 열심히 살았던 지. 부당한 회사의 파트타임 정규직 임용 상황을 당하고보니 회사에서 내편은 없구나 하는 생각과 그걸 어디에 하소연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터지면 늘 도움을 주기보다는 원망을 들을 때 더욱 그렇다. 지금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매니저가 늘 입에 달고 하던 말이 있다. “너는 나의 베스트 프랜드”라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가 나보고 한 말은 “봐라 00은 그렇게 열심히 일했지만 쫓겨나듯이 회사를 나갔잖느냐”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원하는 걸 하느냐가 중요한 거라면서 너도 열심히 하지만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한 적이 있다.
캐나다 이민 오기 전 젊은 나이일 때는 꿈만 풍선처럼 잔뜩 들어 있을 때다. 그때도 인맥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히고설킨 회사의 직원구조는 부장 라인이냐, 차장 라인이냐로 나뉘어져 있었던 거 같다. 대외적으론 부장라인이었지만 부장 라인에서 찬밥이었던 난 그 상황이 싫었다. 외국엔 청소만 해도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이민가면 열심히 살 거야. 하지만 이민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민지도 한국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더욱 심하다. 학연, 지연보다는 같은 국가사람들끼리 뭉쳐 타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한다.
민족적 구분에서 다수를 차지한다는 자체가 파워이기도 하다. 어느 회사에서 일하든 늘 한국인이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늘 찍어내기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없고 아부와 딸랑거림을 잘해야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캐나다가 다민족사회라고 하지만 늘 백인중심의 사회였고 백인이 없는 일부 직종과 직장에선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계 등이 주인처럼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지면 나이가 든 표시가 아닐까한다. 내 맘 같지 않은 자녀들 특히 외국인 캐나다에서 살아서 한국에서 자란 자녀와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백인보다 더 보수 백인 같은 벽하고 말하는 것을 느낄 때 나 왜 여기 있나 하는 좌절을 맛본다. 그럴 때마다 바닷가 앉아 두고 온 이들, 떠나 온 고국을 그리워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고국으로 돌아 가” 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거지처럼 다시 고향에 돌아 갈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젠 반겨 줄 부모도 없는 고향땅 아는 사람도 다 떠난 고향 땅. 그 고향땅이 아니더라도 고국엔 친구도 있지. 하지만 친구들도 혼자가 아닌 가정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곳에서도 외로움을 느낄거야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그리운 이는 어쩌면 현존 하지 않는 이일 수도 있다. 상상의 따스하고 자상한 이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좀 징그럽다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천수보살처럼 모든 아픔을 어루만져 줄 이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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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살고 있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학원을 다니면서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 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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