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4. 6.15 남북정상회담 속의 불교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14. 6.15 남북정상회담 속의 불교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1.11.01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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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역사적 사변'이 일어나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그제 날(2일 전),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 정상의 만남은 “평양이 열렸다. 뜨겁게 손잡았다. 역사를 새로 쓴다.”라는 문구가 남녘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로 장식됐다.

남북한 화해와 협력의 문을 연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만찬 모두발언에서 “이제 공동성명에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라고 두 정상이 합의한 공동선언에 관해 이야기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 5개 항을 담은 정상회담 공동선언의 서문에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라고 기록됐다.

이에 대해 남측은 ‘역사적 선언’으로, 북측에서는 ‘사변적 선언’이라 부르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부터 가시적인 변화가 뒤따랐다. 1971년부터 1999년까지 연평균 12회에 그쳤던 남북간 회담은 2000년 한 해에만 27차례 열렸고,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연평균 1,029명에 불과했던 남북간 교류 인원도 2000년에는 7,280명으로 급증했다. 또 12차례에 걸쳐 1만2천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했다. 민간 부문의 경제협력에서도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을 결합한 개성공단이 가동에 들어갔고, 금강산관광도 본격화되면서 실질적인 남북 협력의 시대로 진입했다.

2000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에서는 남북한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동시입장하면서 남북이 하나 되는 모습을 세계 60억 인들에게 과시하며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후 북핵의 문제와 정권교체에 따른 상반된 대북정책 등으로 남북한 관계는 후퇴와 진전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했다.

이제, 두 주역은 이름만을 남겨 놓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공동선언’ 합의로 갈등과 대립의 남북관계를 화해와 협력 관계로 바꿀 것을 다짐했지만, 2007년과 2018년 남북정상회담 개최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 남북관계는 ‘멈춤의 시간’이지만, 그때 남북한의 설렘과 환희 그리고 남북불교 교류의 전환점이 된 그 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2000.6.13. 평양 순안공항) 사진=남북정상회담 사진공동 취재단



남북 교류협력의 새 지평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그해 12월 25일 미국의 AP통신이 발표한 ‘세계 10대 뉴스’에서 5위를 기록했다. 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항상 ‘역사적인’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났다는 큰 의미와 함께 남북관계의 전반적 심화와 확대라는 결과도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이다.

그 성과는 그때 공동선언문에 축약됐다. 공동선언 이후 구체화 과정을 거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있으며, 난항을 거듭하면서 답보 상태에 있던 것도 있다. 핵심 평가 부문은 양측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주 통일을 이루자는 것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촉진함으로써 경제협력을 비롯한 각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를 이루자는데 있다. 이 가운데서도 통일에 대한 방향이 담겼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초의 남북합의이자.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직접적인 배경에서 추진되었으며, 1991년 12월 13일에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당시 재야와 학생단체 등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민간통일운동을 원천 봉쇄하고, “정부 주도의 통일논의를 독점하겠다.”라는 정책적 표명이었다. 과거의 남북대화에는 민족 공동의 이익보다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추진된 것이었기에 후속 사업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와 달리 6.15 공동선언은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남북한 정부와 민간이 강한 의지를 다지고,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

6.15 공동선언은 전문과 5개 항,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규정한 말미 부분으로 구성됐다. ①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② 연합제(남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북측) 방향으로 통일 지향, ③ 인도적인 문제 해결(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장기수 문제 해결), ④ 경제교류 활성화와 신뢰 구축, ⑤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 개최를 골자로 하고 있다. 이때 6.15 공동선언의 직접적 성과와 그로 인해 파생됐다고 할 수 있는 후속 조치는 이산가족 상봉과 개성공단 등 남북경협 사업의 구체화 및 심화 그리고 장관급회담과 군사 회담을 비롯한 남북 경공업・지하자원 협력사업이다. 특히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은 ‘냉전의 얼음’을 깨기 시작한 것으로 남북정상회담의 포괄적 성과라 할 수 있다.

6.15 남북정상회담이 처음 열리던 날, 서울과 평양 거리에서 터져 나왔던 통일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6.15 남북공동선언은 북측 당국과 주민들에게 ‘통일의 원전(原典)’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할 남북 교류・협력에 있어 기준과 방법을 가늠하는 ‘전례(典例)’로써 6.15 공동선언의 이행과 실천이 과제로 남아 있다.



조선로동당 창건55돌 경축 참관단(평불협, 홍근수 목사, 백기완 소장. 《로동신문》(2000.10.10.) 스크랩.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합동의식(2000.10.12.). 왼쪽부터 취봉, 백운, 청운, 법타 대사, 심상진 서기장, 박준호 사무총장, 집전 청백대사.



남북 첫 공식교류와 뒷이야기

지금,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린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성과는 ‘통일의 이정표’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남북합의와 다르게 실질적인 교류・협력과 관계 개선으로 나아갔던 첫 사례다. 또한 체제가 아니라 민족이 중요하기에 양쪽의 체제가 달라도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해나가자는 6.15 공동선언은 체제 통일이 아닌 민족 통일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분단 이후 배타적으로 인식되어왔던 남북의 통일방안을 서로 인정하는데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민족공동체를 위한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6.15 공동선언으로부터 ​남북은 정부 사이의 고위급 회담을 비롯해 경제협력을 위한 실무회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통한 민간 교류 협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통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남북대화의 본보기가 됐다.

첫걸음은 서울-평양 직항로를 통해 시작됐다. 2000년 10월 9일~14일까지 조선로동당 창건 55돌 기념 남측참관단으로 민관합동 인사 42명이 고려항공 특별기편으로 서울 김포공항과 평양 순안공항을 오갔다. 한완상 상지대 총장을 단장으로 재야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부대표 등 정당인, 농민・노동계, 종교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름으로 초청하고, 당일 오전 김포공항에 고려항공기가 착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오까지 “간다. 못 갈 수도 있다.”라는 등 설왕설래가 분분했다. 고려항공 특별기가 기상 악화로 연착한데다가 남측 정부에서 사전 통지도 없이 재판 계류 등을 이유로 몇몇 인사의 방북 불허와 함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논의의 중심이었다. 2021년 2월 15일 작고한 백기완 소장은 그때 이미 ‘꼭, 고향 황해도에 가리라.’는 심정으로 김포공항에 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단출한 한복차림의 맨몸이었다.

분단 이후 첫 공식교류였던 남측참관단의 일원으로 필자는 신법타 평불협 회장, 박준호 사무총장과 함께 평양길에 올랐다. 예정 시각보다 4시간 가까이 지난 오후 1시 30분 어름에 비행기가 이륙하고, 오후 2시 50분경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참관단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북측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개인이나 단체로 찍힌 사진은 이튿날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 언론에 사진과 이름, 단체명이 차례로 실렸다. 북측 김령성 민족화해협의회 부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황병준 상무위원 등의 영접을 받은 남측참관단은 공항에서 방북회견을 마치고, 대동강 상류 강변에 있는 빌라형 숙소인 봉화초대소에 여장을 풀었다. 초대소 옆 강물에는 물고기가 물결을 가르고 있었다. 솟구쳤다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마치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대동강을 휘감고 돌았다. “어서 오시라요.” 물고기도 반기는 듯했다.

남북연석회의로부터 52년 만에 남측 정당・사회단체 대표단의 평양방문은 10월 10일 오전 8시부터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55돌 축하 열병식 및 군중시위’ 참관으로 시작했다. 9시 광장 주석단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등장으로 시작한 열병식과 군중시위가 10시 35분쯤 끝나고, 친선을 의미하는 뜻에서 김 국방위원장이 주석단 노대를 한 바퀴 돌며 두 손을 맞잡아 높이 드는 인사를 마쳤다. 이때 열병식을 본 남측 인사의 질문에 김령성 민화협 부위원장이 “훈련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자율이 없으면 규율이 없고, 사상이 없으면 못 합니다.”라는 투박한 말투로 화답했다. 그날 저녁 6시에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주최로 내외 인사 5백여 명의 경축연회가 열렸다. 연회에는 단체간 교류의 자리가 마련돼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는 조선불교도연맹 임원과 합석했다.

10월 11일 개선문과 주체탑, 단군릉 방문과 경축 횃불행진을 관람한 남측참관단은 12일에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과 보현사를 방문했다.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일행은 보현사 주지 청운, 부전 청백, 취봉, 금강굴 주지 백운대사와 공동 예경의식을 하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유가협 회장 등이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이날 6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능라도 경기장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창건 경축 10만 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백전백승’을 관람했다. ‘아리랑 공연’의 전신으로, 1989년 7월 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최대 규모로 열린 카드섹션과 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은 “개인이 전체에 변증법적으로 녹아들어 연출해내는 집체예술의 총화”로 평가됐다. 한편, 이날 늦저녁 숙소인 봉화초대소에서는 북미간 새로운 관계 개선을 위한 의지를 확약한 ‘조미 공동콤뮤니케’ 발표가 북측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10월 13일에는 단체별로 북측 상대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평불협 일행은 평양 모란봉구역 흥부동의 조불련 청사를 방문해 박태화 위원장과 심상진 서기장 등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날 정오 어름, 평양 통일거리의 단고기집 오찬 때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특실에서 황해남도 해주시 우파동에 사는 백인숙 누님(72살)과 통곡의 해후(邂逅)를 했다. 평불협에서 여성용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는 등 남북의 통일 일꾼들은 55년 만의 오누이 상봉에 뜨거운 축하맞이를 했다. 오후에 애국열사릉과 만경대 소년학생궁전을 방문한 참관단은 저녁 7시 옥류관에서 민족화해협의회 주최의 환송 연회를 가졌다.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과 안경호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서기국장, 려원구 조국전선 의장과 사회단체 간부들이 함께 “통일을 위해 정당・사회단체 각계 인사들의 내왕이 필요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날 9시경 봉화초대소에서는 김령성 부위원장을 통해 국방위원장의 도자기 선물 세트가 참관단에 전달됐다. 박정기 유가협 회장에게는 박종철 열사의 김일성종합대학 명예졸업장이 전달됐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다음, 조미공동선언 채택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등을 함께 축하하며 지낸 5박 6일간의 평양방문은 그렇게 막이 내렸다. 남북정상회담 경축 속의 불교는 비록 단체였지만, 남북 교류의 한 구성원으로 북측의 불교와 통일을 위하여 한 걸음 더 들어갔다.

# 다음 편은 ‘2000년 또 평양에 가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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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2000.6.13. 평양 순안공항) 사진=남북정상회담 사진공동 취재단

남북 교류협력의 새 지평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그해 12월 25일 미국의 AP통신이 발표한 ‘세계 10대 뉴스’에서 5위를 기록했다. 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항상 ‘역사적인’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남북 정상이 처음 만났다는 큰 의미와 함께 남북관계의 전반적 심화와 확대라는 결과도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이다.

그 성과는 그때 공동선언문에 축약됐다. 공동선언 이후 구체화 과정을 거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업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있으며, 난항을 거듭하면서 답보 상태에 있던 것도 있다. 핵심 평가 부문은 양측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주 통일을 이루자는 것과 인도적 문제 해결을 촉진함으로써 경제협력을 비롯한 각 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를 이루자는데 있다. 이 가운데서도 통일에 대한 방향이 담겼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초의 남북합의이자.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적 위기가 직접적인 배경에서 추진되었으며, 1991년 12월 13일에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당시 재야와 학생단체 등에서 들불처럼 번지던 민간통일운동을 원천 봉쇄하고, “정부 주도의 통일논의를 독점하겠다.”라는 정책적 표명이었다. 과거의 남북대화에는 민족 공동의 이익보다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추진된 것이었기에 후속 사업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와 달리 6.15 공동선언은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남북한 정부와 민간이 강한 의지를 다지고,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새 지평을 열었다.

6.15 공동선언은 전문과 5개 항,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규정한 말미 부분으로 구성됐다. ①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② 연합제(남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북측) 방향으로 통일 지향, ③ 인도적인 문제 해결(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장기수 문제 해결), ④ 경제교류 활성화와 신뢰 구축, ⑤ 합의사항 실천을 위한 당국간 대화 개최를 골자로 하고 있다. 이때 6.15 공동선언의 직접적 성과와 그로 인해 파생됐다고 할 수 있는 후속 조치는 이산가족 상봉과 개성공단 등 남북경협 사업의 구체화 및 심화 그리고 장관급회담과 군사 회담을 비롯한 남북 경공업・지하자원 협력사업이다. 특히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은 ‘냉전의 얼음’을 깨기 시작한 것으로 남북정상회담의 포괄적 성과라 할 수 있다.

6.15 남북정상회담이 처음 열리던 날, 서울과 평양 거리에서 터져 나왔던 통일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6.15 남북공동선언은 북측 당국과 주민들에게 ‘통일의 원전(原典)’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할 남북 교류・협력에 있어 기준과 방법을 가늠하는 ‘전례(典例)’로써 6.15 공동선언의 이행과 실천이 과제로 남아 있다.

조선로동당 창건55돌 경축 참관단(평불협, 홍근수 목사, 백기완 소장. 《로동신문》(2000.10.10.) 스크랩.
조선로동당 창건55돌 경축 참관단(평불협, 홍근수 목사, 백기완 소장. 《로동신문》(2000.10.10.) 스크랩.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합동의식(2000.10.12.). 왼쪽부터 취봉, 백운, 청운, 법타 대사, 심상진 서기장, 박준호 사무총장, 집전 청백대사.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합동의식(2000.10.12.). 왼쪽부터 취봉, 백운, 청운, 법타 대사, 심상진 서기장, 박준호 사무총장, 집전 청백대사.

남북 첫 공식교류와 뒷이야기

지금,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린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성과는 ‘통일의 이정표’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남북합의와 다르게 실질적인 교류・협력과 관계 개선으로 나아갔던 첫 사례다. 또한 체제가 아니라 민족이 중요하기에 양쪽의 체제가 달라도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해나가자는 6.15 공동선언은 체제 통일이 아닌 민족 통일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분단 이후 배타적으로 인식되어왔던 남북의 통일방안을 서로 인정하는데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민족공동체를 위한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6.15 공동선언으로부터 ​남북은 정부 사이의 고위급 회담을 비롯해 경제협력을 위한 실무회담,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을 통한 민간 교류 협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통일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남북대화의 본보기가 됐다.

첫걸음은 서울-평양 직항로를 통해 시작됐다. 2000년 10월 9일~14일까지 조선로동당 창건 55돌 기념 남측참관단으로 민관합동 인사 42명이 고려항공 특별기편으로 서울 김포공항과 평양 순안공항을 오갔다. 한완상 상지대 총장을 단장으로 재야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부대표 등 정당인, 농민・노동계, 종교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름으로 초청하고, 당일 오전 김포공항에 고려항공기가 착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오까지 “간다. 못 갈 수도 있다.”라는 등 설왕설래가 분분했다. 고려항공 특별기가 기상 악화로 연착한데다가 남측 정부에서 사전 통지도 없이 재판 계류 등을 이유로 몇몇 인사의 방북 불허와 함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논의의 중심이었다. 2021년 2월 15일 작고한 백기완 소장은 그때 이미 ‘꼭, 고향 황해도에 가리라.’는 심정으로 김포공항에 나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단출한 한복차림의 맨몸이었다.

분단 이후 첫 공식교류였던 남측참관단의 일원으로 필자는 신법타 평불협 회장, 박준호 사무총장과 함께 평양길에 올랐다. 예정 시각보다 4시간 가까이 지난 오후 1시 30분 어름에 비행기가 이륙하고, 오후 2시 50분경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참관단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북측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개인이나 단체로 찍힌 사진은 이튿날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 언론에 사진과 이름, 단체명이 차례로 실렸다. 북측 김령성 민족화해협의회 부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황병준 상무위원 등의 영접을 받은 남측참관단은 공항에서 방북회견을 마치고, 대동강 상류 강변에 있는 빌라형 숙소인 봉화초대소에 여장을 풀었다. 초대소 옆 강물에는 물고기가 물결을 가르고 있었다. 솟구쳤다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마치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대동강을 휘감고 돌았다. “어서 오시라요.” 물고기도 반기는 듯했다.

남북연석회의로부터 52년 만에 남측 정당・사회단체 대표단의 평양방문은 10월 10일 오전 8시부터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55돌 축하 열병식 및 군중시위’ 참관으로 시작했다. 9시 광장 주석단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등장으로 시작한 열병식과 군중시위가 10시 35분쯤 끝나고, 친선을 의미하는 뜻에서 김 국방위원장이 주석단 노대를 한 바퀴 돌며 두 손을 맞잡아 높이 드는 인사를 마쳤다. 이때 열병식을 본 남측 인사의 질문에 김령성 민화협 부위원장이 “훈련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자율이 없으면 규율이 없고, 사상이 없으면 못 합니다.”라는 투박한 말투로 화답했다. 그날 저녁 6시에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주최로 내외 인사 5백여 명의 경축연회가 열렸다. 연회에는 단체간 교류의 자리가 마련돼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는 조선불교도연맹 임원과 합석했다.

10월 11일 개선문과 주체탑, 단군릉 방문과 경축 횃불행진을 관람한 남측참관단은 12일에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과 보현사를 방문했다.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일행은 보현사 주지 청운, 부전 청백, 취봉, 금강굴 주지 백운대사와 공동 예경의식을 하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유가협 회장 등이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이날 6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능라도 경기장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창건 경축 10만 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백전백승’을 관람했다. ‘아리랑 공연’의 전신으로, 1989년 7월 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최대 규모로 열린 카드섹션과 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은 “개인이 전체에 변증법적으로 녹아들어 연출해내는 집체예술의 총화”로 평가됐다. 한편, 이날 늦저녁 숙소인 봉화초대소에서는 북미간 새로운 관계 개선을 위한 의지를 확약한 ‘조미 공동콤뮤니케’ 발표가 북측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10월 13일에는 단체별로 북측 상대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평불협 일행은 평양 모란봉구역 흥부동의 조불련 청사를 방문해 박태화 위원장과 심상진 서기장 등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날 정오 어름, 평양 통일거리의 단고기집 오찬 때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특실에서 황해남도 해주시 우파동에 사는 백인숙 누님(72살)과 통곡의 해후(邂逅)를 했다. 평불협에서 여성용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는 등 남북의 통일 일꾼들은 55년 만의 오누이 상봉에 뜨거운 축하맞이를 했다. 오후에 애국열사릉과 만경대 소년학생궁전을 방문한 참관단은 저녁 7시 옥류관에서 민족화해협의회 주최의 환송 연회를 가졌다.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과 안경호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서기국장, 려원구 조국전선 의장과 사회단체 간부들이 함께 “통일을 위해 정당・사회단체 각계 인사들의 내왕이 필요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날 9시경 봉화초대소에서는 김령성 부위원장을 통해 국방위원장의 도자기 선물 세트가 참관단에 전달됐다. 박정기 유가협 회장에게는 박종철 열사의 김일성종합대학 명예졸업장이 전달됐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다음, 조미공동선언 채택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등을 함께 축하하며 지낸 5박 6일간의 평양방문은 그렇게 막이 내렸다. 남북정상회담 경축 속의 불교는 비록 단체였지만, 남북 교류의 한 구성원으로 북측의 불교와 통일을 위하여 한 걸음 더 들어갔다.

# 다음 편은 ‘2000년 또 평양에 가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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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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