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16. 2001년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16. 2001년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12.1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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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 사자후 울리다”

2019년 문광부가 제작 보급한 ‘범 내려온다.’는 노랫말이 인기였다. 뮤직비디오는 조선 후기의 소설 《별주부전》과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대목으로, 자라가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육지로 갔다가 토끼를 부른다는 것을 잘못하여 호랑이를 부르는 바람에 소동이 일어난 부분을 다루었다. 조선의 DNA, 내 안의 K-흥을 찾는 얼터너티브 팝 밴드인 이날치&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부른 ‘범 내려온다.’는 한국관광공사가 총 123억원 상당의 제작홍보비를 투자했고, 해당 영상의 조회수는 2억8,800만 뷰(PV)를 기록했을 만큼 신드롬을 낳았다.

여기에서 다룬 호랑이 즉, 범(虎)은 가장 신성한 동물로 여겼다. 단군신화를 비롯해 전설과 신화의 단골이다. 또 고려 광종 때의 탄문대사가 개성 구룡사에서《화엄경》을 법문할 때, “새가 날아들고, 호랑이가 뜰에 와서 엎드리는 일이 있었다.”고 하여 별대덕(別大德)이라 불릴 만큼 고승들의 일화에도 많이 등장한다. 단원 김홍도와 만향 정홍래, 현재 심사정, 신원 이의량 등의 맹호도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산짐승의 왕’이다. 또 울음은 산군포효(山君咆哮)라는 영모화에 담기고, 선종의 선기(禪機, 지혜의 작용)로도 표현됐을 정도다.

호환으로 생긴 공포가 일종의 경외감으로 바뀐 호랑이의 포효와 다르게 불교에서는 깨움의 소리를 ‘사자후(獅子吼)’라고 일컫는다. 밀림의 왕, 사자가 울부짖는 포효와 같이 위엄있는 붓다의 설법을 가리키는 사자후는 대중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설득력 있는 명연설을 말하기도 한다.

기원전의《유마경》에 처음 나오는 사자후는 부처님의 설법으로, 1006년 중국 송나라 도원의《전등록》에는 석가모니의 말씀으로 표현됐다. 12세기 북송 때 소동파의 시에 쓰이면서 고려 후기부터 유행했다. 조선 중기에 서산대사가 금강산 장안사 범종 기명에도 쓰인 ‘사자후’라는 낱말은 근세기에 별호를 석사자(釋師子)로 썼던 순천 송광사 구산수련 선사의 저서 《사자후》로 더 유명해졌다.

분단 이후, 사라졌던 사자후가 금강산에 다시 울려 퍼졌다. 2001년 6월 금강산호텔 앞마당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 생긴 일이다.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북측이 제안한 남북교류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처음 시작된 남북공동 행사의 첫 장면을 열어보고, 그해 동안의 여러 만남을 그려 본다.

2001년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개막장면(북측 금강산호텔) 사진=통일뉴스(2015.5.11.)



금강산 대토론회에서의 사자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해 하반기에만 남북장관급회담 3차례, 군사실무회담 3차례, 이산가족상봉 2차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1차례 등 정부 간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당시에 평양을 찾았던 분들은 북측 관계자로부터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민간차원의 교류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가 2001년에 들어와서 남북공동 행사로 본격화됐다.

북측에서는 2001년 1월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최태복, 양형섭, 김용순, 유미영, 김영대, 강능수, 염순길, 박순희 등 내각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 평화통일의 획기적 국면을 열어나갈 데 대하여”에 집체 토론하고, 2001년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해’로 선포했다. 또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이던 6월 15일~8월 15일까지 2개월을 ‘민족통일촉진운동기간’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교류프로그램을 구상, 준비해서 남측에 제시했었다.

《조선중앙방송》(2001.1.19.)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을 이룩하자.’는 제목의 방송에서 “외세와의 공조에 매달린다는 것은 통일문제 해결의 주인으로서의 자기의 권능과 자격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이념과 제도는 달라도 동족은 동족이고, 이념과 제도는 같아도 외세는 어디까지나 외세이다. 통일은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통일문제에 있어 외세와 공조하는 것은 낡은 대결시대의 유물이다. 민족자주와 외세의존은 양립될 수 없다. 진정으로 북남 사이에 화해와 단합,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외세와의 공조를 그만두고 동족과 공조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라 보도하면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외구호를 처음 공식화했다.

북측의 공동행사 제의에 대해 남측의 재야통일운동 단체와 시민, 노동단체들은 2001년 3월 15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민주노총·한국노총·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민주노동당·평통사와 평불협 등 38개 단체가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약칭 통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약칭 민화협)에 6월 15일 금강산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민족대토론회’ 개최를 제안했다. 그해 6월 15일~8월 15일까지를 ‘민족통일운동촉진’ 기간으로 정하고, 북측과의 실무회담 개최를 제의했다. 1998년에 결성된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은 2000년 3월 1일 기독교(KNCC)·가톨릭(천주교)·불교·원불교·유교(성균관)·천도교·한국민족종교협의회(민족종교) 등 7대 종단이 2000년 2월 결성한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와 함께 그때를 ‘민족화해촉진운동’ 기간으로 정하고,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통일연대는 범민련과 한총련이 참여단체로 있다는 이유로 남측 정부가 대북 접촉 승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적 남북교류를 추진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7대 종단과 민화협 주도로, 그해 5월 23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약칭 추진본부)가 결성됐다. 통일연대 소속의 민주노총과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자통협)를 제외한 연대 단체들은 격론 끝에 추진본부 참가를 결정하고, 금강산 공동행사를 이끌었다. 동 추진본부에서는 북측에 보낸 제안서에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진행할 것과 이를 협의하기 위한 실무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북측은 5월 28일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열어나가기 위한 정당, 단체 합동회의’ 개최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하고, 남북해외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민족통일대토론회’를 제안했다.

2001년도 남북교류는 노동자와 농민 단체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4.30~5.2)와 ‘남북농민통일대회’(7.18~19)를 금강산에서 대규모로 개최했다. 이후 7대 종단을 중심으로 한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와 민화협, 통일연대로 구성된 추진본부는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 기념해 ‘민족통일대토론회’를 6월 15일부터 16일까지 금강산에서 가졌다. 남측의 2001년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 소속 430여 명과 북측의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본부(단장 김영대) 소속 240여 명이 6.15 공동선언의 이행과 실천방안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첫 만남을 가졌다.

금강산에서 열린 2001년 민족통일대토론회에 북측대표 토론자로 나선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은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일명 남북연석회의) 토론에 나섰던 김세률 조불련 초대위원장 이후, 남북공동 행사에서 처음으로 연설했다. 분단 이후, 금강산에 처음 모인 남북 대중들 앞에서 연설한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의 사자후는 핵심을 관통하는 ‘통일에 관한 깨움의 소리’와 같았다. 이날 박태화 위원장(2005.11.11. 입적)의 사자후는 해방과 분단 이후, 금강산에서 처음이자 또 마지막 법성(法聲)으로 기록되었다.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는 2001년 8월 15일~16일 평양에서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회’ 개최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민화협과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 통일연대로 구성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는 분단 이후, 평양 대성산성 남문광장에서 처음 열린 ‘8.15 민족대회’를 공동행사로 열었다. 그때 조국통일 3대 헌장기념탑 앞에서 열린 개막식 행사에 남측 대표단의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또 만경대 고향집 파문과 사후 방명록 보도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하면서 2001년 평양 ‘8.15 민족대회’ 때로부터 남남갈등이라는 새로운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2001년 8월, 340여 명의 남측 대표단이 평양을 직항로 방문하여 김일성경기장 등지에서 남북공동 행사로 열었던 평양 ‘8.15 민족대회’는 결과적으로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때의 혼란을 딛고 일어서면서 남북의 민간교류는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민간교류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2001년 3월부터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민간이 앞장서서 남북대화의 가느다란 줄을 이었다. 또 사회문화, 종교 등 민간차원의 다양한 남북교류는 남과 북 주민들 사이에 ‘냉전의 벽’을 허무는 신뢰를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의 평양 용화사 예불의식(1998.9. 평양 룡화사) 우측부터 박태화 위원장, 룡화사 주지 홍암 등. 사진=조선화보(1988년 11월호)





우측부터 박태화 위원장, 홍화두 고문, 심상진 서기장(1991.10.30.) 사진=월간 불교계(1992년)



북녘의 붉은 승려, 학림대사

‘붉은 승려’는 북측 승려에 대한 별칭이다. 한국불교태고종 법복과 같은 붉은색의 홍가사(紅袈裟)를 장삼 또는 두루마기 위에 걸치기(垂) 때문이다. 북측 승려들은 검정색, 회색 장삼이나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붉은색 가사를 두르고 있어서 홍회색 또는 홍람색 가사를 멘 승려로 표현되기도 했다. 민머리인 소발(素髮)과 검은 머리카락(黑髮)을 한 북녘의 승려들이 법회 등에서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있기에 표현하는 상징적 용어이다.

오늘날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제3대 위원장이던 학림당(鶴林堂) 박태화 대선사도 홍가사를 입은 ‘붉은 승려’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2005년 11월 11일 86세를 일기로 입적한 학림 대선사는 1988년 9월 일본의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화보》에 북한 종교인으로 처음 인터뷰하고, 그해 11월호에 사진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게재되었다.

학림 대선사가 대규모의 남측 사람들과 만났던 때는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이어 2001년 금강산호텔 앞마당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다. 이날 통일대토론회에 북측의 첫 발표자로 나섰던 학림당 박태화 대선사는 그해 1월 평양에서 열린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에서 채택, 공포한 ‘7천만 겨레에 대한 호소문’을 중심으로 30분 발언을 했다.

그때 학림 대선사는 “올해에 조국통일의 획기적 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한 중대한 대책을 토의하고, 7천만 겨레에게 다음과 같이 열렬히 호소한다. 올해는 우리 민족이 나라의 분열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자랑찬 전환의 해이다. 온 민족이 21세기의 첫해인 올해를 민족 자주통일의 획기적 국면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빛내어 나가자. 역사적인 6.15 북남공동선언은 조국통일 3대 원칙에 기초하고 있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선언이며, 조국통일의 이정표이다. … 서로 오고 가고 서로 만나 오해와 불신을 가시고, 신뢰와 단합을 도모하자.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자본가, 종교인 등 해내외의 각계각층 동포들은 소속과 처지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연대하고, 자주와 대단결 애국애족의 대오에 합류하자. … 지금이야말로 전체 조선 민족이 시대와 역사의 부름 앞에 애국애족의 열정을 바쳐 나서야 할 때이다.”라고 일제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 선사의 일성을 그대로 이었다.

2001년에 처음 열린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와 평양 민족대회는 민주화운동에 남북교류라는 또 하나의 화두를 제시하고, 민간차원에서 교류의 당위성과 이를 유지・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남북 민간교류는 6・15와 8・15 기념 남북공동 행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에 북녘의 붉은 승려, 학림 대선사는 ‘통일의 길상초’를 깔아 놓고 떠났다.

# 다음 편은 ‘2002년 8・15 민족통일대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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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15 민족통일대토론회 개막장면(북측 금강산호텔) 사진=통일뉴스(2015.5.11.)

금강산 대토론회에서의 사자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해 하반기에만 남북장관급회담 3차례, 군사실무회담 3차례, 이산가족상봉 2차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1차례 등 정부 간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당시에 평양을 찾았던 분들은 북측 관계자로부터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민간차원의 교류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가 2001년에 들어와서 남북공동 행사로 본격화됐다.

북측에서는 2001년 1월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최태복, 양형섭, 김용순, 유미영, 김영대, 강능수, 염순길, 박순희 등 내각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 평화통일의 획기적 국면을 열어나갈 데 대하여”에 집체 토론하고, 2001년을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해’로 선포했다. 또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이던 6월 15일~8월 15일까지 2개월을 ‘민족통일촉진운동기간’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교류프로그램을 구상, 준비해서 남측에 제시했었다.

《조선중앙방송》(2001.1.19.)에서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을 이룩하자.’는 제목의 방송에서 “외세와의 공조에 매달린다는 것은 통일문제 해결의 주인으로서의 자기의 권능과 자격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이념과 제도는 달라도 동족은 동족이고, 이념과 제도는 같아도 외세는 어디까지나 외세이다. 통일은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통일문제에 있어 외세와 공조하는 것은 낡은 대결시대의 유물이다. 민족자주와 외세의존은 양립될 수 없다. 진정으로 북남 사이에 화해와 단합,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외세와의 공조를 그만두고 동족과 공조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라 보도하면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외구호를 처음 공식화했다.

북측의 공동행사 제의에 대해 남측의 재야통일운동 단체와 시민, 노동단체들은 2001년 3월 15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민주노총·한국노총·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민주노동당·평통사와 평불협 등 38개 단체가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약칭 통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약칭 민화협)에 6월 15일 금강산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민족대토론회’ 개최를 제안했다. 그해 6월 15일~8월 15일까지를 ‘민족통일운동촉진’ 기간으로 정하고, 북측과의 실무회담 개최를 제의했다. 1998년에 결성된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약칭 민화협)은 2000년 3월 1일 기독교(KNCC)·가톨릭(천주교)·불교·원불교·유교(성균관)·천도교·한국민족종교협의회(민족종교) 등 7대 종단이 2000년 2월 결성한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와 함께 그때를 ‘민족화해촉진운동’ 기간으로 정하고,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통일연대는 범민련과 한총련이 참여단체로 있다는 이유로 남측 정부가 대북 접촉 승인을 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적 남북교류를 추진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7대 종단과 민화협 주도로, 그해 5월 23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약칭 추진본부)가 결성됐다. 통일연대 소속의 민주노총과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자통협)를 제외한 연대 단체들은 격론 끝에 추진본부 참가를 결정하고, 금강산 공동행사를 이끌었다. 동 추진본부에서는 북측에 보낸 제안서에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진행할 것과 이를 협의하기 위한 실무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이에 북측은 5월 28일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열어나가기 위한 정당, 단체 합동회의’ 개최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하고, 남북해외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민족통일대토론회’를 제안했다.

2001년도 남북교류는 노동자와 농민 단체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4.30~5.2)와 ‘남북농민통일대회’(7.18~19)를 금강산에서 대규모로 개최했다. 이후 7대 종단을 중심으로 한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와 민화협, 통일연대로 구성된 추진본부는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 기념해 ‘민족통일대토론회’를 6월 15일부터 16일까지 금강산에서 가졌다. 남측의 2001년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 소속 430여 명과 북측의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본부(단장 김영대) 소속 240여 명이 6.15 공동선언의 이행과 실천방안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첫 만남을 가졌다.

금강산에서 열린 2001년 민족통일대토론회에 북측대표 토론자로 나선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은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일명 남북연석회의) 토론에 나섰던 김세률 조불련 초대위원장 이후, 남북공동 행사에서 처음으로 연설했다. 분단 이후, 금강산에 처음 모인 남북 대중들 앞에서 연설한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의 사자후는 핵심을 관통하는 ‘통일에 관한 깨움의 소리’와 같았다. 이날 박태화 위원장(2005.11.11. 입적)의 사자후는 해방과 분단 이후, 금강산에서 처음이자 또 마지막 법성(法聲)으로 기록되었다.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는 2001년 8월 15일~16일 평양에서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회’ 개최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민화협과 온겨레손잡기운동본부, 통일연대로 구성된 2001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는 분단 이후, 평양 대성산성 남문광장에서 처음 열린 ‘8.15 민족대회’를 공동행사로 열었다. 그때 조국통일 3대 헌장기념탑 앞에서 열린 개막식 행사에 남측 대표단의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또 만경대 고향집 파문과 사후 방명록 보도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하면서 2001년 평양 ‘8.15 민족대회’ 때로부터 남남갈등이라는 새로운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2001년 8월, 340여 명의 남측 대표단이 평양을 직항로 방문하여 김일성경기장 등지에서 남북공동 행사로 열었던 평양 ‘8.15 민족대회’는 결과적으로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때의 혼란을 딛고 일어서면서 남북의 민간교류는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민간교류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2001년 3월부터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민간이 앞장서서 남북대화의 가느다란 줄을 이었다. 또 사회문화, 종교 등 민간차원의 다양한 남북교류는 남과 북 주민들 사이에 ‘냉전의 벽’을 허무는 신뢰를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의 평양 용화사 예불의식(1998.9. 평양 룡화사) 우측부터 박태화 위원장, 룡화사 주지 홍암 등. 사진=조선화보(1988년 11월호)
박태화 조불련 위원장의 평양 용화사 예불의식(1998.9. 평양 룡화사) 우측부터 박태화 위원장, 룡화사 주지 홍암 등. 사진=조선화보(1988년 11월호)
우측부터 박태화 위원장, 홍화두 고문, 심상진 서기장(1991.10.30.) 사진=월간 불교계(1992년)
우측부터 박태화 위원장, 홍화두 고문, 심상진 서기장(1991.10.30.) 사진=월간 불교계(1992년)

북녘의 붉은 승려, 학림대사

‘붉은 승려’는 북측 승려에 대한 별칭이다. 한국불교태고종 법복과 같은 붉은색의 홍가사(紅袈裟)를 장삼 또는 두루마기 위에 걸치기(垂) 때문이다. 북측 승려들은 검정색, 회색 장삼이나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붉은색 가사를 두르고 있어서 홍회색 또는 홍람색 가사를 멘 승려로 표현되기도 했다. 민머리인 소발(素髮)과 검은 머리카락(黑髮)을 한 북녘의 승려들이 법회 등에서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있기에 표현하는 상징적 용어이다.

오늘날 북한불교를 대표하는 조불련 중앙위원회의 제3대 위원장이던 학림당(鶴林堂) 박태화 대선사도 홍가사를 입은 ‘붉은 승려’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2005년 11월 11일 86세를 일기로 입적한 학림 대선사는 1988년 9월 일본의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화보》에 북한 종교인으로 처음 인터뷰하고, 그해 11월호에 사진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게재되었다.

학림 대선사가 대규모의 남측 사람들과 만났던 때는 1991년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이어 2001년 금강산호텔 앞마당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다. 이날 통일대토론회에 북측의 첫 발표자로 나섰던 학림당 박태화 대선사는 그해 1월 평양에서 열린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에서 채택, 공포한 ‘7천만 겨레에 대한 호소문’을 중심으로 30분 발언을 했다.

그때 학림 대선사는 “올해에 조국통일의 획기적 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한 중대한 대책을 토의하고, 7천만 겨레에게 다음과 같이 열렬히 호소한다. 올해는 우리 민족이 나라의 분열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자랑찬 전환의 해이다. 온 민족이 21세기의 첫해인 올해를 민족 자주통일의 획기적 국면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빛내어 나가자. 역사적인 6.15 북남공동선언은 조국통일 3대 원칙에 기초하고 있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선언이며, 조국통일의 이정표이다. … 서로 오고 가고 서로 만나 오해와 불신을 가시고, 신뢰와 단합을 도모하자.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자본가, 종교인 등 해내외의 각계각층 동포들은 소속과 처지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연대하고, 자주와 대단결 애국애족의 대오에 합류하자. … 지금이야말로 전체 조선 민족이 시대와 역사의 부름 앞에 애국애족의 열정을 바쳐 나서야 할 때이다.”라고 일제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 선사의 일성을 그대로 이었다.

2001년에 처음 열린 금강산 민족통일대토론회와 평양 민족대회는 민주화운동에 남북교류라는 또 하나의 화두를 제시하고, 민간차원에서 교류의 당위성과 이를 유지・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남북 민간교류는 6・15와 8・15 기념 남북공동 행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에 북녘의 붉은 승려, 학림 대선사는 ‘통일의 길상초’를 깔아 놓고 떠났다.

# 다음 편은 ‘2002년 8・15 민족통일대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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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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