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종단본 '불교 5대 수행법 지침서'를 비평하다
[기고] 종단본 '불교 5대 수행법 지침서'를 비평하다
  • 허정 스님/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22.01.0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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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스님/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1.들어가는 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언어로 새롭게 전달하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종단본 <불교성전>의 봉정식 2021년 2월 24일에 거행되었다. 불교성전을 읽고 나는 “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다1”라는 글을 썼고 다시 며칠 뒤 “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다2”라는 글을 써서 약70여 곳의 잘못된 곳을 지적하였다. 각 사찰의 불교대학교재로 사용되는 ‘불교입문’을 읽고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러한 비평이 있은 후에 종단이나 포교원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2020년에 포교원은 <불교 5대 수행법 길라잡이>라는 책을 내고 후속작으로 <불교 5대 수행법 지침서>라는 책을 내었다. 계율, 간경, 염불, 참선, 보살행이라는 5가지 수행법을 정리한 <불교 5대 수행법 지침서>를 읽고 다시 비평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불자들이 실생활에서 참고하는 중요한 책이건만 용어통일이 되어있지 않고, 시대를 달리하여 나타난 이질적인 사상이 혼합되어 있고, 개인의 사견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였다.

2. 비평

9p
“계행을 철저히 닦은 삼매는 커다란 과보와 공덕이 있고, 삼매를 철저히 닦는 지혜는 커다란 과와 공덕이 있으며, 지혜를 철저히 닦는 마음은 번뇌, 말하자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 존재에 의한 번뇌, 무명에 의한 번뇌에서 완전히 해탈한다.” <대반열반경>

[비평] 초기 <대반열반경>과 대승 <대반열반경>을 인용하고 있으면서도 그냥 <대반열반경>이라고만 밝히고 있어 혼동된다. <디가 니까야>(D16) 열반경과 ‘대승 대반열반경’을 구분해서 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15p
“지범개차(持犯開遮)는 무엇이 계를 지키는 것이고, 무엇이 계를 어기는 것이며, 어떤 것이 금지된 가운데서도 허용되는 것이며, 또 어떤 것이 허용된 가운데서도 다시 막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지범개차는 율장에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스님들에게서 잘 배워야 합니다.”

[비평] 지범계차에 관하여 바른 설명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지범계차를 잘못 가르치는 스님들이 많았고 지금도 잘못 가르치는 스님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금지된 가운데서도 허용되는 것이며, 또 어떤 것이 허용된 가운데서도 다시 막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면 율장을 꼼꼼히 배워야하는데 스님들도 잘 모르는 지범개차를 불자들에게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한가?

15p
“‘불여취’를 떠나고 ‘불여취’를 끊어 주어진 뒤에 받고 주어진 것 받기를 즐기며 항상 보시를 좋아하고 기뻐하여 아낌이 없고 그 갚음을 바라지 않으며,…”

[비평] ‘불여취’가 무슨 뜻인지 한문을 병기하지도 않고 설명도 없이 불여취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성의가 없어 보인다. 불여취(不與取)를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라고 풀어쓰면 좋지 않은가?

23p
“학자들은 보살계를 담고 있는 <범망경>이 중국에서 찬술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 좋게 보면 위경(僞經)이라고 하겠지만 경전이 위경이냐 아니냐의 분명한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초기불전 조차도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 그대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비평] 이렇게 초기불전도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 그대로라고 할 수 없다는 설명은 물귀신 작전이다. <법망경> ‘보살계’ 서문에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제정 되었다고 한다. 정각 후에 제정된 보살계에 어떻게 아직 가르치지 않은 12부경이 나오고, 소승대승 경율이 나오고, 불상과 보살상 이야기가 나오는가? <범망경> ‘보살계본’은 율이 만들어지는 계기도 없고 계를 주는 구성원이나 참회방법도 허술하다. 제16조 “몸을 태우거나 팔을 태우거나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지 않으면 출가보살이 아니다.”는 조항은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는 괴이한 것이며, 제8조 제15조 제24조 제36조에서는 ‘이승과 소승의 경율을 배우면 죄가 된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면 보살계를 만든 자들이 얼마나 근본 가르침을 증오했나를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정보가 넘쳐나서 어떤 것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고 어떤 것이 위경(僞經)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제 거짓으로 가득 찬 ‘보살계본’은 과감히 버려야한다. <법망경>이 위경인 것이 이렇게 확실한데 경전이 위경이냐 아니냐의 분명한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자들을 속이는 짓이며, 초기불전도 내용 그대로가 아니다라는 물귀신 작전은 불자들에게 우리는 관연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30p
“불자여, 만약 과거 미래 현재의 일체 중생 가운데 이 보살계를 받지 않는 이는 지각이 있는 이라고 하지 않으며 축생과 다를 바가 없으며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으며 항상 삼보의 바다를 여의게 되나니 보살이 아니니라. 이름하여 축생이라고 하고 사견이라고 하고 외도라고 하나니 인정에 가깝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받아야 하나니, 있으면서 범하는 것은 없으면서 범하지 않는 것보다 수승하나니, 범하는 일이 있어도 계를 받은 이는 보살이라고 이름하고 범하는 일이 없어도 계를 받지 않은 이는 외도라 하느니라.” <보살영락본업경> ‘대중수학품’

[비평] “보살계를 받지 않는 이는 축생과 다를 바가 없다.”, “보살계를 받고 계를 범하는 것은 없으면서 범하지 않는 것보다 수승하다.”라는 설명들은 ‘깔라마경’ 등 부처님의 초기불전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이러한 것을 왜 지금도 가르쳐야 하는가?
2010년 조계종 교육원은 기존의 <치문>, <서장>, <도서>, <선요>를 가르치던 교과목을 개편하며 초기불교, 아비달마, 율장, 교단의 형성과 전개, 조계종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교원의 ‘5대 수행법’에는 위경을 인용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 종단을 대표하는 포교원이 이렇게 시대를 못 읽고 헤매는 것은 비극이다.

32p
“<우바새계경> ‘수계품’에서는 먼저 선생이 우바새계를 받고자 하는 재가보살은 어떻게 계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자 부처님께서 먼저 육방에 공양할 것을 설하는데 육방이란 부모, 스승, 처자, 선지식, 아랫사람, 사문·바라문입니다.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실천을 베풀겠는지를 물은 연후에 그러겠다고 하면 5계를 지키지 않았을 때의 과보를 설합니다. 다음으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만 6개월 동안 출가한 스승을 받들어 섬기게 하고, 스승은 또 지극한 마음으로 그의 몸의 4위의(행주좌와)를 살펴 만약 이 사람이 능히 가르치는 대로 하는 것을 알았거든 6개월이 지나서 여러 승려와 화합하여 만 20인으로 백갈마를 짓습니다. 이와 같이 재가자라 할지라도 수계의 과정이 엄격합니다.

[비평] ‘여러 승려와 화합하여 만 20인으로 백갈마를 짓습니다.’라는 표현은 애매하다. ‘화합승가 20인이 모인 자리에서 수계의식을 진행합니다.’라는 표현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종단에서는 일반불자들이 수계하는데 이러한 규칙을 따르지도 않는데 <우바새계경> ‘수계품’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위와 같이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설명을 하는 것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56p
“수계자는 장궤합장한다. 저두레 한다.”

[비평] ‘장궤합장’은 무릎 꿇고 합장하는 자세, ‘저두례’는 반배하는 자세라고 풀어 쓰면 이해가 쉽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목탁을 내리면서 절한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67p
“계를 받는 저희들은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하겠습니다.“

[비평]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할 때 재가신자가 된다.”(S55:37) “저희들은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A3:65)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승가에 귀의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하겠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표현의 차이를 모르는 건지, 편집가들 사이에 소통이 안 된 건지 모르겠지만 독자는 혼란스럽다. 또한 “사불괴신(四不壞信)이란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와 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승가란 화합대중이니 성품과 모습이 둘이 아니고 이치와 현상이 화합하면 이것이 본래 승보인 것이요,”(79p)이란 문장에서 ‘승가’에 ‘스님’을 넣어보면 왜 ‘승가’를 ‘스님’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지 알 것이다. 세계적으로 ‘승가’에 귀의하지 않고 ‘스님’에게 귀의하는 단체는 조계종이 유일하다.

75p
“도에 나아감이 수승하니 도를 닦기 쉽다는 뜻이며 보살계의 힘으로 발심하면 육도의 삶이나 이승(二乘)을 초월하여 바로 위없는 보리(菩提)에 나가가게 됩니다…. 공덕이 수승하니 보살의 계를 받는 것은 해와 달의 빛과 같고성문(聲聞)의 계는 반딧불 같아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평] 성문 연각이라는 이승(二乘)을 폄하하여 보살의 계를 받는 것은 해와 달의 빛과 같고 성문(聲聞)의 계는 반딧불 같아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아직도 이러한 위경의 지식을 불자들에게 심어주어서야 되겠는가?

83p
“모든 불자들이여, 그대들이 그 몸으로 부처의 몸이 될 때까지 미래세가 다하도록 그 사이에 짐짓 중생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 만약 범한다면 그것은 보살행이 아니며 사십이위현성법(四十二位賢聖法)을 잃는 것이니,”

[비평] 어디에서건 사십이위현성법(四十二位賢聖法)을 설명하는 문장이 없다.

91p
“지극한 마음으로,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부처님께 절하옵니다.(절) 지극한 마음으로,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부처님께 절하옵니다.(절) 지극한 마음으로, 온 세계 항상 계신 거룩하신 부처님께 절하옵니다.(절)

[비평] ‘거룩하신 부처님께’가 3번 연속 나타난 것은 집필자나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93p
“‘일일수행점검을 위해 포교원에서 제작 배포한 붓다로 살자 신행앱을 활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포교원에서 개발한 붓다로 살자 앱을 다운받아 스마트폰에 설치합니다.’(95p) ‘붓다로 살자’ 신행 청규이니 이와 같이 수지하라.(99p)”

[비평] ‘붓다로살자’라는 운동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는데 이렇게 ‘붓다로 살자’ 신행 앱을 활용하라니 유감이다. 종단에서 ‘붓다로살자’ 운동을 하고자 할 때도 종도들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데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만들어 배포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136p
“목갈리풋타 티샤[Moggalīputtattissa]에게 교설의 확장과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라고 위촉하였습니다…. 빨리 경전이란 니까야[아함부] 계통을 말합니다. 이 대사파 계통의 불교가 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지로 전파됨으로서 남방불교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미얀마에서 5·6차 결집이 있었습니다. 즉 쌍윳따(잡아함)·맛지마(중아함)·디가(장아함)·앙굿따라(증일아함)·쿳다카니까야 등입니다.

[비평] 한 사람이 쓴 글인데 같은 페이지에서 ‘목갈리풋타 티샤’라는 영어식 발음과 빨리(Pāli), 쌍윳따, 앙굿따라 등 빨리(Pāli) 발음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자기가 맡은 부분에서도 발음이 통일되어 있지 않는데, 다섯 사람 중에서 다른 사람의 집필에 통일되지 않은 것은 문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2010년 교육원에서 나온 <부처님 생애>에서는 지명이나 사람이름이나 경전이름이 모두 빨리(Pāli) 발음으로 통일된 책을 편찬했는데 포교원은 지금도 지명과 인명 등을 영어 발음으로 된 책을 만들고 있다. 같은 종단에서 심지어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포교원과 교육원이 이렇게 다르게 책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종단이 얼마나 소통이 안 되는 집단인가를 증명한다.

191p
“첫째, 부처님!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계율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부처님!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저보다 선배인 어른들께 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고 공경하겠습니다. 셋째, 부처님!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중생들에게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겠습니다…….”

[비평] ‘승만부인의 서원’은 보살행편 386p에도 등장한다. 이렇게 같은 경전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서로 감수를 보지 않은 탓일 것이다.

196p
“석가부처님에 대해서 제자들은 스승의 능력을 점차로 보다 뛰어나고 위대한 존재로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십호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다시 여래만이 갖춘 능력을 18불공법不共法으로 묘사합니다.”

[비평] 여래십호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학자들의 의견일 뿐,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뒤에 204p에서는 목련존자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사리뿟다 존자가 중생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끌었던 능력을 설명한다.

198p
“이 전도선언은 부처님께서 마가다에서 21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제자들을 각지로 보내면서 격려하신 설법내용입니다.”

[비평] 전도선언은 부처님이 까시 녹야원에서 61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제자들을 각지로 보내면서 격려하신 설법내용이다.

200p
“부처님은 인간이란 존재를 각자의 근기에 따라 분석하셨습니다. 최하의 근기를 위해서 요소론적 관점에서 설명한 십팔계十八界는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해서 이루어진 인식된 내용의 육식六識입니다. 다음에 중간의 근기를 위해서 인식론적 관점에서 정립한 인식의 주체인 내육처는 육근六根으로 보는 것(眼), 듣는 것(耳), 냄새 맡는 것(鼻), 맛보는 것(舌),감촉하는 것(身), 의식하는 것(意)이고, 인식의 대상인 외육처는 보이는 것들인 형색(色), 들리는 것들인 소리(聲), 맡아지는 것들인 냄새(香), 맛보아지는 것들인 맛(味), 감촉되어지는 것들인 감촉(觸), 모든 사유의 대상들인 의식대상(法) 등입니다. 특히 상근기를 위해서 구성론적 입장에서 설명한 인간을 오온五蘊으로 분류하여 물질적인 것들의 총체인 형색(色), 정신적인 것들의 총체인 느낌(受), 개념적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분별적 인식과 의식(識) 등 다섯 가지 구성요소로 분석한 것은 당시까지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비평] 부처님이 하근기에게는 십팔계十八界를, 중근기에게는 내육처와 외육처를, 상근기에게는 오온을 설했다는 설명은 근거가 없다. 이렇게 오온, 12처, 18계 등의 기본교리를 설명하면서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로 배대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공연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적인 것으로 만든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쓰는 비문(非文)이 많은 책을 포교원에서 내면서 과연 감수 작업을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205p
“그 가운데 가장 손쉬운 방편이 부정적 십상十想에서 긍정적인 십념十念으로의 전환입니다.”

[비평] 부정적 십상十想과 긍정적인 십념十念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다. 과감하다.

208p
“이것이 바로 최초의 녹야원 설법인 연기법과 사제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연기의 진리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면 부처이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지만 본질에서는 바로 진여이며 법신이라는 자각입니다.”

[비평] ‘초전법륜경’이나 무아경’을 읽고 어떻게 우리가 본질에서는 바로 진여이며 법신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그러라고 ‘초전법륜경’이나 ‘무아경’을 설했다는 말인가?

209p
“어리석[愚癡]어서 올바른 이치에 밝지 못한 이가 닦는 인연관因緣觀인 12연기를 수행하여 벗어나고, 자기 자신의 몸에 집착하여 유신견有身見에 사로잡힌 이가 닦는 계분별관界分別觀인 까시나(kasina) 또는 궁극에 법계일상法界一相의 무상無相을 요해하는 관법인 염불관念佛觀을 닦습니다.”

[비평] “계분별관인 까시나”라는 설명도 잘못되었고 “법계일상의 무상을 요해하는 관법인 염불관”이라는 말도 잘못되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까시나도 모르고 염불도 모르는 사람이다.

209p
다시 말해서 주관적으로 탐욕(貪)·성냄(瞋)·어리석음(癡)·교만(慢)·의심(疑)과 악견惡見인 유신견有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계금취견戒禁取見·견취견見取見 등의 무상無常한 근본번뇌에 집착하고, 객관적으로 이 몸은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이 인연화합因緣和合한 부정不淨한 몸에 휘둘리는 산란함에 대처하는 오정심관五停心觀을 수행합니다.

[비평] 전체적인 문장이 이해가 어렵다. 이 책을 보는 것은 일반불자들인데 이렇게 설명하면 누가 이해하겠으며 염불을 설명하는 장에서 이런 말이 왜 필요한가?

210p
이러한 사제 16행상行相을 감연감행(減緣減行)하는 수행을 통해서 88사使를 제거하여 견도위見道位에 오르고, 그런 다음에 다시 사제 32행상을 닦아 10사使를 제거하여 수도위修道位에 올라 사선팔정四禪八定과 멸진정滅盡定을 수행하여 구경에 무학위無學位를 체득하여 아라한을 체득합니다. 이러한 수행은 아주 전문적이어서 일반 불자가 접근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내용입니다. 따라서 일반 불자가 신행하던 불탑신앙과 결부한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 요청되었습니다.“

[비평] 88사使와 10사使가 무엇인지 설명하지도 않고 88사使를 제거하여 견도위見道位에 오르고, 10사使를 제거하여 수도위修道位에 오른다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설명은 전문적이어서 일반 불자가 접근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라고 한다. 부파불교 교학이 어려워서 수행하기 쉬운 염불이 나왔다고 설명하려는 뜻은 이해하겠으나 염불을 설명하는 장에서 이렇게 장황하게 주석까지 달아가며 오위(五位)를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213p
“초기 불교에서는 개인의 해탈과 열반을 간구懇求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더불어 조화롭게 잘 사는 방법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육바라밀입니다.”

[비평] 대승불교를 더불어 조화롭게 잘 사는 방법이라고 설명하는 게 적절한가? 8정도를 수행하는 것은 조화롭지 않은가?

215p
“이러한 염불수행의 대상이 바로 현재의 부처님인 아미타불입니다. 말하자면 과거 7불과 미래의 미륵불보다 현재의 아미타불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비평] 현재의 부처님이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현재의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란 말은 들었어도 현재의 부처님이 아미타불이라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아미타불만 현재의 부처님이라면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나?

226p
개인의 소망을 빠르게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법신불의 화현인 ‘화엄성중華嚴聖衆’, 우리의 재래신앙의 기초이며 조상신인 ‘산왕대신山王大神’, 해안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재래신앙인 ‘용왕대신龍王大神’과 부엌에서 모시는 ‘조왕대신竈王大神’ 등 호법선신들을 부르기도 합니다. 유의해야 할 점은 각자 자신의 성향과 상황에 적합한 불보살님과 신장님들을 선택해서 염불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평] ‘산왕대신山王大神’과 ‘용왕대신龍王大神’과 ‘조왕대신竈王大神’을 부르는 것은 염(念)산신, 염(念)조왕신이 아닌가? 이것을 다 염불(念佛)이라 할수 있나?

227p
“믿음과 신념의 단계를 거쳐 확신하는 법문을 듣고서 믿는 문신聞信(śraddha)과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믿는 정신淨信(prasāda), 믿음을 통해서 해탈한 경지의 신해信解(adhimukti)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비평] 이렇게 믿음(삿다)와 정신(빠사다)와 확신(아디무띠)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자의적이다.

229p
“비록 본질에서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경계에서 벌어지는 한계상황을 인정하고 겸허하고 절실하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시작일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도 종교로서 기능은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불보살님을 신봉하는 불자가 불보살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결코 기복을 도외시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교만에 빠져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감에 행위가 모여서 공덕이 되고 공덕이 모여서 복덕이 됩니다. 사람에게 복이 없으면 살아가는 과정에서 제대로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비평]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앙을 불교에도 적응하면 불교의 특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덕과 복덕이 무엇이 다르기에 행위가 모여서 공덕이 되고 공덕이 모여서 복덕이 된다고 하는가? ‘보시의 분석 경’(M142)이나 ‘웰라마 경’(A9:20)을 설명하면서 불교의 기복이란 작복이란 것을 설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230p
“따라서 우리 각자의 자력은 우주 분에 1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력이 없는 타력은 무용지물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우주로 소통하는 생명의 실상을 자기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명의 에너지가 바로 불보살의 지혜라는 태양의 생명 에너지로 무량한 생명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비평] ‘염불은 우주로 소통하는 생명의 실상을 자기화하는 것’이라는 말과 ‘불보살의 지혜라는 태양의 생명 에너지’는 무슨 말인가? 불보살의 지혜가 태양 에너지인가? 이렇게 자기 생각을 종단의 공적인 저작에 마구 발설해도 되는가?

233p
“우주 법계의 허공은 진여의 법신이 가득한 여래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본질은 본래 법신인 여래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이기 때문에 소통하는 도구는 바로 염불하는 소리와 상응할 때 내가 법신불이요, 법신불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본성이 염불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재작용性在作用하는 불성佛性의 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붓다의 삶과 우리의 삶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비평] 우주 법계의 허공은 진여의 법신이고 내가 법신불이면 그대로 완성이고 충만인 데 염불은 왜 필요하고 복덕은 왜 필요한가? 나는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이 잘못된 것임을 수차례 지적한 적이 있다. 이런 모순적인 사상을 종도들의 동의도 없이 포교원에 가져와서 포교운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241p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16관법 중에 관상觀想염불에 해당하는 관법은 모두 9가지로 아래와 같습니다.”

[비평] 7가지만 설명하고 있음

215p
“조각 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비평]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한’이라는 문장이 빠져있다. 전체적으로는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한 조각 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262p
“불교는 유일신이나 절대자 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오로지 위대한 스승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에 대한 가르침과 그것을 따르는 수행이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의 구원은 내가 나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으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존재인 “참나”가 상대적인 세계의 무명에 덮여 있는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비평] 이렇게 설명하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존재인 “참나”가 유일신이나 절대자와 무엇이 다른가?

262p
“불교는 쟁론을 벌이지 않습니다. 불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고, 나는 진리고 너는 진리가 아니라며 비교하고 분별하는 것 자체가 문제며 공(空)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가지가지의 이름과 모습은 보신과 화신으로, 따로 분별하여 실체화하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이름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모습은 달라도 진리는 하나입니다.”

[비평] 불교는 쟁론을 벌이지 않는다면 부파불교는 왜 탄생했고 대승불교는 왜 나왔는가? 모든 게 공(空)한 것이라서 종교가 다르더라도 진리는 하나라고 한다면 다른 종교인들이 동의 하겠는가?

262p
“혼란은 혼란스러움에서 옵니다. 쉽게 얘기해서 무명(無明)이 혼란을 빚습니다. 스스로가 어두운 까닭에 다가오는 모든 경계가 어둡게 되고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에 바른 견해가 서면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가르침은 저희만의 횃불을 들고 “나만이 진리다, 나를 따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일체중생의 가슴속에 본래 갖추고 있는 진리의 등불을 깨달아서 스스로 자각을 통해 지혜롭게 작용하게 합니다.“

[비평] ‘깔라마경’을 인용하고서는 혼란의 원인은 무명(無明)이란다. 12연기를 설명할 때는 무명이 원인이라고 말해야겠지만 ‘깔라마경’을 설명할 때는 다르게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깔라마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264p
사람뿐 아니라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 육도(六道)의 온갖 중생이나 흙, 돌 같은 무정물(無情物)까지도 모두 불교를 떠날 수 없습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根源)을 밝혀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 곧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비평]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 불교'라는 말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일체중생이 불교를 떠날수 없다’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비문(非文)을 남발하면 안 된다.

262p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지렁이에게도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습니다. 유정 생명체뿐만 아니라 무정물도 알고 보면 또 다른 측면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스스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평] 정말 알고하는 소리이고 체험하고 하는 소리인가? 이런 말은 개인 일기장에나 적어두는 것이 좋다.

269p
[질문]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완전한 행복]과 해탈[완전한 자유]의 의미를 잘 이해하셨나요?” [토의] “우리가 바라는 열반과 해탈은 지금 생활 속에서 실현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아야 불교는 살아있는 종교로써 그 가치가 주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불교인으로서 바라는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비평] 열반[완전한 행복]과 해탈[완전한 자유]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잘 이해 하셨나요? 라고 묻는데 제대로 설명이나 하고 묻는 건가? ‘열반과 해탈을 지금 생활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루하루 생활해야 할까요? 라고 물어야 할 것을 ‘각자 불교인으로서 바라는 모습이 있을 테니 말해보라’는 주문은 문장이 어색하다. 각자 바라는 모습이라니….

270p
“부처님이 그 마음이 얼마나 바빴으면 태어나자마자 붉은 맨몸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한 손은 땅을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치셨겠어요. 부처님이 전생에 많이 닦았지만 그때는 깨닫기 전이니까 알고 보면 중생이었습니다. 우리하고 똑같았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나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나 홀로 존귀하다’는 것은 진리를 말합니다.”

[비평]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친 것이 마음이 바빠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마음이 무척 바쁘셨구나! 이런 말은 자신의 절에 있는 신도들에게나 해야지 왜 종단본 출판물에서 하고 있나?

283p
“‘부처님 자식이니까 부처님이 알아서 해야지. 저렇게 바깥으로 달아나 돌아다니는 것도 당신이 했으니까 제자리로 갖다 놓는 것도 당신이 해야지 내가 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맡긴다면 누가 변화를 시키는 것일까요? 자성인 부처가 하는 것입니다.”

[비평] 참선수행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적당한가? ‘자성부처에게 다 맡기라’고 하는 말이 경전과 어록의 어디에 나오는 가르침인가?

297p
[토의]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수행체계가 잘 정리 정돈되어 수행하기 쉽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참선은 수행에 대한 논리적 체계가 없을뿐더러 근거가 부족하여 현대인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각자의 의견을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비평]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수행체계를 설명하지도 않고 오직 ‘자성부처에게 맡기라’는 설명만 해 놓고는 이렇게 각 수행법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어 보라고 주문한다.

333p
“하지만 가능하면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천 육백년 이상 전해져 내려 온 경전 언어인 빠알리어 원어로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아홉 가지 부처님의 덕목을 그 구절대로 모두 다 독송하거나 마음속으로 외워도 좋고, 마음에 드는 어느 한 가지나 두 가지 등의 덕목만 계속 독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하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비평] 보살행을 집필한 분은 다른 집필자들과 다르게 삼보에 대한 예경과 ‘자애경’(346p) 등을 빨리어로 독송하도록 권유한다.

333p
〈우바새 위사카의 서원〉 “세존이시여, 저는 살아 있는 한 승가에 우기雨期 옷을 보시하고, 이곳으로 오는 스님들께 음식을 보시하고, 가시는 스님들께 음식을 보시하고, 병든 스님들께 음식을 보시하고, 간병하는 스님들께 음식을 보시하고, 아픈 스님들께 약을 보시하고, 상시의 죽을 보시하고, 비구니 승가에 목욕옷을 보시하기를 원합니다.”

[비평] 위사카는 여성이므로 <우바이 위사카의 서원>이다.

333p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비평] 여기 편집하는 분은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대신에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삼귀의가 사람마다 다르다.

515p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숫타니파타’ 소품

[비평] 이 책의 부록으로 23개의 독송용 경이 실려 있다. 그런데 경을 인용하면서 어떤 경은 (상윳따 니까야. S42:6) , (숫따니빠따Sn.2:4)라고 정확히 출처를 표시하고 어떤 경은 (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숫타니파타 소품)등으로 부정확하게 출처를 표시하고 있다. 이런 것 하나도 통일되어 있지 않다.

3. 나가는 말

이 책은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위하여 계율, 간경, 염불, 참선, 보살행이라는 5가지 주제에 대하여 다섯 사람이 집필하였고 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자유로운 글쓰기를 허락한 듯 하다.

건강한 사회 만들기 위해서 부적절하고 악의적인 댓글 달지 않기, 독거노인 말벗 해주기 등 다양한 제안들을 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연소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을 소개하기도 하고 탄소중립에 대한 논의도 빼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단에서 출판하는 책이라면 종도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제작되어야 한다.

이 책은 용어통일도 되어있지 않고 사상의 이질성이 있는 경과 논들이 마구 인용되고 있다. 어떤 집필자는 한문경전을 주로 인용하고 어떤 이는 초기경전을 중시하고 어떤 이는 개인적인 체험과 의견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이 책을 집필한 다섯 사람은 적어도 교차 감수를 하면서 사상통일과 용어통일을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책을 출판한 포교원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처음에 촘촘히 교정을 보다가 중간이후 부터는 대충대충 넘어가서 겨우 50여개의 비평에 머물고 말았다. 꼼꼼히 보자면 교정할 부분이 백 군데는 넘을 것이다. 종단의 포교를 담당하는 인재가 모인 포교원에서 이렇게 허술한 책을 내는 것은 종도들을 기만하는 것이고 불교를 훼손하는 것이다. 종도들에게 널리 묻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우리는 가르치겠다. 너희는 배워라”라는 권위적인 마음과 꼰대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 더 신중하게 더 정확하게 더 친절하게 책을 만들지 못하는가? 이미 지적한 <불교성전>이나 <불교입문>에 대한 지적을 받고도 침묵만 하고 있는 그들은 과연 부처님의 제자들인가?

종단과 포교원은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집단지성을 이용하는 책을 만들기 바란다. 이렇게 부실한 책을 만든 것은 포교원장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포교원장을 추천한 총무원장의 책임이 크고, 그런 총무원장을 선출한 종회의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들이나 나나 같은 부처님 제자들인데 우리가 다 같이 존경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개적인 지적을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개선의 노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조계종의 풍경이다. _()_

허정 스님/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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