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4. 2005년 고려대장경 교류사업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4. 2005년 고려대장경 교류사업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4.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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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북조선을 잇다”

대장경은 45년에 걸친 붓다의 가르침을 모아 엮은 것이다. 교리(經)와 계율(律)과 이것을 해석(論)한 것을 한 광주리에 담은 뜻으로 트리피타카(Tri-Pitaka, 三藏)라고 한다. 경·율·논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것을 말하는 대장경은 기원전 5세기 붓다의 입멸 직후에 마가다국 왕사성 칠엽굴에서 처음 결집한 다음, 기원전 80년 스리랑카 알루비하라 석굴사원에서 열린 제4차 결집 때, 처음 문자(Pali語)로 기록됐다.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보존·전승하기 위해 개최한 대중집회인 결집에서 제자들이 모여서 들었던 가르침을 함께 읊어 내는 합송으로 붓다의 말씀을 정리했다. 붓다의 말이라 성전어(聖典語)로 불리는 팔리어로 기록한 것은 팔리대장경, 한자로 번역하여 담은 것은 한역대장경, 티베트에서 만든 것은 티벳대장경이다. 또는 국가와 왕조의 연호를 딴 거란대장경, 금나라 조성장 등과 고려에서 만든 대장경이 전한다.

‘고려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종의 한역(漢譯) 대장경을 일컫는다. 조선왕조에서도 만들었다면 ‘조선대장경’이 되는 것과 같다. 나무 판목에 처음 새겼다고 하여 《초조대장경》(일명 진병대장경)이며, 다시 새겼다고 하여 《재조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이라 일컫는다. 불경 주석서로 대각국사 의천의 주도로 만든 《제종교장》(일명 속장경)도 고려의 대장경이다.

중국은 새 왕조가 등극할 때마다 백성들의 대통합 차원에서 대장경을 조성했다. 선진국의 기준이 된 대장경 조성은 송나라가 983년에 완성한 《개보칙판대장경》(일명 촉판대장경)이 처음이고, 1011년에 처음 판각한 고려 《초조대장경》은 세계 랭킹 2위의 기록이다. 3위는 거란대장경인데, 그토록 대장경 조성을 염원했던 일본(倭)은 완료하지 못하고, 1934년에 활자판인 《대정신수대장경》을 최초로 완성했다. 디지털 대장경은 1996년 12월 한국 고려대장경연구소가 ‘팔만대장경 CD롬’을 최초로 만들어 세계에 공포했다.

세계 인쇄매체의 혁신을 일으킨 《초조대장경》 판각은 1455년 독일 출신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보다 444년이 빠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거란 침략 때에 만든 《초조대장경》은 1011년 2월 보름, 《제종교장》은 1101년 10월 5일, 몽고의 침략 때 만든 《팔만대장경》은 1251년 9월 25일이 탄생일이다. 음력 기준으로 <초조본>은 충북 청주 행궁에서 판각 발원한 날로, <교장본>은 개성 총지사에서 대각국사 의천이 열반한 날이며, <재조본>은 강화도 서문 밖 판당에서 판각 완성을 기념한 날이 된다.

여·몽 전쟁으로 개경에 있던 <초조본>과 <교장본>은 1232년 모두 불에 타 버렸지만, 대몽항쟁을 위한 대단결의 방책으로 <재조본>을 다시 조성해 해인사에 봉안하면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유국이 됐다. 남측에는 경남 해인사 장경각에 목판이 현존하고 강원도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인쇄본 전량이, 북측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과 묘향산 팔만대장경보존고에 해인사판 《재조대장경》의 인쇄본이 보존되어 있다.

남북 공통의 유산으로 세계사적 가치를 지닌 고려대장경에 관한 교류는 2005년에 본격화됐다. 불교 경전이 역사·학술적 차원에서 처음 다뤄지면서 고려와 북조선을 새로 잇는 연결고리가 됐다. 그때 남북한 만남의 현장과 교류 주제들을 살펴본다.

평북 향산군 묘향산 력사박물관 내 팔만대장경보존고의 봄. / 묘향산, 조선화보사(2001년).





평북 묘향산 팔만대장경보존고 서고 대장경류 / 출처=KBS역사스페셜(2001.10.13.)
평북 향산군 묘향산 력사박물관 내 팔만대장경보존고의 봄. / 묘향산, 조선화보사(2001년).
평북 묘향산 팔만대장경보존고 서고 대장경류 / 출처=KBS역사스페셜(2001.10.13.)
평북 묘향산 팔만대장경보존고 서고 대장경류 / 출처=KBS역사스페셜(2001.10.13.)

북조선의 대장경프로젝트

1945년 8·15 해방 후, 북측에 현존하는 대장경류의 경전은 6·25 전쟁 때 북측으로 유출되었다는 소문과 1592년 음력 4월 13일에 발발해 치른 7년 전쟁인 조일전쟁(壬辰亂) 때 대장경 인쇄본이 묘향산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지금, ‘묘향산 력사박물관’(일명 보현사) 팔만대장경보존고에 보관된 대장경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7년에 인경(印經, 판본을 찍은 경전)된 두 질 중의 하나이다. 하나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만주국 황제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가 현재까지 그 행방을 알 수 없으며, 다른 하나가 평안도 영변 보현사에 봉안됐다는 그것이다.”

북측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1990년 4월 발간한 《팔만대장경》 <해제본> 서문에도 “이 대장경은 전쟁 당시에 묘향산 금강굴에 보관하였다가 1988년 5월 완공한 팔만대장경보존고에 다시 옮긴 것이다.”라고 밝혔다. 묘향산 보현사 경내에 자리한 팔만대장경보존고에 보관된 현황을 보면 경전 3,884권과 율전 151권, 논서 2,599권 그리고 전기와 기행문, 개인이 저술한 불서 등 159권으로 총 6,793권의 경서가 있다. 또 불상, 목경판 등 다수의 유물과 전적 문헌들이 함께 소장돼 있다.

북측의 대장경 봉인 해제와 연구는 김일성 주석이 1947년 5월 묘향산 력사박물관 현지 지도에서 “팔만대장경과 목판 활자는 우리나라 인쇄기술의 발전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국보입니다.”라는 영구 보존에 대한 지침으로 내린 문구가 팔만대장경보존고의 서고 정면에 붙어 있다. 1978년 8월 다시 보현사를 방문해서 “팔만대장경이 옛날의 불교 경전이라고 하여 번역해 놓지 않으면 지금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 힘들고, 그렇게 되면 거기에 담긴 뜻은 물론 민족문화유산도 잘 모르고 지낼 수 있다. 번역 해제하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라는 교시에 따라 본격화됐다.

또한 “팔만대장경을 해제하자면 큰 학자 연구집단이 있어야 한다. 빠른 시일 안에 학자집단을 동원하여 번역 해제하도록 대책을 세우라. 많은 참고 도서들이 요구되겠으므로 우리나라에 없는 것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라도 구해 와야 한다.”는 대책까지 마련해 주었다는 현지 교시를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가 1995년에 출판한 《태양의 따사로운 품》 등 몇 문헌에서 소개했다. 그 후 1984년 6월, 묘향산 보현사에 “팔만대장경보존고가 건립되면서 이때 팔만대장경 번역작업도 함께 시작했다.”라고 《평양방송》에서 보도한 바 있다.

1983년부터 시작한 《팔만대장경》 번역사업은 조선사회과학원 산하 민족고전연구소 주관으로 1987년 4월까지 5년에 걸쳐 해인사판 팔만대장경과 동일한 묘향산 보현사본 대장경류의 번역 해제로써 전 25책의 《팔만대장경》 <해제본>을 출간했다. 당시 50질로 한정 출판했다가 1990년 4월을 기해 “해외 등 수요자들의 요구와 사회적 관심을 고려하여 편의상 25책의 내용을 그대로 15책을 묶어서 재판하게 되었다.”는 《팔만대장경》 <해제본>의 발간사에서와 같이 불교와 관련한 출판물이 거의 없던 현실을 감안할 때 팔만대장경의 완역(1989년 7월)과 출간은 이례적인 평가와 세계 사학계의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조선사회과학원(원장 태형철)은 1937년에 찍어 낸 해인사판본을 묘향산에 보관하던 대장경 판본의 주요 내용을 발췌·번역한 《팔만대장경》 <해제본> 15권(87년)과 《팔만대장경》 <선역본(選譯本)> 17권(93년)을 각기 발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제본은 경전의 원뜻과 사상을 담는데 충실한 완역적 의미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경(經)의 제목과 유통에 대한 해설 그리고 경전의 중요한 부분을 선별하여 엮은 것으로써 《평양방송》에서도 1987년 5월 “원전에 있는 대로 요약하여 통속적으로 해제했다.”라고 보도했다. 국내 학계와 불교계에서도 “완역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는 대장경 번역본이다. 경의 제목과 유통에 대한 해설, 경전의 중요한 대목을 가려 뽑아 정리한 해제집”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해제본의 구성을 살펴보면, 1권에서 7권까지는 대승경전, 8권에서 10권은 율장과 논장, 11권에서 18권까지는 소승경전, 19권에서 24권까지는 불교의 역사와 자료, 25권은 한국 고승의 저술을 포함한 내용으로 편찬되었다. 한편, 1987년 조선사회과학원에서 전 25책으로 출간한 《팔만대장경》 <해제본>은 1991년 국내에서도 처음 소개되었고, 1994년부터는 ‘91년판 해제본’ 전 15책이 유통, 무분별하게 판매되기도 했다.

북측의 대장경 프로젝트는 1991년에 《조선왕조실록》(400권)을 한글 번역한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주도적으로 맡았다. 당시 번역작업에는 주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등 어문학, 한문 등 문헌학, 교리 등 역사학 등 번역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민족고전연구소의 40~50대 학자 40여 명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 당시 민족고전연구소 소장 홍기문은 근대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 아들로서 1992년 7월 사망하기까지 《팔만대장경》 번역과 해제 작업을 총괄했다. 1993년부터 김승필, 최태권 등이 민족고전연구소의 소장직을 잇달아 맡았다.

그리고 대장경 번역사업에는 1938년경 일본 교토 임제대학(花園大學, 현재의 하나조노대학)에서 수학하고, 1993년 8월에 입적한 조불련의 법등 홍화두 고문이 직접 역경(譯經)과 감수에 참여했다. 또 1997년 4월 남측으로 망명해 2010년 10월 10일 사망한 황장엽 전 로동당 비서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주체사상연구소장·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일 때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측이 왕조실록과 대장경 등 번역을 단기간에 추진할 수 있던 배경에는 1946년 개교 당시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 사학과·문학과·교육학과를 두었고, 1949년 9월에 역사학부·조선어문학부 등을 다시 확대 개편했으며, 특히 1956년 8월에는 어문학부 내에 한문학과를 신설하고, 한문학 강좌를 독립적으로 개설 운영할 만큼 학술적으로나 인문학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초부터 국내외 안팎으로 《팔만대장경》 <해제본>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던 가운데, 1994년에 전 15책의 해제본 유통과 그해 2월 1일 《평양방송》에서 ‘저작권침해를 비난하는 내용의 항의문’을 발표하는 등 저작권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6년 12월에 처음 출시한 ‘고려대장경 CD’가 북측에 알려지면서 조선사회과학원은 1997년 9월 20일을 기해 남측 고려대장경연구소에 남북공동 대장경 번역사업을 전격 제의했다. 또 1999년 9월 조선사회과학원에서 ‘고려대장경 번역사업’을 다시 제의하고,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도 1999년 9월에 가칭 ‘우리말 통일대장경’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된다. 특히 2001년 8월 조선사회과학원은 2002년도 사회과학원의 사업으로 ‘고려대장경 번역사업’을 선정, 사업지원을 요청했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2001년 9월 북측 조선사회과학원의 협조를 받아 《팔만대장경》 <선역본> 17권의 영인본을 국내에서 출간하면서 남북간 대장경 교류사업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사진 3>

[북측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연구사들이 번역한 ‘팔만대장경 선역본’ 친필원고(2002.3.) 사진 : 고려대장경연구소 제공]

사진 4>

[팔만대장경 번역에 관한 국제학술회의(2005.10.18. 중국 선양瀋陽 글로리아플라자호텔). 사진 : 고려대장경연구소 제공]

대장경, 남북공동으로 열다

1392년 고려 멸망과 분단 후, 약 600년 만에 남북 대장경 교류를 시작했다.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와 남측 고려대장경연구소는 2005년 10월 18~19일 중국 선양 글로리아플라자호텔(凱萊大酒店)에서 ‘《팔만대장경》 번역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처음 가졌다.

그 과정은 북측 조선사회과학원이 1997년 9월, 남측 고려대장경연구소에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작업’의 남북공동 추진 및 고문헌 자료의 전산화 협력 제의로 시작됐다. 또 조선사회과학원에서 1993년 출간한 《팔만대장경》 <선역본> 17권을 고려대장경연구소가 2001년 9월 영인본을 남측에서 재출간하면서 교류의 물꼬를 열고, 2005년 9월 중순, 조계종 민추본과 함께 방북하여 교류의 신뢰를 쌓았다.

특히 2002년 2월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중국 심양의 고려민족문화연구원(원장 전정환)과 ‘선역본 대상 남북한 불교용어 비교 추출작업’에 관한 용역사업을 맺고, 그해 7월 완료했다. 같은 해 5월 10일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소장 김승필)와 중국 고려민족문화연구원은 그해 2월 20일 북측과 체결한 합의서에 따라 ‘《팔만대장경》 조선어 전문번역과 출판’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고려대장경연구소는 그해 8월과 12월에 대장경 남북번역 용례 및 통일(안)을 완료하며 교류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리고 2003년 3월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소장 최태권)에서 집필한 《팔만대장경》 번역 원고(300자 원고의 15,303매)를 전달받아 국내에 첫 반입을 했다.

그로부터 2004년 10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북측 민족고전연구소에 학술회의 개최를 제안하고, 2005년 10월 6일 조선사회과학원 대외사업처(처장 곽선욱)은 10월 17~19일 중국 심양에서 ‘팔만대장경 번역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개최를 제의했다.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 최태권 소장, 조선사회과학원 과학지도국 한기범 부원, 민족고전연구소 김성권 부원, 곽선욱 조선사회과학원 대외사업처장 10명과 남측 고려대장경연구소의 허남진, 허인섭, 이규갑 교수 등 6명과 전정환 중국 고려민족문화연구원장 등 2명이 참가했다.

이때 학술회의는 ‘고려대장경의 남북 번역용례 비교 및 표준화 방안모색’을 대주제로 북측 민족고전연구소에서 ① 《팔만대장경》의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에 대한 간단한 고찰(김영수 실장), ② 고역경의 몇 가지 특성(박영건 연구사), ③ 원문에 대한 정확한 리해는 번역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 요구(박철준 연구사), ④ 《팔만대장경》의 일부 구역경과 신역경의 특징(김형식 연구사), ⑤ 《팔만대장경》 번역에서 관습음의 합리적 처리문제(최경성 연구사), ⑥ 《팔만대장경》에 들어있는 다라니를 우리글로 음역하는 데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주병도 실장), ⑦ 《팔만대장경》 번역에서 허사 처리의 몇 가지 경험(박영건 연구사) 등 9가지 주제가 처음 발표됐다.

2005년 10월 18일에 열린 남북공동 대장경 학술회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제임스 W.P 캠벨의 《세계의 도서관》(2015년) 첫머리에도 소개된 해인사 장경판전의 《재조대장경》 내용이 세상 밖으로 나온 첫 만남이다. 이로부터 대장경은 남북교류의 익숙한 주제가 됐다. 11세기 대각국사 의천이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해와 달이 함께 나란히 걸리고, 귀신과 오묘함을 다투도록 해야 한다.”는 그 맥락과 맞닿아 있다.

# 다음 편은 ‘2005년 남북불교도 합동법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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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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