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0. 시간의 강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0. 시간의 강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5.10 1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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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누가 숨을 못 쉬게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어깨를 짖 누르지도 않는다
다만 공기가 무겁다
수영 할 때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 나가듯
공기가 소용돌이 친다
 

사람 하나 없는 방안
가득 찬 공기처럼
가득 찬 생각 알갱이들
사람 없는 방안
복잡한 도심 전철 안
멀어질수록 가까워진다.
 

#작가의 변
어릴 때 집은 작은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집이었다.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 사흘 갈이 밭도 논도 다 아버지가 반장을 하면서 개간한 땅들인데 할머니가 작은아버지에게 주었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도락쿠에 보따리를 몇 개 싣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아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사립문을 넘어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정착한 곳이 곡담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집 다섯 채가 마을과 동떨어진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돈 한 푼 없이 고향을 떠나와 남의 집 행랑채에서 그 집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며 머슴처럼 일해서 집을 마련하고 집 앞에 밭도 논도 마련한 아버지와 어머니. 하지만 사흘 갈이 밭을 두고 와서 남의 집살이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억울했던 엄마는 시어머니가 있는 집에 가서 기르던 소라도 끌고 오려고 했더니 시어머니가 구정 물을 끼얹으면서 소를 가져가는 것을 막았다고, 심지어 송아지도 있었는데 송아지를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이웃집 남자에게 비 오는 날 목을 조이고 구타를 당해서 놀란 누나는 서울에 병원에 입원하고 나도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 사건 충격을 받았고, 어린 나와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엄마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운 그 할머니가 집에 와서 우리 밥을 해 주었다. 두레박 샘물이기도 한 동네 우물에 물 길러 가서 동네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하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데 얘들은 이상해유,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어유.”

50년이 넘은, 어릴 적 기억 중에 철조망을 쳐 놓은 밭 가장자리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소리치며 야단치던 심 노인은 아버지 어머니가 머슴살이하던 집의 노인이었다. 그 집엔 자식이 없어서 재숙이네 가족이 양자를 왔다. 동네에 꼬마들이 많지 않으니 재숙이랑도 놀고 싶었지만 놀지 못하도록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절 골로 소풍 가서 보물 찾기 하는 데 다른 아이들은 정말 잘 찾는데 나만 한 장도 찾지 못했다. 나무 아래 나뭇잎 아래, 커다란 돌 아래서 잘도 찾았다. 4장을 찾은 재숙이가 울고 있는 나에게 보물 찾기 종이를 한 장 줬다. 엄마 대신 따라온 누나가 “이제 울지마” 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치고 있던 나는 그 후에도 뭘 찾는 것을 잘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날은 난생처음 사이다를 사줘서 사이다 한 병을 다 마시고 술에 취한 듯 불콰해지기도 했다.

조금씩 땅을 사 모으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누이의 병원비 때문에 땅을 팔고 누이의 트라우마 때문에 내가 나고 자란 정든 집에서 떠나야 했다. 60여 호 되는 큰 마을로 이사 온 후로도 밭과 논이 있는 곡담에 자주 갔다. 우리 집을 산 무당은 초가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밭일하는 어머니를 불러 떡도 주고 과일도 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심은 대추나무에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대추가 열리는 것을 담 밖에서 바라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없어지고 나의 기억 나의 시간들이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곳에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를 구타한 그 옆집 남자를 길거리에서 볼 때마다 죽이고 싶은 마음과 그가 태권도를 했다는 말이 동시에 기억이 나면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그 날 문지방에 아버지의 팔을 올려놓고 부러트린다고 하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무섭고, 자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웃 방에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분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맞고 있는 아버지의 비명과 그의 씩씩거리는 숨소리. 그런데 엄마도, 누나도 보이지 않았다. 옆엔 어린 동생이 자고 있었는데 잠이 깨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만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어느 시간이 되어 웅성거리는 동네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친지들도 오고 동네 사람들도 오고 경찰도 왔다 갔다. 학교를 갔다가 엄마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 엄마 목에 선명한 목 졸림 자리, 여기저기 타박상이 심한 아버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온 나. 고소했지만 청주지방법원에 지인이 있다는 옆집 남자는 그냥 흐지부지 풀려나서 나중에 동네 이장을 했다. 친지들도 세상에 이를 어째하고 걱정들을 했지만,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억울한 폭행 사건은 한 가족을 평생 힘들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은 흘러갔다.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 욕을 하며 구박하는 것을 보고 “그러면 되느냐”고 하니 말 달리듯 달려와 엄마를 쓰러뜨리고 목을 조였다고 한다. 전날 상갓집에서 술이 떡이 되어 자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비명에 비틀거리며 나오고 엄마는 빠져나가 이웃집에 이야기 하고, 아버지는 비 오는 날 텃밭에서 맞기 시작해서 방까지 도망을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본 장면과 연결된다.

머나먼 수십 년 전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에서 살아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 그곳에선 편하게 쉬고 계시지요. 어버이날과 사월 초파일이 며칠 남지 않은 만리타향 머나먼 이국땅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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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숨을 못 쉬게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어깨를 짖 누르지도 않는다
다만 공기가 무겁다
수영 할 때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 나가듯
공기가 소용돌이 친다
 

사람 하나 없는 방안
가득 찬 공기처럼
가득 찬 생각 알갱이들
사람 없는 방안
복잡한 도심 전철 안
멀어질수록 가까워진다.
 

#작가의 변
어릴 때 집은 작은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집이었다.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 사흘 갈이 밭도 논도 다 아버지가 반장을 하면서 개간한 땅들인데 할머니가 작은아버지에게 주었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도락쿠에 보따리를 몇 개 싣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아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사립문을 넘어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정착한 곳이 곡담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집 다섯 채가 마을과 동떨어진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돈 한 푼 없이 고향을 떠나와 남의 집 행랑채에서 그 집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며 머슴처럼 일해서 집을 마련하고 집 앞에 밭도 논도 마련한 아버지와 어머니. 하지만 사흘 갈이 밭을 두고 와서 남의 집살이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억울했던 엄마는 시어머니가 있는 집에 가서 기르던 소라도 끌고 오려고 했더니 시어머니가 구정 물을 끼얹으면서 소를 가져가는 것을 막았다고, 심지어 송아지도 있었는데 송아지를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이웃집 남자에게 비 오는 날 목을 조이고 구타를 당해서 놀란 누나는 서울에 병원에 입원하고 나도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 사건 충격을 받았고, 어린 나와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엄마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운 그 할머니가 집에 와서 우리 밥을 해 주었다. 두레박 샘물이기도 한 동네 우물에 물 길러 가서 동네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하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데 얘들은 이상해유,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어유.”

50년이 넘은, 어릴 적 기억 중에 철조망을 쳐 놓은 밭 가장자리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소리치며 야단치던 심 노인은 아버지 어머니가 머슴살이하던 집의 노인이었다. 그 집엔 자식이 없어서 재숙이네 가족이 양자를 왔다. 동네에 꼬마들이 많지 않으니 재숙이랑도 놀고 싶었지만 놀지 못하도록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절 골로 소풍 가서 보물 찾기 하는 데 다른 아이들은 정말 잘 찾는데 나만 한 장도 찾지 못했다. 나무 아래 나뭇잎 아래, 커다란 돌 아래서 잘도 찾았다. 4장을 찾은 재숙이가 울고 있는 나에게 보물 찾기 종이를 한 장 줬다. 엄마 대신 따라온 누나가 “이제 울지마” 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치고 있던 나는 그 후에도 뭘 찾는 것을 잘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날은 난생처음 사이다를 사줘서 사이다 한 병을 다 마시고 술에 취한 듯 불콰해지기도 했다.

조금씩 땅을 사 모으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누이의 병원비 때문에 땅을 팔고 누이의 트라우마 때문에 내가 나고 자란 정든 집에서 떠나야 했다. 60여 호 되는 큰 마을로 이사 온 후로도 밭과 논이 있는 곡담에 자주 갔다. 우리 집을 산 무당은 초가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밭일하는 어머니를 불러 떡도 주고 과일도 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심은 대추나무에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대추가 열리는 것을 담 밖에서 바라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없어지고 나의 기억 나의 시간들이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곳에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를 구타한 그 옆집 남자를 길거리에서 볼 때마다 죽이고 싶은 마음과 그가 태권도를 했다는 말이 동시에 기억이 나면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그 날 문지방에 아버지의 팔을 올려놓고 부러트린다고 하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무섭고, 자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웃 방에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분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맞고 있는 아버지의 비명과 그의 씩씩거리는 숨소리. 그런데 엄마도, 누나도 보이지 않았다. 옆엔 어린 동생이 자고 있었는데 잠이 깨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만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어느 시간이 되어 웅성거리는 동네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친지들도 오고 동네 사람들도 오고 경찰도 왔다 갔다. 학교를 갔다가 엄마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 엄마 목에 선명한 목 졸림 자리, 여기저기 타박상이 심한 아버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온 나. 고소했지만 청주지방법원에 지인이 있다는 옆집 남자는 그냥 흐지부지 풀려나서 나중에 동네 이장을 했다. 친지들도 세상에 이를 어째하고 걱정들을 했지만,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억울한 폭행 사건은 한 가족을 평생 힘들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은 흘러갔다.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 욕을 하며 구박하는 것을 보고 “그러면 되느냐”고 하니 말 달리듯 달려와 엄마를 쓰러뜨리고 목을 조였다고 한다. 전날 상갓집에서 술이 떡이 되어 자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비명에 비틀거리며 나오고 엄마는 빠져나가 이웃집에 이야기 하고, 아버지는 비 오는 날 텃밭에서 맞기 시작해서 방까지 도망을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본 장면과 연결된다.

머나먼 수십 년 전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에서 살아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 그곳에선 편하게 쉬고 계시지요. 어버이날과 사월 초파일이 며칠 남지 않은 만리타향 머나먼 이국땅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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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숨을 못 쉬게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다
누가 어깨를 짖 누르지도 않는다
다만 공기가 무겁다
수영 할 때 손가락 사이로 물이 빠져 나가듯
공기가 소용돌이 친다
 

사람 하나 없는 방안
가득 찬 공기처럼
가득 찬 생각 알갱이들
사람 없는 방안
복잡한 도심 전철 안
멀어질수록 가까워진다.
 

#작가의 변
어릴 때 집은 작은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집이었다.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 사흘 갈이 밭도 논도 다 아버지가 반장을 하면서 개간한 땅들인데 할머니가 작은아버지에게 주었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도락쿠에 보따리를 몇 개 싣고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아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사립문을 넘어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 정착한 곳이 곡담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집 다섯 채가 마을과 동떨어진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돈 한 푼 없이 고향을 떠나와 남의 집 행랑채에서 그 집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며 머슴처럼 일해서 집을 마련하고 집 앞에 밭도 논도 마련한 아버지와 어머니. 하지만 사흘 갈이 밭을 두고 와서 남의 집살이 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억울했던 엄마는 시어머니가 있는 집에 가서 기르던 소라도 끌고 오려고 했더니 시어머니가 구정 물을 끼얹으면서 소를 가져가는 것을 막았다고, 심지어 송아지도 있었는데 송아지를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이웃집 남자에게 비 오는 날 목을 조이고 구타를 당해서 놀란 누나는 서울에 병원에 입원하고 나도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 사건 충격을 받았고, 어린 나와 동생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엄마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운 그 할머니가 집에 와서 우리 밥을 해 주었다. 두레박 샘물이기도 한 동네 우물에 물 길러 가서 동네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하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애들은 안 그런데 얘들은 이상해유,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어유.”

50년이 넘은, 어릴 적 기억 중에 철조망을 쳐 놓은 밭 가장자리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소리치며 야단치던 심 노인은 아버지 어머니가 머슴살이하던 집의 노인이었다. 그 집엔 자식이 없어서 재숙이네 가족이 양자를 왔다. 동네에 꼬마들이 많지 않으니 재숙이랑도 놀고 싶었지만 놀지 못하도록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절 골로 소풍 가서 보물 찾기 하는 데 다른 아이들은 정말 잘 찾는데 나만 한 장도 찾지 못했다. 나무 아래 나뭇잎 아래, 커다란 돌 아래서 잘도 찾았다. 4장을 찾은 재숙이가 울고 있는 나에게 보물 찾기 종이를 한 장 줬다. 엄마 대신 따라온 누나가 “이제 울지마” 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치고 있던 나는 그 후에도 뭘 찾는 것을 잘못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날은 난생처음 사이다를 사줘서 사이다 한 병을 다 마시고 술에 취한 듯 불콰해지기도 했다.

조금씩 땅을 사 모으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누이의 병원비 때문에 땅을 팔고 누이의 트라우마 때문에 내가 나고 자란 정든 집에서 떠나야 했다. 60여 호 되는 큰 마을로 이사 온 후로도 밭과 논이 있는 곡담에 자주 갔다. 우리 집을 산 무당은 초가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밭일하는 어머니를 불러 떡도 주고 과일도 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심은 대추나무에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대추가 열리는 것을 담 밖에서 바라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없어지고 나의 기억 나의 시간들이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곳에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를 구타한 그 옆집 남자를 길거리에서 볼 때마다 죽이고 싶은 마음과 그가 태권도를 했다는 말이 동시에 기억이 나면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그 날 문지방에 아버지의 팔을 올려놓고 부러트린다고 하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무섭고, 자는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웃 방에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분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맞고 있는 아버지의 비명과 그의 씩씩거리는 숨소리. 그런데 엄마도, 누나도 보이지 않았다. 옆엔 어린 동생이 자고 있었는데 잠이 깨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만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어느 시간이 되어 웅성거리는 동네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친지들도 오고 동네 사람들도 오고 경찰도 왔다 갔다. 학교를 갔다가 엄마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 엄마 목에 선명한 목 졸림 자리, 여기저기 타박상이 심한 아버지,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다시 돌아온 나. 고소했지만 청주지방법원에 지인이 있다는 옆집 남자는 그냥 흐지부지 풀려나서 나중에 동네 이장을 했다. 친지들도 세상에 이를 어째하고 걱정들을 했지만,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억울한 폭행 사건은 한 가족을 평생 힘들게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은 흘러갔다.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자기 엄마에게 욕을 하며 구박하는 것을 보고 “그러면 되느냐”고 하니 말 달리듯 달려와 엄마를 쓰러뜨리고 목을 조였다고 한다. 전날 상갓집에서 술이 떡이 되어 자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비명에 비틀거리며 나오고 엄마는 빠져나가 이웃집에 이야기 하고, 아버지는 비 오는 날 텃밭에서 맞기 시작해서 방까지 도망을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본 장면과 연결된다.

머나먼 수십 년 전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에서 살아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 그곳에선 편하게 쉬고 계시지요. 어버이날과 사월 초파일이 며칠 남지 않은 만리타향 머나먼 이국땅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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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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