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6. 2006년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6. 2006년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2.05.1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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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백 년만의 귀환”

해방 전후, 1915년 9월 11일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묘를 시작으로 1918년 11월 15일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933년 9월 20일 경북 경주 불국사 사리탑에 이어 1966년 5월 27일 한일협정 부속 협정에 따라 강원도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등을 비롯한 반출문화재 1,326점이 반환됐다. 여기에는 우정국 유물인 미투리(草莘, 짚신) 2점(한 짝)이 포함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 후 1995년 12월 28일 서울 경복궁의 자선당 잔해가 반환됐고, 2005년 10월 20일에 함경도 북관대첩비, 2006년 7월 7일 일본 도쿄대학이 소장하던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47책, 2011년 12월 6일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던 한국도서 1,205책 등이 공식 반환됐다. 2016년 5월 3일 일본 궁내청 문고에 있던 《조선왕실의궤》 반환 등에 이르기까지 표면적으론 우리 정부의 노력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간에서의 역할이 더 컸다.

그중 남북한 공조 사업으로 결행된 국외 반출문화재의 반환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처음이다. 1965년 6월 22일 조인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韓日基本條約, 일명 한일협정)’에 의해 문화재 반환 청구권을 소멸한 남측과 달리 분단으로 인해 청구권이 아직 유효한 북측과 현안 대응적인 공조에 따른 첫 사례로 꼽힌다.

지금까지도 북관대첩비 반환은 민관이 협력하여 이룬 최초의 문화재 환수 사례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사실은 민간 특히, 한일 불교계가 헌신적인 노력으로 차린 ‘반환의 밥상’에 남측 정부는 숟가락을 든 꼴이었다. 그 빈틈을 엿본 일본 정부는 교묘하게 파고들어 ‘환수 절차’가 아닌 자율적 ‘반환’으로 자국의 이익대로 각색했다. 이런 일본의 외교 술책을 알았는지 몰랐던지 명예에만 눈멀었던 남측 정부와 대학의 유명 인사들은 만세만 불러댔다. 그다음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 반환의 역사적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일련의 과정에서 남측 정부 인사들이 한 것처럼 민간단체 대표를 맡았던 아무개도 자신이 다 한 일인 양 여기저기 자랑하고, 함께했던 이름 없는 동지들을 제외하며 배신하고 말았다.

북관대첩비의 북측 인도인수 과정에서도 ‘공조의 밥상’을 남측 정부의 아무개들은 아예 그 밥상을 들고 가서 자신들이 다 먹어버린 형국이었다. 그래도 북측에서는 불교계의 노력을 인정하고, 조선불교도련맹과 공조 사업으로 평가했다.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던 남측 정부에서는 그 사실이 조금이나마 부끄러웠던지 관련 행사에 불교계 인사들을 초청, 들러리로 세웠다. 환희와 소외감, 기쁨과 반감이 교차했던 그 날의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에 관한 뒷이야기와 남북불교 교류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2006.3.1.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사진=중앙일보(2006.3.2.)



백년 만의 북조선으로 귀환

1905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반출된 북관대첩비가 백 년 만에 되돌아왔다. 2005년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봉안, 추모하는 일본 도쿄 야스쿠니 진자(靖国神社) 이사회 결정에 이어서 그해 10월 12일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북관대첩비 인도 문서’ 서명을 통해 10월 20일 대한항공 화물기에 실려 국내로 반입됐다.

북관대첩비는 북관(오늘날의 함경도)에서 전쟁에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가 정식 이름인 비문 첫 줄에는 ‘유명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라 쓰여 있다. 1592년 7월부터 반년에 걸쳐 함경도 길주・명천・경성・림명・장평・단천・서천・백탑에서 전쟁의 신으로 불린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2만 명의 정예부대를 200여 명이 8전 8승으로 격퇴한 농포 정문부 의병장과 함경도 의병들의 공을 기린 전승 기념비다. 또 비문에는 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서 넘긴 국경인을 처형한 전말(顚末) 등이 적혀 있다.

전쟁 후, 백 년이 지난 1708년에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함경도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함북 길주군 림명면 림명리에 대첩비를 세웠다. 오늘날 함북 김책시 동북쪽의 학중면 림명리 봉화봉 중턱 림명 고갯마루에 있는 전승 기념비 터에 서 있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 화강석에 앞과 뒷면 1,500여 자를 새긴 대첩비의 비문은 1703년 최창대가 지었고, 두전(頭篆, 비의 머릿글)은 이조참의 윤덕준이 쓰고, 효능참봉 이명필이 비문을 썼다고 1986년 정태진이 기증해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비석 탁본과 노산 이은상이 전문을 국역한 자료(《군사》, 1981년)를 통해 알 수 있다.

7년 전쟁 때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한산대첩으로 승기를 잡고,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과 정문부 의병장 등이 왜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런 사실은 1905년 3월 31일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쇼스케 소장이 함경도에서 소문을 듣고, “이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라며 비석을 추적하여 함경도 길주 림명동에서 찾아내 머릿돌과 받침대를 제외한 몸체만을 뽑아 귀국하는 제2사단장 미요시 시게오미 중장에게 바쳐졌고, 1905년 10월 병참 수송선에 실려 히로시마로 이송됐다. 그 당시 가등청정의 원찰인 큐슈 구마모토현 혼묘지에서 그의 한을 달랜다는 목적으로 대첩비 보관을 신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러일전쟁의 전승국 일본은 북관대첩비를 청일전쟁의 전리품 및 전몰자 초상을 보관하던 히로시마 궁성의 진텐후(振天府)와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군사박물관 유슈칸(遊就館)에 전쟁 참고품 등을 진열하는 곳에 두었다가 그 후 천황에게 바치는 예식을 치른 다음, 1869년 메이지 천황(日王)의 명으로 건립한 야스쿠니 신사에 보내졌다. 그때부터 반환될 때까지 콘크리트 더미에 몸체를 박고, 커다란 머릿돌에 눌리다 못해 비석의 내용을 부정하는 안내판까지 설치한 형태로 야스쿠니 신사 뒤뜰에 자리했다.

북관대첩비는 1909년 일본 황실 유학생이던 조소앙(본명 趙鏞殷)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발견하고, 도쿄의 한인 유학생 잡지 《대한흥학보》(1909년 7월호)에 아호인 소해생(嘯海生)라는 이름으로 비석 발견 경위와 비문 전문, “누가 이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 큰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애통한 소회를 ‘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문’ 제목으로 게재하면서 그 소재가 처음 밝혀졌다. 그 후 비석을 찾아간 제2의 발견자는 익명의 이 씨다. 《동아일보》(1926.9.19.)에는 “9월 16일 이생(李生)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확인하고, 자세히 보려다가 일본 헌병에게 금지를 당했다. 비석 옆에 ‘대첩이라 하였지마는 그때 사실과는 전연 서로 다르니, 세인은 이 비문을 믿지 말라.’고 쓴 나무패가 서 있었다.” 또 “임명(臨溟)에 있던 비를 음취(陰取) 해다 야스쿠니에 갖다 놨기에 이를 널리 알리는 바이니, 모두 기억해두자.”라고 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언급조차 되지 않은 북관대첩비는 1978년 4월, 최서면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제3의 발견자다. 당시 《조선일보》(1978.4.12.)는 “북관대첩비가 74년 만에 발견되었다.”라며, 특종 보도로 국내에 처음 알렸다. 재일동포 사학자 최서면은 1978년 조소앙의 글을 처음 읽고, 야스쿠니 신사 비둘기 사육장 옆의 대첩비를 찾아내 박정희 정부에 통보했으며, 우리 정부와 정문부의 후손 해주정씨 종친회는 1979년 일본에 처음으로 북관대첩비 반환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반환 운동을 벌였던 일본 승려 가키누마 센신 일한불교복지협회장과 한국 측 회장인 초산 정토종 중앙문화원장은 2000년 4월 ‘북관대첩비 민족운동중앙회’를 결성하고, 또 2005년 1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양국인사 33인의 발기로 ‘북관대첩비 환국을 위한 범민족운동본부 발대식’을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남북 간 협의 조정과 정부 측 공식 요청이 필요하다는 의견서에 따라 2005년 3월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일한불교복지협의회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과 회동을 통해 북관대첩비의 북측 반환에 최종 합의하고, 그 합의문 채택 결과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통보하는 등의 조치가 따랐다.

그해 5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한 남북 문화재 당국 간 회담을 북측에 정식 제안하였고, 5월 20일 주한 일본대사관은 “남북 당국 간 합의 뒤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반환이 가능하다.”라는 회신을 했다. 6월 20일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관대첩비 반환에 대해 합의했다. 6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6월 28일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했다.

2005년 10월 3일 야스쿠니 신사 이사회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으며, 10월 9일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 팀에서 이전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10월 12일 대한민국과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 인도 문서에 서명했다. 10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고유제를 거행한 다음, 10월 20일 대한항공 화물기로 이운돼 국립중앙박물관 앞마당에서 환국 고유제를 지냈다. 10월 28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식 때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11월 17일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져 공식 제막식과 북관대첩비 맞이 국중대회인 ‘학연화대 빗돌맞이’를 가졌다.

2006년 2월 13일 남북 간에 북관대첩비 북한 환송에 관한 협의에서 3월 1일 개성을 거쳐 인도하기로 했다. 그해 2월 20일 북관대첩비 환송 고유제를 경복궁 뜰에서 개최하고, 3월 1일 북측으로 송환되어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4월 25일 경복궁 고궁박물관 뜰에도 북관대첩비 복제비가 세워져 전시됐다. 이로써 북관대첩비는 101년 만에 본래환처를 했다.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장면(2006.3.1.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좌측부터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 심상진 부위원장, 김석환 북측위원장, 김원웅 남측위원장, 초산 회장). 사진=오마이뉴스(2006.3.1.)





새로 복구된 북관대첩비각(2006.3.23. 함북 김책시 림명리). 사진=조선의 오늘(2006년 4월호)



함경도에 다시 서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이 “2006년 3월 23일 원 위치인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 2만여㎡ 보호구역 내에 세워졌다.”라고 보도하는 등 대첩비는 다시 함경도 땅에 섰다. 이날 복원 기념식에는 김석환 문화보존지도국 국장을 비롯해 북관대첩비되찾기대책위원회 상임부위원장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 리복일 김책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등 관계자들과 한복차림의 지역 여성과 인사들이 참여해 10여 분 동안 진행됐다. 또 이를 기념하는 120원짜리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귀환 축하행사를 가졌다.

북측의 국보유적 제193호로 지정돼 역사적 가치를 되찾은 북관대첩비의 비각 옆에는 표석과 안내 판석도 함께 세웠다. 2005년 11월 《조선중앙통신》은 함북 김책시 인민위원회가 복원할 때 쓴 비의 받침돌은 북관대첩비 현장(터)에서 동쪽으로 300여m 떨어진 언덕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건립 당시의 받침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데, 얕은 2단 높이로 정면에서 보면 큰 화살표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받침돌 위에 탑신을 세우고 얻은 머릿돌은 반환 후, 남측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새로 조각해 이운한 것을 올렸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부터 이고 있던 핍박의 역사인 1,000㎏ 잡석 머릿돌을 벗어던지고, 북관대첩비 조성 시기와 비슷한 전남 해남 명량대첩비(1688년)와 전남 강진 백련사사적비(1681년) 등의 머릿돌을 참고하여 화강암으로 복원한 지붕석이다.

이처럼 북관대첩비의 반환 과정은 남과 북이 하나의 역사로 서로 만나고 뜻을 통한 사건이었다. 그간 미온적이던 우리 정부와 달리 민간에서는 백 년 동안에 걸쳐 크게 다섯 차례의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1996년 조선왕조 황세손 이구의 환국 선물로 북관대첩비를 전달하자고 야스쿠니 신사 측과 교섭 사례에서도 일본 정부는 비의 현 소재지가 야스쿠니 신사라는 점을 들어 민간 소유 재산은 정부 권한 밖이라고 했고,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해야 한다면서 서로 책임을 회피했다. 그간 북측의 입장을 강조한 일본의 주장대로 2004년 11월 말, 심상진 조선불교도연맹 서기장은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자.”는 서한을 일한불교복지협회 초산 중앙문화원장에게 보내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들은 그해 12월 10일 금강산에서 만나 이와 관련한 실무 협의를 가졌다. 이어 2005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일한불교복지협회(대표 초산)와 조선불교도연맹이 대첩비 반환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하고, 같은 해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반환 합의가 체결되면서 완성됐다.

백 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는 한일 양국 승려들의 염원과 함께 북측 조불련이 창구 역할을 맡았고, 우리 정부를 통로하여 2006년 3월 1일 개성에서 인도식을 개최하고, 함북 김책시 림명리에 되돌려진 남북공조의 첫 사례이다.

그날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개성시 고려성균관 명륜당 마당에서 열린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은 대첩비를 맞이하는 북측 환영사와 떠나보내는 남측 환송사, 축사, 인도・인수 서명 순으로 진행됐다. 북관대첩비환수추진위원회(남측)와 북관대첩비되찾기대책위원회(북측)가 주관한 행사에는 반환사업에 큰 역할을 한 일한불교복지협회 초산 한국 측 회장과 해주정씨 문중 주요 인사・지원 조계종 사회부장 등 남측 관계자 144명과 김석환 위원장・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과 정서정 서기장・류인명 책임부원・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등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북측 김석환 위원장은 “북관대첩비를 찾아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초산 스님을 비롯한 남쪽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라면서 “이번 일은 일본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에 빼앗긴 문화재들을 되찾는 데 힘있게 나서자.”는 환영사를 했다. 남측 김원웅 국회의원의 환송사와 초산 회장의 축사에 이어 북측 김석환 위원장과 심상진 부위원장과 남측 김원웅 의원과 유홍준 문화재청장, 초산 회장이 함께 인도・인수서에 서명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단순히 문화재를 되찾았다는 것을 넘어 잃어버린 역사를 남북이 함께 찾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남북불교 교류사에서도 국외 문화유산 반환의 새로운 장을 열어낸 것으로, 지난 세기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 다음 편은 ‘2006년 광주 6.15민족대축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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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2006.3.1.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사진=중앙일보(2006.3.2.)

백년 만의 북조선으로 귀환

1905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반출된 북관대첩비가 백 년 만에 되돌아왔다. 2005년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봉안, 추모하는 일본 도쿄 야스쿠니 진자(靖国神社) 이사회 결정에 이어서 그해 10월 12일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북관대첩비 인도 문서’ 서명을 통해 10월 20일 대한항공 화물기에 실려 국내로 반입됐다.

북관대첩비는 북관(오늘날의 함경도)에서 전쟁에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가 정식 이름인 비문 첫 줄에는 ‘유명조선국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라 쓰여 있다. 1592년 7월부터 반년에 걸쳐 함경도 길주・명천・경성・림명・장평・단천・서천・백탑에서 전쟁의 신으로 불린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2만 명의 정예부대를 200여 명이 8전 8승으로 격퇴한 농포 정문부 의병장과 함경도 의병들의 공을 기린 전승 기념비다. 또 비문에는 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서 넘긴 국경인을 처형한 전말(顚末) 등이 적혀 있다.

전쟁 후, 백 년이 지난 1708년에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가 함경도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함북 길주군 림명면 림명리에 대첩비를 세웠다. 오늘날 함북 김책시 동북쪽의 학중면 림명리 봉화봉 중턱 림명 고갯마루에 있는 전승 기념비 터에 서 있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 화강석에 앞과 뒷면 1,500여 자를 새긴 대첩비의 비문은 1703년 최창대가 지었고, 두전(頭篆, 비의 머릿글)은 이조참의 윤덕준이 쓰고, 효능참봉 이명필이 비문을 썼다고 1986년 정태진이 기증해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비석 탁본과 노산 이은상이 전문을 국역한 자료(《군사》, 1981년)를 통해 알 수 있다.

7년 전쟁 때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한산대첩으로 승기를 잡고,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과 정문부 의병장 등이 왜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런 사실은 1905년 3월 31일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쇼스케 소장이 함경도에서 소문을 듣고, “이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라며 비석을 추적하여 함경도 길주 림명동에서 찾아내 머릿돌과 받침대를 제외한 몸체만을 뽑아 귀국하는 제2사단장 미요시 시게오미 중장에게 바쳐졌고, 1905년 10월 병참 수송선에 실려 히로시마로 이송됐다. 그 당시 가등청정의 원찰인 큐슈 구마모토현 혼묘지에서 그의 한을 달랜다는 목적으로 대첩비 보관을 신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러일전쟁의 전승국 일본은 북관대첩비를 청일전쟁의 전리품 및 전몰자 초상을 보관하던 히로시마 궁성의 진텐후(振天府)와 도쿄 야스쿠니 신사의 군사박물관 유슈칸(遊就館)에 전쟁 참고품 등을 진열하는 곳에 두었다가 그 후 천황에게 바치는 예식을 치른 다음, 1869년 메이지 천황(日王)의 명으로 건립한 야스쿠니 신사에 보내졌다. 그때부터 반환될 때까지 콘크리트 더미에 몸체를 박고, 커다란 머릿돌에 눌리다 못해 비석의 내용을 부정하는 안내판까지 설치한 형태로 야스쿠니 신사 뒤뜰에 자리했다.

북관대첩비는 1909년 일본 황실 유학생이던 조소앙(본명 趙鏞殷)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발견하고, 도쿄의 한인 유학생 잡지 《대한흥학보》(1909년 7월호)에 아호인 소해생(嘯海生)라는 이름으로 비석 발견 경위와 비문 전문, “누가 이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 큰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애통한 소회를 ‘함경도임진의병대첩비문’ 제목으로 게재하면서 그 소재가 처음 밝혀졌다. 그 후 비석을 찾아간 제2의 발견자는 익명의 이 씨다. 《동아일보》(1926.9.19.)에는 “9월 16일 이생(李生)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북관대첩비를 확인하고, 자세히 보려다가 일본 헌병에게 금지를 당했다. 비석 옆에 ‘대첩이라 하였지마는 그때 사실과는 전연 서로 다르니, 세인은 이 비문을 믿지 말라.’고 쓴 나무패가 서 있었다.” 또 “임명(臨溟)에 있던 비를 음취(陰取) 해다 야스쿠니에 갖다 놨기에 이를 널리 알리는 바이니, 모두 기억해두자.”라고 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언급조차 되지 않은 북관대첩비는 1978년 4월, 최서면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장이 제3의 발견자다. 당시 《조선일보》(1978.4.12.)는 “북관대첩비가 74년 만에 발견되었다.”라며, 특종 보도로 국내에 처음 알렸다. 재일동포 사학자 최서면은 1978년 조소앙의 글을 처음 읽고, 야스쿠니 신사 비둘기 사육장 옆의 대첩비를 찾아내 박정희 정부에 통보했으며, 우리 정부와 정문부의 후손 해주정씨 종친회는 1979년 일본에 처음으로 북관대첩비 반환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1990년대부터 반환 운동을 벌였던 일본 승려 가키누마 센신 일한불교복지협회장과 한국 측 회장인 초산 정토종 중앙문화원장은 2000년 4월 ‘북관대첩비 민족운동중앙회’를 결성하고, 또 2005년 1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양국인사 33인의 발기로 ‘북관대첩비 환국을 위한 범민족운동본부 발대식’을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가 남북 간 협의 조정과 정부 측 공식 요청이 필요하다는 의견서에 따라 2005년 3월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일한불교복지협의회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과 회동을 통해 북관대첩비의 북측 반환에 최종 합의하고, 그 합의문 채택 결과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통보하는 등의 조치가 따랐다.

그해 5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한 남북 문화재 당국 간 회담을 북측에 정식 제안하였고, 5월 20일 주한 일본대사관은 “남북 당국 간 합의 뒤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반환이 가능하다.”라는 회신을 했다. 6월 20일 한일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관대첩비 반환에 대해 합의했다. 6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6월 28일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했다.

2005년 10월 3일 야스쿠니 신사 이사회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으며, 10월 9일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 팀에서 이전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10월 12일 대한민국과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 인도 문서에 서명했다. 10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서 고유제를 거행한 다음, 10월 20일 대한항공 화물기로 이운돼 국립중앙박물관 앞마당에서 환국 고유제를 지냈다. 10월 28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식 때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11월 17일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져 공식 제막식과 북관대첩비 맞이 국중대회인 ‘학연화대 빗돌맞이’를 가졌다.

2006년 2월 13일 남북 간에 북관대첩비 북한 환송에 관한 협의에서 3월 1일 개성을 거쳐 인도하기로 했다. 그해 2월 20일 북관대첩비 환송 고유제를 경복궁 뜰에서 개최하고, 3월 1일 북측으로 송환되어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4월 25일 경복궁 고궁박물관 뜰에도 북관대첩비 복제비가 세워져 전시됐다. 이로써 북관대첩비는 101년 만에 본래환처를 했다.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장면(2006.3.1.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좌측부터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 심상진 부위원장, 김석환 북측위원장, 김원웅 남측위원장, 초산 회장). 사진=오마이뉴스(2006.3.1.)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 장면(2006.3.1. 개성 고려성균관 명륜당, 좌측부터 류인명 조불련 책임부원, 심상진 부위원장, 김석환 북측위원장, 김원웅 남측위원장, 초산 회장). 사진=오마이뉴스(2006.3.1.)
새로 복구된 북관대첩비각(2006.3.23. 함북 김책시 림명리). 사진=조선의 오늘(2006년 4월호)
새로 복구된 북관대첩비각(2006.3.23. 함북 김책시 림명리). 사진=조선의 오늘(2006년 4월호)

함경도에 다시 서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이 “2006년 3월 23일 원 위치인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 2만여㎡ 보호구역 내에 세워졌다.”라고 보도하는 등 대첩비는 다시 함경도 땅에 섰다. 이날 복원 기념식에는 김석환 문화보존지도국 국장을 비롯해 북관대첩비되찾기대책위원회 상임부위원장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 리복일 김책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등 관계자들과 한복차림의 지역 여성과 인사들이 참여해 10여 분 동안 진행됐다. 또 이를 기념하는 120원짜리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귀환 축하행사를 가졌다.

북측의 국보유적 제193호로 지정돼 역사적 가치를 되찾은 북관대첩비의 비각 옆에는 표석과 안내 판석도 함께 세웠다. 2005년 11월 《조선중앙통신》은 함북 김책시 인민위원회가 복원할 때 쓴 비의 받침돌은 북관대첩비 현장(터)에서 동쪽으로 300여m 떨어진 언덕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건립 당시의 받침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인데, 얕은 2단 높이로 정면에서 보면 큰 화살표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받침돌 위에 탑신을 세우고 얻은 머릿돌은 반환 후, 남측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새로 조각해 이운한 것을 올렸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부터 이고 있던 핍박의 역사인 1,000㎏ 잡석 머릿돌을 벗어던지고, 북관대첩비 조성 시기와 비슷한 전남 해남 명량대첩비(1688년)와 전남 강진 백련사사적비(1681년) 등의 머릿돌을 참고하여 화강암으로 복원한 지붕석이다.

이처럼 북관대첩비의 반환 과정은 남과 북이 하나의 역사로 서로 만나고 뜻을 통한 사건이었다. 그간 미온적이던 우리 정부와 달리 민간에서는 백 년 동안에 걸쳐 크게 다섯 차례의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1996년 조선왕조 황세손 이구의 환국 선물로 북관대첩비를 전달하자고 야스쿠니 신사 측과 교섭 사례에서도 일본 정부는 비의 현 소재지가 야스쿠니 신사라는 점을 들어 민간 소유 재산은 정부 권한 밖이라고 했고,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해야 한다면서 서로 책임을 회피했다. 그간 북측의 입장을 강조한 일본의 주장대로 2004년 11월 말, 심상진 조선불교도연맹 서기장은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자.”는 서한을 일한불교복지협회 초산 중앙문화원장에게 보내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들은 그해 12월 10일 금강산에서 만나 이와 관련한 실무 협의를 가졌다. 이어 2005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일한불교복지협회(대표 초산)와 조선불교도연맹이 대첩비 반환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하고, 같은 해 6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반환 합의가 체결되면서 완성됐다.

백 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는 한일 양국 승려들의 염원과 함께 북측 조불련이 창구 역할을 맡았고, 우리 정부를 통로하여 2006년 3월 1일 개성에서 인도식을 개최하고, 함북 김책시 림명리에 되돌려진 남북공조의 첫 사례이다.

그날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개성시 고려성균관 명륜당 마당에서 열린 ‘북관대첩비 인도・인수식’은 대첩비를 맞이하는 북측 환영사와 떠나보내는 남측 환송사, 축사, 인도・인수 서명 순으로 진행됐다. 북관대첩비환수추진위원회(남측)와 북관대첩비되찾기대책위원회(북측)가 주관한 행사에는 반환사업에 큰 역할을 한 일한불교복지협회 초산 한국 측 회장과 해주정씨 문중 주요 인사・지원 조계종 사회부장 등 남측 관계자 144명과 김석환 위원장・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과 정서정 서기장・류인명 책임부원・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 등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북측 김석환 위원장은 “북관대첩비를 찾아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초산 스님을 비롯한 남쪽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라면서 “이번 일은 일본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이를 계기로 일본에 빼앗긴 문화재들을 되찾는 데 힘있게 나서자.”는 환영사를 했다. 남측 김원웅 국회의원의 환송사와 초산 회장의 축사에 이어 북측 김석환 위원장과 심상진 부위원장과 남측 김원웅 의원과 유홍준 문화재청장, 초산 회장이 함께 인도・인수서에 서명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단순히 문화재를 되찾았다는 것을 넘어 잃어버린 역사를 남북이 함께 찾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남북불교 교류사에서도 국외 문화유산 반환의 새로운 장을 열어낸 것으로, 지난 세기의 근현대사가 집약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 다음 편은 ‘2006년 광주 6.15민족대축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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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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