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본인 지적 한국불교 문제...지금은?
100년 전 일본인 지적 한국불교 문제...지금은?
  • 조현성 기자
  • 승인 2022.05.2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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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미 스님, 동국대 HK사업단 학술대회서 조선불교단 중앙교무원 격론 소개

 

1930년 일본 승려가 우리 불교를 비하하기 위해 쓴 에세이에서 ▷사찰의 재산관리 ▷포교 ▷스님의 사회적 지위를 지적했다. 당시 한 스님은 일본인의 이 글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일본의 식민시대 한국 불교 예속 시도는 오늘날 한국불교 주체성을 위협하는 여러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원장 정덕) HK플러스사업단은 26일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과 온라인 줌을 통해서 ‘동아시아 그 너머의 불교와 정치’ 주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일미 스님(예일대)은 26일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플러스사업단 국제학술대회에서 '누가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는가: 1920~1945년 식민지 조선의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경쟁' 주제 발표를 했다



 

나카무라 켄타로(中村健太郎, 1883~?)는 조선불교단 최고 지도자였다. 그는 1930년 <조선불교> 78호에 '조선사찰의 개선' 제하의 짧은 글을 발표했다. 조선불교단은 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 불교에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선융화 정책 보조를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선불교>는 이 단체가 조선인 사상교육을 위해 발행한 기관지였다.

나카무라 "한국 승려, 호화롭게 살려고 서로 경쟁"

나카무라가 지적한 조선 불교의 문제점은 ▷사찰의 재산관리 ▷포교 ▷스님의 사회적 지위 3가지이다. 

나카무라는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의 승려(주로 비구승) 등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호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이 귀중한 사찰 자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재산 낭비는 “승려, 재가신도, 하층민 사이의 다툼”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불교를 “추악한 스캔들”에 “빠지게” 하여 궁극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카무라는 한국불교의 근본적인 결점으로 승려들에게 포교 정신이 부족하다고 했다. 한국불교가 신도들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도 승려들이 대중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진지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살아있는 불교가 그들(한국 승려) 마음 속에도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종교인과 성실한 불교도가 없다고 했고, 미신적인 무당들이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약화시킨다고 호소했다. 나카무라는 "한국 승려들은 포교에 참여하지 않으며 (미신적인 가르침을 고치는 것과 같이) 옳고 그름을 위해서 싸우는 분명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카무라는 당시 일반인들이 한국의 승려를 종교지도자로 존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 승려의 지위가 거지와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여러번 목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카무라는 ▷사찰의 재산관리 ▷포교 ▷스님의 사회적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했다.
 
정부가 관리인을 파견해 모든 사찰 재산을 모니터링하는 것을 골자로 "사찰 재산은 반은 정부, 반은 민간인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포교 문제는 "정부가 승려들에게 포교 임무를 의무로 부과해야 한다"고 했다.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관료들이 조선 승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서민들이 따르도록 할 것을 권고 했다.

일미 스님은 "나카무라가 이 기사를 쓴 시기는 한국불교 승려 지도자들이 한국불교를 제도적으로 중앙집권화하고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으려 했던 때였다. 나카무라의 의도는 분명했다. 한국 승려들이 한국 불교를 소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승려들은 한국불교의 열악한 상황 개선을 위한 핵심 동맹으로 조선불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글"이라고 했다.
일미 스님(예일대)은 26일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플러스사업단 국제학술대회에서 '누가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는가: 1920~1945년 식민지 조선의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경쟁' 주제 발표를 했다

 

나카무라 켄타로(中村健太郎, 1883~?)는 조선불교단 최고 지도자였다. 그는 1930년 <조선불교> 78호에 '조선사찰의 개선' 제하의 짧은 글을 발표했다. 조선불교단은 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 불교에 영향력을 강화하고 내선융화 정책 보조를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선불교>는 이 단체가 조선인 사상교육을 위해 발행한 기관지였다.

나카무라 "한국 승려, 호화롭게 살려고 서로 경쟁"

나카무라가 지적한 조선 불교의 문제점은 ▷사찰의 재산관리 ▷포교 ▷스님의 사회적 지위 3가지이다. 

나카무라는 제한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의 승려(주로 비구승) 등은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호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이 귀중한 사찰 자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재산 낭비는 “승려, 재가신도, 하층민 사이의 다툼”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불교를 “추악한 스캔들”에 “빠지게” 하여 궁극적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카무라는 한국불교의 근본적인 결점으로 승려들에게 포교 정신이 부족하다고 했다. 한국불교가 신도들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도 승려들이 대중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진지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살아있는 불교가 그들(한국 승려) 마음 속에도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종교인과 성실한 불교도가 없다고 했고, 미신적인 무당들이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약화시킨다고 호소했다. 나카무라는 "한국 승려들은 포교에 참여하지 않으며 (미신적인 가르침을 고치는 것과 같이) 옳고 그름을 위해서 싸우는 분명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카무라는 당시 일반인들이 한국의 승려를 종교지도자로 존중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 승려의 지위가 거지와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여러번 목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카무라는 ▷사찰의 재산관리 ▷포교 ▷스님의 사회적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했다.
 
정부가 관리인을 파견해 모든 사찰 재산을 모니터링하는 것을 골자로 "사찰 재산은 반은 정부, 반은 민간인 감독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포교 문제는 "정부가 승려들에게 포교 임무를 의무로 부과해야 한다"고 했다.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관료들이 조선 승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서민들이 따르도록 할 것을 권고 했다.

일미 스님은 "나카무라가 이 기사를 쓴 시기는 한국불교 승려 지도자들이 한국불교를 제도적으로 중앙집권화하고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얻으려 했던 때였다. 나카무라의 의도는 분명했다. 한국 승려들이 한국 불교를 소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승려들은 한국불교의 열악한 상황 개선을 위한 핵심 동맹으로 조선불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글"이라고 했다.

 

김삼초 "해골 지키며 술 여자 탐닉하는 일본 승려"

나카무라의 글에 (당시 관제인 조선불교단과 대척점에 있던) 중앙교무원 관리자 등이 서면 항의를 조선불교단에 보냈다.

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김삼초 스님은 중앙교무원 기관지 <불교>에 '조선사찰의 개선을 읽고 나카무라 켄타로 씨에게 경고하노라' 제하의 글을 싣었다.

김삼초 스님은 "나카무라의 ‘조선사찰의 개선’을 읽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면서 글을 시작했다.

이어서 나카무라 주장이 너무 약해서 대답할 가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인해 나카무라의 한국불교에 대한 독특한 오해가 퍼지지 않도록 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일미 스님은 "중앙교무원이 나카무라에게 강력하게 대응한 이유는 조선불교단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되면서 중앙교무원 정통성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나카무라의 사찰 재산에 대해 식민정부가 더 엄격한 통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에, 김삼초 스님은 "이미 사찰령 등 필요 법령이 존재하고 있고 경작지 산림 등 사찰재산을 꼼꼼히 당국에 보고했기 때문에 나카무라의 주장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패한 승려가 있다면 그것은 조직적 문제라기보다 개인 문제"라고 했다.

김삼초 스님은 "한국불교가 영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갖고 일본을 문명화시켰다. 지금 한국불교가 일본 불교의 감독 하에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다.

일미 스님은 "김삼초는 나카무라가 사찰 재산 관리인 임명을 주장한 배경이 조선불교단이 한국불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했다.

포교 문제 관련, 김삼초 스님은 "나카무라가 종교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의 차이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했다.

김삼초 스님은 "모든 승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별 승려가 다양한 영적인 길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의무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승려라는 이유만으로 포교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김삼초 스님은 한국 승려의 낮은 사회적 지위 만큼은 나카무라의 지적을 인정했다. 그는 "나카무라가 불교 창시자의 본래 가르침을 잊어 버렸다. 예수에게 재산이나 정치권이 없는 것처럼 부처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김삼초는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 공자, 원효, 쿠카이, 신란, 니치렌이 모두 수행자였다면서 "우리 한국 승려들은 (그들처럼) 탁발자가 되기를 갈망하되, 해골을 지키며 탐욕을 좇고 술과 여자에 탐닉한 그 불교도들(일본 불교 승려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제는 한국불교를 관료화한 사찰령을 통해서 31개 사찰에 대주지, 대주지를 섬기는 행정직, 중앙교무원 등 국가가 인정하는 사제직을 만들었다. 이 직책 대부분은 일본에서 교육받은 승려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돈과 명성, 권력을 누렸고 아내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김삼초 스님은 "시골에서는 '신랑이 스님이 아니면 딸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김삼초 스님은 "문제가 될 만한 점이 있더라도 종교적 권위는 한국 승려의 손에 맡겨져 있다. 미래의 일이겠지만 사찰령이 다시 바뀌기 전에 한국불교는 신성불가침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일미 스님 "식민시대 한국불교 법 의존 대응"

안타깝게도 당시 김삼초의 주장은 한국 승려들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게 일미 스님 분석이다. 

당시 <불교> 편집장 권상로는 "한국불교는 본래 되어야 했던 모습이 아니게 됐다.” 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외부인에게 더러운 입을 벌리게 하고 구경꾼의 눈을 굴리게 하였다.” “누구의 잘못인가?”고 했다. 그는 유일한 해결책은 “참회하고 전진”하여 “그(나카무라)가 말한 것이 미래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다시는 같은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나카무라는 김삼초와 권상로의 글을 반박했다. 사찰령이 존재하지만 "악의적인 승려 무리가 이들을 둘러싸고 사찰의 보물과 재산을 무작정 팔아 사찰령을 어겼다. 이 때문에 정부의 보다 철저한 단속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미 스님은 "포교와 사회적 지위에 관한 나머지 두 가지 점에 대해 나카무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첫 번째 글을 참조로 삼는다면, 아마도 한국불교의 열악한 상황과 한국 승려들의 준비 부족에 대한 자기 주장을 반복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카무라는 한국불교 구제책으로 국가권력과 일본불교 개입을 제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조선불교단과 중앙교무원의 역학관계를 통해서) 기간 동안 프로그램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은 탈식민지의 한국불교로 계승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불교단의 거듭된 위협에도 불구하고 한국 승려들은 식민지 법 제도에 의존하여 대응했다. 한국불교는 불가침의 한국불교의 화신으로서 자신들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정당화했다"고 설명했다.

일미 스님은 "식민 기간 동안 한국과 일본 불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저항과 협력이라는 명확한 이분법이 아니었다. 이 교류는 격동의 20세기를 통틀어 식민주의, 민족주의, 근대성이라는 세력들 속에서 아시아 불교를 특징짓는 양측 사이의 복합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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