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8. 2006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28. 2006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6.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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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피라미드에 서다”

평양의 대박산 단군릉은 1932년 일제강점기 때 조사 발굴된 기록에서 유일하게 삭제돼 있다. 평양 기자묘에 관한 기록과 사진은 많다. 조선총독부가 의도적으로 뺀 것일 수도 있겠으나, 평양 지역의 여러 왕릉과 동일시 했을 가능성도 있다.

북측의 국보유적 제174호 단군릉에 관한 증거 유물로는 1936년 이곳에 세워진 다음, 1992년에 발굴된 ‘단군릉기적비(記績碑)’다. 북측은 이 기념비를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으나, 남측 일각에서는 이의 진위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있다.

단군릉은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서경의 “강동현 대총(大塚),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동명성왕)의 무덤이라 전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단군릉이 자리한 대박산을 기록하였으나, 묘와 능은 표기하지 않았다.

고려 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군왕검은 등장하고 있지만, 단군릉이나 묘는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단군릉 위치는 장안, 서경 등으로 불린 평양이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이곳은 예로부터 동명왕릉, 기자묘, 단군묘 등이 있었다. 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단군묘에 대한 일반적 내용은 단군묘는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 곳이기는 하지만, 기자묘보다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단군묘가 총(塚) 또는 릉(陵)으로 격상된 것은 허목이 1667년 편찬한 《단군세가》에 “송양(松壤) 서쪽에 단군총이 있는데, 송양은 곧 오늘의 강동현이다.” 《고종실록》에 “기축년(1889)에는 기자릉을 봉하고, 신묘년(1891)에는 동명왕릉을 봉하여 예법대로 상설(象設)하여 귀신과 사람들이 다 기뻐하였다. 무릇 세 성인이 서로 이은 순서로 단군묘를 ‘단군릉’으로 숭봉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중추원 의관 백호섭의 상소로 확정됐다. 《순종실록》에서도 강동의 단군릉을 관리하고, 수호하는 절차를 마련하여 거행하라고 했다.

육당 최남선이 1957년에 발표한 〈조선사의 기자는 지나의 기자가 아니다〉 글에서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 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 평할 정도로 새롭게 조명된 단군왕검과 함께 단군릉은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단군릉에 관한 기록은 《정조실록》 등과 같이 1786년에 단군묘를 국가에서 보존하며 제사를 지냈으며, 1945년 해방 전까지도 이어졌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의 언론을 통해 더욱 회자됐다. 특히 단군릉은 1994년 동양 최대의 피라미드 형태로 준공되면서 남북교류의 주요한 명소, 평양의 기념비적 건축물로 자리하고 있다. 그 후 단군릉에서 몇 차례 열린 개천절 남북공동 행사 등을 살펴본다.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단군릉 전경. 사진=KOREA TODAY 2020년 10월호.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단군릉 항공사진. 사진=조선의오늘 2019.10.16.



단군릉, 평양의 랜드마크

기원전 2333년 10월 3일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의 무덤으로 알려진 단군릉은 인민대학습당, 주체사상탑 등과 함께 평양을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이다.

북측의 웹사이트 《오늘의 조선》은 ‘대박산 기슭은 전한다.’라는 기사에서 “단군릉은 1994년 10월 11일에 우리 민족의 시조 왕의 무덤답게 훌륭히 개건되었다.” 동양 최대의 피라미드 형태로 준공된 단군릉은 복원이 아니라 ‘고쳐 세운다.’라는 뜻의 개건을 했다. 지금의 단군릉은 조선 예조 의궤청이 1732년 편찬한 《지릉정자각개건의궤》의 사례와 같이 더 크고 웅장하게 고쳐 지은 왕릉이다. 옛 소련군이 1947년에 촬영한 사진 속의 단군릉은 평남 강동군 강동면 칠포리로, 속칭 ‘단군뎐’이라 불린 산기슭이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서 서북쪽으로 4km 거리의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 때 평남 강동군 강동읍 문흥리로. 일명 ‘고인돌’들이 있던 곳이다. 이전의 ‘단군뎐’과 다른 곳이라 하기보다는 산기슭에서 대박산(대밝산, 밝은산) 마루에 옮겨 세웠다.

북측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1991년 출판한 《고장이름조사 보고서》에는 평남 강동읍에 있는 부락 ‘단군동’이 고장 이름으로, “단군릉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단군동이라 부른다.”는 유래가 기록됐다. 《동아일보》(1926년) ‘향토예찬 내 고을 명물’ 코너에는 “우리 강동에는 단군릉의 고적이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터”라고 했다. 1931년 현진건은 〈단군성적순례〉라는 답사기를 연재하면서, “… 김중보 씨의 인도로 강동에 도착. 차옹을 울한 아달산이라 부르는 소봉(小峰)을 돌고, 단군전이라 동리와 제천골을 지점하며 대박산릉에 이르니, 창창한 송림을 뒤로 두고, 경사 완만한 산록에 주위 410여 척의 일대 릉이 뚜렷이 정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적었다.

《북한용어 400선집》(1999년)에는 1993년 9월 27일 김일성 주석이 단군릉을 방문해 “지금까지 전설로만 알려졌던 단군이 실존 인물로 고증된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연설했다.” 그때 “우리 민족이 생겨난 때로부터 하나의 핏줄을 이어온 단일민족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단군릉 개건확장할 데 대하여’란 연설로 개건을 처음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단군릉 개건관계부문 일군협의회에서 ‘단군릉 개건 방향에 대하여’란 연설로 개건토록 지원했으며, 1994년 7월 6일에도 단군릉의 최종 형성지안(도안)을 살펴보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북측 사회과학원은 1993년 10월 2일 ‘단군릉 발굴보고서’를 처음 발표하면서 단군은 5011년 전 한반도에 실존한 인물이라 했다. 두 곳의 전문연구기관에서 24회, 33회에 걸쳐 무덤 안에 있던 두 남녀의 유골을 전자상자성공명법(電子常磁性共鳴法, ESR)으로 측정한 결과, 매번 5011년(오차값 ±267년) 전의 수치가 나왔으므로 신뢰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1994년 1월에 출간한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에서 단군릉의 원래 양식은 고구려식 무덤이 맞고, 출토된 금동관 역시 고구려 금동관이 맞다고 서술했다. 이를 근거로 내각 차원에서 1994년 1월 말 단군릉복구위원회를 조직하고, 피라미드 형태로 확장 개축하는 단군릉 개건을 결정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능의 개건 지도와 함께 1994년 10월 29일에 개건된 단군릉을 돌아보고, “민족의 원시조릉으로 훌륭히 개건 확장된 데, 먼 훗날에 가서도 손색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구려 제19대 장수왕의 무덤 장군총보다 2배쯤 더 큰 피라미드식 무덤인 단군릉은 1994년 10월 11일 오전 11시에 열린 개건 준공식으로 탄생했다. 강성산 정무원 총리와 리종옥 부주석을 비롯한 당정 고위간부 등 천여 명이 참가한 준공식에서 ‘단군릉은 대기념비적 건축물’로 평가한 강성산 총리와 권순휘 재일조총련 부의장, 당시 한총련 대표로 방북한 최정남 등이 연설했다고 《조선중앙통신》(1994.10.11.)이 전했다. 범청학련 베를린 공동사무국 최정남 대표와 함께 인천대 정민주, 가톨릭대성심캠퍼스 이혜정 학생은 한총련 대표로 그해 판문점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과 대민족회의에 참가하는 등 다시 통일의 꽃들이 되었다.

한편, 남측 아무개가 쓴 답사기에는 단군릉 개건을 10월 29일로 잘못 기록했다. 발굴한 ‘단군릉기적비’를 번역해 새로 만든 ‘단군릉기적비 설명문’ 비를 세운 날짜다. 현재는 단군릉 전체 구역의 중간으로 10m~1.5m 선돌의 문기둥(입석대) 광장 동쪽에 나란히 세운 2개의 비석과 10m 높이로 새로 만든 단군릉개건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원래, 능 앞쪽에 세워졌던 단군릉기적비는 조선총독부 조사팀 등 일제가 여러 차례 도굴과 조사하면서 단군묘를 파괴한 데 분노한 평양 시민들이 1932년 5월 민족혼을 되찾고자 결성한 단군릉수축기성회가 1936년 9월에 세운 것이다. 일명 ‘수축기념비’이라 불리는 화강암 비석의 높이는 1.91m, 너비 0.5m, 두께 0.39m이다. 비문은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모두 음각 글자로 새긴 앞면에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경위와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한문으로, 뒷면엔 수축공사에 대한 경위를 국한문으로 새겼다. 좌측에는 조성에 참여한 수축기성회원 66명의 지역과 이름을, 우측에는 공사비용을 찬조한 59명의 이름과 금액을 새겼다. 1992년 초여름,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과 발굴조사단이 강동군 대박산 일대를 조사할 때 비석을 발굴했다고 한다.

평이했던 옛 무덤을 왕릉으로 개건한 수축공사는 1993년 10월 착공해 1년 동안에 총 부지면적 1.8㎢(45정보) 위에 개건기념비와 석인상 및 중심 구역의 세 곳으로 건설했다. 장군총을 본뜬 피라미드식 돌무덤인 중심 구역은 전체 136m 둘레에 남북 길이 101.7m, 동서 너비 97.5m가 되는 무덤 무지는 다듬은 꼭짓돌을 올린 정사각추형이다. 한 면의 길이 50m, 높이 22m의 1,994개 화강석을 밑단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차례 줄임하여 70m 높이의 9층 단으로 쌓아 올린 돌무덤으로, 가장 무거운 한 개의 돌은 21톤에 달한다. 주변엔 90톤의 통돌로 만든 수호신 돌범(石虎) 4기는 파수병처럼 바깥을 향하고, 돌향로・돌등과 망주석을 세웠다. 또 높이 5m와 1톤 무게의 검은색 편마암으로 만든 비파형 돌검 4기를 놓았다. 북쪽 문을 낸 능 안에는 바른사각형 모양의 2개 관대에는 왼쪽에 키 171cm, 몸무게 60kg 이상의 단군 유골관과 오른쪽의 아내 유골관을 올렸고, 무덤칸 정면에 단군 화상을 걸었다. 단군릉은 2000년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인 리경구의 따님 등이 해설봉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래 석인상 구역은 두 단의 구조다. 윗단 좌우에는 단군왕검의 네 아들인 부루・부소・부우・부여를 좌우에 두상씩 마주 선 상태로, 아랫단에는 신하이던 팽우・고시・해월・비천생・신지・치우・주인・여수기의 여덟 석상을 좌우에 4상씩 세워 호위토록 했다. 그 아래쪽 개건기념비 구역의 넓은 단에는 능으로부터 20리 떨어진 후탄리에서 옮겨온 선돌을 10m~1.5m 크기 돌기둥(입석대)으로 5개씩 짝 세워 대문으로 삼고, 그 좌측에 김일성 주석의 친필로 새긴 단군릉개건기념비를, 우측에는 단군릉기적비와 설명문비 2기를 세웠다. 능의 우백호 자리에는 강동군 문흥리 고인돌 3기를 복원해 놓았다. 단군릉 입구에서 능까지는 279단의 화강암 돌계단으로 길을 내었다.

그 후 북측의 단군릉 개건과 남북공동 행사에 대해 프랑스의 《르몽드》(2011.7.10.)는 “남북한이 갖고 있는 공통분모가 바로 단군숭배 사상”이라고, 남북한이 한민족인 근거로 소개했을 만큼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평양 단군릉 남북합동 개천제(2014.10.3.) 사진=KOREA TODAY, 2018년 6월호.





평양 단군릉 개천제 의장대 고동(2014.10.3.). 사진=KOREA TODAY, 2016년 2월호.



단군 피라미드에 남북이 서다

단기 4339년인 2006년 10월 단군릉 개천절 남북공동 행사는 희대의 장마 피해로 각기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해 2월 이후 남북 개천절 실무접촉, 6.15민족대축전 광주행사에서 남측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단통협)는 북측의 단군민족통일협의회 강철원 부회장(현,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 박문철 서기장 등과 개천절 행사에 대해 협의했다. 남측은 성대한 민족공동 행사로 제안하고, 북측은 약 300명 규모 방북대표단 검토를 약속했다. 하지만 남북 정세의 악화로 말미암아 남측의 개천절 참가 거부로 무산됐다.

북측의 큰물 피해(홍수)로 인해 2006년 8.15 공동행사와 10.3 개천절 행사가 무산됐다. 하지만 그해 12월 2일~6일 개천절 천제봉행단 및 단군문화 유적답사단의 평양 방문으로 다시 남북 대화의 끈을 이었다. 이때 평양 문화유적답사단은 남측의 시민사회단체와 천도교 및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 민간인을 중심으로 160여 명이 참가해 아리랑공연 관람과 동명왕릉과 정릉사・단군릉・묘향산 보현사 등을 참배했다.

1994년 10월 단군릉 개건 준공 후에는 그해 12월 북측 주최로 ‘단군제’를 처음 거행했다. 1996년까지는 10월 3일에 단군제를 열다가 1997년부터 시조왕 단군이 즉위한 날이라는 해석과 함께 공식적으로 ‘개천절’ 기념행사를 단독으로 열었다.

남북이 함께한 개천절 공동행사는 2002년과 2003년, 2005년에 열렸다. 특히 첫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는 2002년 10월 3일 단군릉에서 남과 북 해외동포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측의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주최로 열렸다.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및 《조선중앙TV》가 보도한 그 날 행사는 개막의식과 단군제에 이어 남북한 대표 및 관계자들의 통일염원 발언과 조국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결의문 채택 순으로 진행됐다. 2003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에는 평양시민 천여 명과 남측, 해외동포 150여 명이 참가하고, 재독작곡가 고 윤이상의 부인 이수사 씨가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2005년을 끝으로 중단된 개천절 남북 공동행사는 2014년 10월 3일 단군릉 개건 20년을 맞이해 북측 단군민족통일협의회와 남측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공동으로 봉행하면서, “단군은 지금으로부터 반만년 전에 오늘의 평양에 수도를 정하고 동방에서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다.”라는 내용을 다시 천명했다. 2021년까지 북측에서는 천도교 사회단체인 단군민족통일협의회가 매년 개천절 기념행사를 단군릉에서 제례방식으로 개최하고 있으나, 2005년 이후로 남측 정부의 방북 불허 등으로 이유로 인해 공동행사 대신에 서울과 평양에서 각기 분산 개최를 거듭해 왔다.

1934년 노산 이은상을 비롯한 월남 이상재, 고하 송진우 등이 1926년에 참배한 이래로, 동양의 피라미드로 재탄생한 대박산 단군릉은 남북교류의 장이었다. 고려 이후에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 태백산 단군전, 종로 사직단의 백악전 등과 북측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와 평양 숭령전 등에서도 건국 시조인 단군에 대한 제천의식이 열린다. 1909년 대종교의 나철에 의해 명명된 개천절은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노랫말처럼 민족국가 건국의 경축일인 동시에,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 다음 편은 ‘2007년 내금강산 관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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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단군릉 전경. 사진=KOREA TODAY 2020년 10월호.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단군릉 항공사진. 사진=조선의오늘 2019.10.16.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단군릉 항공사진. 사진=조선의오늘 2019.10.16.

단군릉, 평양의 랜드마크

기원전 2333년 10월 3일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의 무덤으로 알려진 단군릉은 인민대학습당, 주체사상탑 등과 함께 평양을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이다.

북측의 웹사이트 《오늘의 조선》은 ‘대박산 기슭은 전한다.’라는 기사에서 “단군릉은 1994년 10월 11일에 우리 민족의 시조 왕의 무덤답게 훌륭히 개건되었다.” 동양 최대의 피라미드 형태로 준공된 단군릉은 복원이 아니라 ‘고쳐 세운다.’라는 뜻의 개건을 했다. 지금의 단군릉은 조선 예조 의궤청이 1732년 편찬한 《지릉정자각개건의궤》의 사례와 같이 더 크고 웅장하게 고쳐 지은 왕릉이다. 옛 소련군이 1947년에 촬영한 사진 속의 단군릉은 평남 강동군 강동면 칠포리로, 속칭 ‘단군뎐’이라 불린 산기슭이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서 서북쪽으로 4km 거리의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 때 평남 강동군 강동읍 문흥리로. 일명 ‘고인돌’들이 있던 곳이다. 이전의 ‘단군뎐’과 다른 곳이라 하기보다는 산기슭에서 대박산(대밝산, 밝은산) 마루에 옮겨 세웠다.

북측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1991년 출판한 《고장이름조사 보고서》에는 평남 강동읍에 있는 부락 ‘단군동’이 고장 이름으로, “단군릉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단군동이라 부른다.”는 유래가 기록됐다. 《동아일보》(1926년) ‘향토예찬 내 고을 명물’ 코너에는 “우리 강동에는 단군릉의 고적이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터”라고 했다. 1931년 현진건은 〈단군성적순례〉라는 답사기를 연재하면서, “… 김중보 씨의 인도로 강동에 도착. 차옹을 울한 아달산이라 부르는 소봉(小峰)을 돌고, 단군전이라 동리와 제천골을 지점하며 대박산릉에 이르니, 창창한 송림을 뒤로 두고, 경사 완만한 산록에 주위 410여 척의 일대 릉이 뚜렷이 정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적었다.

《북한용어 400선집》(1999년)에는 1993년 9월 27일 김일성 주석이 단군릉을 방문해 “지금까지 전설로만 알려졌던 단군이 실존 인물로 고증된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연설했다.” 그때 “우리 민족이 생겨난 때로부터 하나의 핏줄을 이어온 단일민족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단군릉 개건확장할 데 대하여’란 연설로 개건을 처음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단군릉 개건관계부문 일군협의회에서 ‘단군릉 개건 방향에 대하여’란 연설로 개건토록 지원했으며, 1994년 7월 6일에도 단군릉의 최종 형성지안(도안)을 살펴보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북측 사회과학원은 1993년 10월 2일 ‘단군릉 발굴보고서’를 처음 발표하면서 단군은 5011년 전 한반도에 실존한 인물이라 했다. 두 곳의 전문연구기관에서 24회, 33회에 걸쳐 무덤 안에 있던 두 남녀의 유골을 전자상자성공명법(電子常磁性共鳴法, ESR)으로 측정한 결과, 매번 5011년(오차값 ±267년) 전의 수치가 나왔으므로 신뢰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1994년 1월에 출간한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에서 단군릉의 원래 양식은 고구려식 무덤이 맞고, 출토된 금동관 역시 고구려 금동관이 맞다고 서술했다. 이를 근거로 내각 차원에서 1994년 1월 말 단군릉복구위원회를 조직하고, 피라미드 형태로 확장 개축하는 단군릉 개건을 결정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능의 개건 지도와 함께 1994년 10월 29일에 개건된 단군릉을 돌아보고, “민족의 원시조릉으로 훌륭히 개건 확장된 데, 먼 훗날에 가서도 손색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구려 제19대 장수왕의 무덤 장군총보다 2배쯤 더 큰 피라미드식 무덤인 단군릉은 1994년 10월 11일 오전 11시에 열린 개건 준공식으로 탄생했다. 강성산 정무원 총리와 리종옥 부주석을 비롯한 당정 고위간부 등 천여 명이 참가한 준공식에서 ‘단군릉은 대기념비적 건축물’로 평가한 강성산 총리와 권순휘 재일조총련 부의장, 당시 한총련 대표로 방북한 최정남 등이 연설했다고 《조선중앙통신》(1994.10.11.)이 전했다. 범청학련 베를린 공동사무국 최정남 대표와 함께 인천대 정민주, 가톨릭대성심캠퍼스 이혜정 학생은 한총련 대표로 그해 판문점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과 대민족회의에 참가하는 등 다시 통일의 꽃들이 되었다.

한편, 남측 아무개가 쓴 답사기에는 단군릉 개건을 10월 29일로 잘못 기록했다. 발굴한 ‘단군릉기적비’를 번역해 새로 만든 ‘단군릉기적비 설명문’ 비를 세운 날짜다. 현재는 단군릉 전체 구역의 중간으로 10m~1.5m 선돌의 문기둥(입석대) 광장 동쪽에 나란히 세운 2개의 비석과 10m 높이로 새로 만든 단군릉개건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원래, 능 앞쪽에 세워졌던 단군릉기적비는 조선총독부 조사팀 등 일제가 여러 차례 도굴과 조사하면서 단군묘를 파괴한 데 분노한 평양 시민들이 1932년 5월 민족혼을 되찾고자 결성한 단군릉수축기성회가 1936년 9월에 세운 것이다. 일명 ‘수축기념비’이라 불리는 화강암 비석의 높이는 1.91m, 너비 0.5m, 두께 0.39m이다. 비문은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모두 음각 글자로 새긴 앞면에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경위와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한문으로, 뒷면엔 수축공사에 대한 경위를 국한문으로 새겼다. 좌측에는 조성에 참여한 수축기성회원 66명의 지역과 이름을, 우측에는 공사비용을 찬조한 59명의 이름과 금액을 새겼다. 1992년 초여름,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과 발굴조사단이 강동군 대박산 일대를 조사할 때 비석을 발굴했다고 한다.

평이했던 옛 무덤을 왕릉으로 개건한 수축공사는 1993년 10월 착공해 1년 동안에 총 부지면적 1.8㎢(45정보) 위에 개건기념비와 석인상 및 중심 구역의 세 곳으로 건설했다. 장군총을 본뜬 피라미드식 돌무덤인 중심 구역은 전체 136m 둘레에 남북 길이 101.7m, 동서 너비 97.5m가 되는 무덤 무지는 다듬은 꼭짓돌을 올린 정사각추형이다. 한 면의 길이 50m, 높이 22m의 1,994개 화강석을 밑단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차례 줄임하여 70m 높이의 9층 단으로 쌓아 올린 돌무덤으로, 가장 무거운 한 개의 돌은 21톤에 달한다. 주변엔 90톤의 통돌로 만든 수호신 돌범(石虎) 4기는 파수병처럼 바깥을 향하고, 돌향로・돌등과 망주석을 세웠다. 또 높이 5m와 1톤 무게의 검은색 편마암으로 만든 비파형 돌검 4기를 놓았다. 북쪽 문을 낸 능 안에는 바른사각형 모양의 2개 관대에는 왼쪽에 키 171cm, 몸무게 60kg 이상의 단군 유골관과 오른쪽의 아내 유골관을 올렸고, 무덤칸 정면에 단군 화상을 걸었다. 단군릉은 2000년 9월 송환된 비전향장기수인 리경구의 따님 등이 해설봉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아래 석인상 구역은 두 단의 구조다. 윗단 좌우에는 단군왕검의 네 아들인 부루・부소・부우・부여를 좌우에 두상씩 마주 선 상태로, 아랫단에는 신하이던 팽우・고시・해월・비천생・신지・치우・주인・여수기의 여덟 석상을 좌우에 4상씩 세워 호위토록 했다. 그 아래쪽 개건기념비 구역의 넓은 단에는 능으로부터 20리 떨어진 후탄리에서 옮겨온 선돌을 10m~1.5m 크기 돌기둥(입석대)으로 5개씩 짝 세워 대문으로 삼고, 그 좌측에 김일성 주석의 친필로 새긴 단군릉개건기념비를, 우측에는 단군릉기적비와 설명문비 2기를 세웠다. 능의 우백호 자리에는 강동군 문흥리 고인돌 3기를 복원해 놓았다. 단군릉 입구에서 능까지는 279단의 화강암 돌계단으로 길을 내었다.

그 후 북측의 단군릉 개건과 남북공동 행사에 대해 프랑스의 《르몽드》(2011.7.10.)는 “남북한이 갖고 있는 공통분모가 바로 단군숭배 사상”이라고, 남북한이 한민족인 근거로 소개했을 만큼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평양 단군릉 남북합동 개천제(2014.10.3.) 사진=KOREA TODAY, 2018년 6월호.
평양 단군릉 남북합동 개천제(2014.10.3.) 사진=KOREA TODAY, 2018년 6월호.
평양 단군릉 개천제 의장대 고동(2014.10.3.). 사진=KOREA TODAY, 2016년 2월호.
평양 단군릉 개천제 의장대 고동(2014.10.3.). 사진=KOREA TODAY, 2016년 2월호.

단군 피라미드에 남북이 서다

단기 4339년인 2006년 10월 단군릉 개천절 남북공동 행사는 희대의 장마 피해로 각기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해 2월 이후 남북 개천절 실무접촉, 6.15민족대축전 광주행사에서 남측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단통협)는 북측의 단군민족통일협의회 강철원 부회장(현, 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 박문철 서기장 등과 개천절 행사에 대해 협의했다. 남측은 성대한 민족공동 행사로 제안하고, 북측은 약 300명 규모 방북대표단 검토를 약속했다. 하지만 남북 정세의 악화로 말미암아 남측의 개천절 참가 거부로 무산됐다.

북측의 큰물 피해(홍수)로 인해 2006년 8.15 공동행사와 10.3 개천절 행사가 무산됐다. 하지만 그해 12월 2일~6일 개천절 천제봉행단 및 단군문화 유적답사단의 평양 방문으로 다시 남북 대화의 끈을 이었다. 이때 평양 문화유적답사단은 남측의 시민사회단체와 천도교 및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 민간인을 중심으로 160여 명이 참가해 아리랑공연 관람과 동명왕릉과 정릉사・단군릉・묘향산 보현사 등을 참배했다.

1994년 10월 단군릉 개건 준공 후에는 그해 12월 북측 주최로 ‘단군제’를 처음 거행했다. 1996년까지는 10월 3일에 단군제를 열다가 1997년부터 시조왕 단군이 즉위한 날이라는 해석과 함께 공식적으로 ‘개천절’ 기념행사를 단독으로 열었다.

남북이 함께한 개천절 공동행사는 2002년과 2003년, 2005년에 열렸다. 특히 첫 개천절 민족공동행사는 2002년 10월 3일 단군릉에서 남과 북 해외동포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북측의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주최로 열렸다.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및 《조선중앙TV》가 보도한 그 날 행사는 개막의식과 단군제에 이어 남북한 대표 및 관계자들의 통일염원 발언과 조국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결의문 채택 순으로 진행됐다. 2003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에는 평양시민 천여 명과 남측, 해외동포 150여 명이 참가하고, 재독작곡가 고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씨가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2005년을 끝으로 중단된 개천절 남북 공동행사는 2014년 10월 3일 단군릉 개건 20년을 맞이해 북측 단군민족통일협의회와 남측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공동으로 봉행하면서, “단군은 지금으로부터 반만년 전에 오늘의 평양에 수도를 정하고 동방에서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다.”라는 내용을 다시 천명했다. 2021년까지 북측에서는 천도교 사회단체인 단군민족통일협의회가 매년 개천절 기념행사를 단군릉에서 제례방식으로 개최하고 있으나, 2005년 이후로 남측 정부의 방북 불허 등으로 이유로 인해 공동행사 대신에 서울과 평양에서 각기 분산 개최를 거듭해 왔다.

1934년 노산 이은상을 비롯한 월남 이상재, 고하 송진우 등이 1926년에 참배한 이래로, 동양의 피라미드로 재탄생한 대박산 단군릉은 남북교류의 장이었다. 고려 이후에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 태백산 단군전, 종로 사직단의 백악전 등과 북측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와 평양 숭령전 등에서도 건국 시조인 단군에 대한 제천의식이 열린다. 1909년 대종교의 나철에 의해 명명된 개천절은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노랫말처럼 민족국가 건국의 경축일인 동시에,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 다음 편은 ‘2007년 내금강산 관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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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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