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 생활, 선학원 주석 당시 항일운동의 연장선”
“심우장 생활, 선학원 주석 당시 항일운동의 연장선”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2.06.1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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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와 심우장’을 주제로 열린 만해학술제에서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원장 법진 스님이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을 주제발표하고 있다.



재단법인 선학원의 설립조사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스님은 55세가 되던 1933년 성북동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재정난으로 휴간됐던 《불교》지를 속간했으며,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를 세우는 등 민족독립과 불교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 선학원에서 주석할 당시 신간회와 물산장려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으로 여러 번 형무소에 투옥된 이력이 있는 만해 스님은 조선총독부와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심우장 시기 스님의 삶과 활동은 편린으로만 전할 뿐이다.

만해 스님이 심우장에서 보낸 만년 10년 동안의 삶과 활동을 복원한 논문이 발표됐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원장 법진)이 6월 9일 오후 2시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만해와 심우장’을 주제로 개최한 만해학술제에서 법진 스님이 발표한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이 화제의 논문이다.

법진 스님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증언과 각종 기록을 통해 만해 스님의 생애 마지막 10년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냈다. 특히 한영숙 여사의 증언은 만해 스님과 동고동락했던 딸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평가다.

만해 스님은 1933년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쇠약해진 몸과 유숙원과 혼인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김관호의 증언에 따르면 <동아일보> 김연국이 일본 오사카 지국장으로 가면서 비어 있던 곳을 김철중과 벽산(碧山) 스님의 배려로 집을 짓게 되었다.

건립비용 1000원 중 700원은 부인 유 씨의 소지금과 선학원 적음 스님, 방응모 사장 등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마련하고, 모자란 300원은 월부로 상환하기로 하고 금용조합에서 차용했지만 끝내 갚지 못하고 입적했다.

심우장은 앉은 방향이 북향인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한영숙 여사는 집의 방향을 북향으로 한 것은 만해 스님이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확인했다.

논문 부록 ‘달이 기억하는 만해와 심우장’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 한영숙 여사는 “그 양반(만해 스님)이 그렇게(총독부가 싫어서 북향으로 집을 지은) 거지요.”라고 분명히 밝혔다.

만해 스님은 경봉 스님과도 오랜 인연을 맺었다. 심우장을 두고 두 스님 사이에 “언제 소를 잃었느냐”, “소를 얻고 잃는 일이 없다. 다만 부질없이 심우장을 지었다”, “일이 많다고 하니 상으로 차 한 잔 줄만하다” 등의 법거량이 오갈 정도였다.

경봉 스님은 만해 스님에게 ‘화엄’을 배웠다. 그런 인연으로 경봉 스님은 심우장으로 만해 스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만해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는 추도비문을 직접 쓰고 비를 탑골공원에 세우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만해 스님은 좋고 싫음이 분명해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게 깊은 의리를 보여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하다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 선생이 1937년 3월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옮겨와 5일장을 치른 일은 유명하다.

한영숙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밖에서 돌아가신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방안으로 모시지 못하고 심우장 앞마당에 제상(祭床)을 차렸”고, “일제의 감시가 혹독해 조문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해 한강에 뿌렸다. 만해 스님은 영결식에서 “다시 이런 인재가 없을 것”이라며 통곡했는데, 스님이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 때 뿐이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은 변절한 인사와는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만해 스님은 최린이 변절하자 심우장으로 찾아와도 일절 만나주지 않았다. 스님이 집에 없을 때 최린이 딸에게 준 돈을 명륜동 그의 집으로 찾아가 집어던지고 돌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원장 법진 스님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만해 스님은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민족의 독립과 불교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님의 발걸음은 항일․독립을 위한 청년불교운동과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운동으로 나아갔다.

심우장으로 옮기기 전 조직된 만당(卍黨)은 청년불교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용조와 박영희의 증언에 따르면 만당은 1930년 5월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4인이 조직한 비밀결사체다. 두 차례에 걸쳐 동지를 규합한 이들은 만해 스님을 당수로 추대하면서도 스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만당 결사와 당수 추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만당의 활동과 중요 사건에 대해 만해 스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만당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이 김법린이다. 민중본위적이고 현실참여적인 불교사상을 가진,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던 김법린은 만해 스님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법린은 불교중앙학림 재학 시절 강사였던 만해 스님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파리 유학 시절 스님이 주석하던 선학원을 한국 주소지로 적을 정도로 스님을 정신적 지주로 여겼다. 1938년 만당 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돼 옥고를 치른 김법린은 1939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만해 스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선학원의 중흥조 적음 스님 또한 재정비된 만당 활동으로 1938년 10월 최범술·김범부 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1942년에는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만당 당원 17명이 친일파 승려 변설호의 밀고로 합천경찰서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처럼 만해 스님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불교계 애국청년과 승려들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일경에 검거됐다.

만해 스님이 재정난으로 휴간됐던 《불교》지를 인수해 운영한 것은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운동의 대표적 사례다. 스님은 <반종교운동의 비판>, <불교와 효행>,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역경(譯經)의 급무>, <선외선(禪外禪)>과 같은 글을 통해 정교분립을 주장하고, 불교행정을 비판하는 등 불교포교와 대중화,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심우장 시절 만해 스님은 역사적 위인의 업적을 선양하여 무기력한 백성들에게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독립지사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장사지내고, 단재 신채호와 대종교 초대교주 나철의 유고집을 간행하고자 했다.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100주년을 맞아서는 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대서관(大西館)에서 기념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만해 스님은 일제 말기 총동원 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35년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 등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법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생활은 이전 10여 년 동안 선학원에서 전개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연속이었으며, 그동안 불교계에서 진행한 청년운동과 대중화를 점검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며, “만해의 삶은 격랑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가 61세를 맞이해 읊은 한시 <즉흥>에서 말한 것처럼 ‘풍상 속에서도 일편단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이 그가 세속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집착이었다.”고 말했다.



종합토론 모습.



법진 스님이 발표한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의 부록 ‘달이 기억하는 만해와 심우장’에는 조선총독부와 마주하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증언과 김동삼 선생의 장례에 관한 일화 외에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이 여럿 수록돼 있다.

증언에는 만해 스님이 거처를 옮길 당시 심우장의 모습이 담겨있다. 한영숙 여사는 “처음에는 방, 광, 목욕탕, 화장실 그랬어요. 그런데 광이 없어지고 이상야릇하게 모두 신식으로 가면서 변형됐다.”면서도 “그래도 그냥 거기에서 살 때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한영숙 여사는 만해 스님이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934년 태어났다. 증언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일본어를 배우게 된다고 딸을 소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딸에게 병풍에 적힌 한자를 신문에 써서 익히고, 구구단을 외우도록 했다. 한영숙 여사는 광복이 되고 나서야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심우장 시절 만해 스님의 생활은 가난하기 그지 없었다. 구공탄을 살 돈이 없어서 불을 때지 않았다. 생활비는 지인(친구분들)이 주는 생활비와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흑풍> 원고료로 충당했다.

당시 삼시 세끼는 부인 유숙원 여사가 장만해서 준비했는데, 유 여사는 “세상 떠나시면 손을 내놓고 묻으시라”고 말을 들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았다.

유숙원 여사는 간호사로 알려졌는데, 증언에 따르면 “의사였던 (한영숙 여사의) 이모가 운영하던 삼선교 병원에 잠시 머물렀던 것이 와전된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이었던 만해 스님이 주석한 심우장은 일경들의 감시가 삼엄했다. 일경들은 산에서 심우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감시했다. 그 탓에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우장에는 만공 스님과 춘성 스님, 적음 스님이 자주 드나들었다. 만공 스님은 상경할 때면 늘 심우장에서 잤다. 어린 한영숙 여사는 아침마다 놋대야에 세숫물과 발 씻는 물을 떠다 드리며 만공 스님을 시중했다.

만해 스님은 말년에 중풍을 앓았다. 한영숙 여사는 중풍의 원인을 “(만주에서 총격을 받았을 때) 총알을 빼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적음 스님이 심우장에 와 만해 스님에게 침을 놓기도 했다. 선학원 중흥조인 적음 스님은 침술이 뛰어나 신도들이 많이 따랐다.

만해 스님은 1944년 6월 29일 입적했다. 장례는 5일장(7일장)으로 치러졌는데, 여름인데도 장례기간 동안 부패 없이 깨끗했다. 일경은 만해 스님의 장례 또한 감시했다. 만해 스님의 유택인 망우리 묘지는 스님 지인들의 주선으로 마련했다. 안장할 때도 애국지사들은 일경의 감시 때문에 오지 못했다.

한편, 만해학술제에서는 법진 스님 외에 고병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이 ‘한용운의 지적 흐름과 실천, 그리고 근대불교적 가치’를 주제로 주제 발표했다.



만해학술제가 끝난 뒤 발표자와 논평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함께한 기념촬영.
‘만해와 심우장’을 주제로 열린 만해학술제에서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원장 법진 스님이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을 주제발표하고 있다.

재단법인 선학원의 설립조사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스님은 55세가 되던 1933년 성북동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재정난으로 휴간됐던 《불교》지를 속간했으며,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를 세우는 등 민족독립과 불교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 선학원에서 주석할 당시 신간회와 물산장려운동 등 항일민족운동으로 여러 번 형무소에 투옥된 이력이 있는 만해 스님은 조선총독부와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심우장 시기 스님의 삶과 활동은 편린으로만 전할 뿐이다.

만해 스님이 심우장에서 보낸 만년 10년 동안의 삶과 활동을 복원한 논문이 발표됐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원장 법진)이 6월 9일 오후 2시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만해홀에서 ‘만해와 심우장’을 주제로 개최한 만해학술제에서 법진 스님이 발표한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이 화제의 논문이다.

법진 스님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증언과 각종 기록을 통해 만해 스님의 생애 마지막 10년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냈다. 특히 한영숙 여사의 증언은 만해 스님과 동고동락했던 딸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평가다.

만해 스님은 1933년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쇠약해진 몸과 유숙원과 혼인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김관호의 증언에 따르면 <동아일보> 김연국이 일본 오사카 지국장으로 가면서 비어 있던 곳을 김철중과 벽산(碧山) 스님의 배려로 집을 짓게 되었다.

건립비용 1000원 중 700원은 부인 유 씨의 소지금과 선학원 적음 스님, 방응모 사장 등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마련하고, 모자란 300원은 월부로 상환하기로 하고 금용조합에서 차용했지만 끝내 갚지 못하고 입적했다.

심우장은 앉은 방향이 북향인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한영숙 여사는 집의 방향을 북향으로 한 것은 만해 스님이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확인했다.

논문 부록 ‘달이 기억하는 만해와 심우장’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 한영숙 여사는 “그 양반(만해 스님)이 그렇게(총독부가 싫어서 북향으로 집을 지은) 거지요.”라고 분명히 밝혔다.

만해 스님은 경봉 스님과도 오랜 인연을 맺었다. 심우장을 두고 두 스님 사이에 “언제 소를 잃었느냐”, “소를 얻고 잃는 일이 없다. 다만 부질없이 심우장을 지었다”, “일이 많다고 하니 상으로 차 한 잔 줄만하다” 등의 법거량이 오갈 정도였다.

경봉 스님은 만해 스님에게 ‘화엄’을 배웠다. 그런 인연으로 경봉 스님은 심우장으로 만해 스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만해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는 추도비문을 직접 쓰고 비를 탑골공원에 세우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만해 스님은 좋고 싫음이 분명해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게 깊은 의리를 보여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하다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 선생이 1937년 3월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옮겨와 5일장을 치른 일은 유명하다.

한영숙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밖에서 돌아가신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방안으로 모시지 못하고 심우장 앞마당에 제상(祭床)을 차렸”고, “일제의 감시가 혹독해 조문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은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해 한강에 뿌렸다. 만해 스님은 영결식에서 “다시 이런 인재가 없을 것”이라며 통곡했는데, 스님이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 때 뿐이었다고 한다.

만해 스님은 변절한 인사와는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만해 스님은 최린이 변절하자 심우장으로 찾아와도 일절 만나주지 않았다. 스님이 집에 없을 때 최린이 딸에게 준 돈을 명륜동 그의 집으로 찾아가 집어던지고 돌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원장 법진 스님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원장 법진 스님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만해 스님은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민족의 독립과 불교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님의 발걸음은 항일․독립을 위한 청년불교운동과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운동으로 나아갔다.

심우장으로 옮기기 전 조직된 만당(卍黨)은 청년불교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용조와 박영희의 증언에 따르면 만당은 1930년 5월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이용조 4인이 조직한 비밀결사체다. 두 차례에 걸쳐 동지를 규합한 이들은 만해 스님을 당수로 추대하면서도 스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만당 결사와 당수 추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만당의 활동과 중요 사건에 대해 만해 스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만당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이 김법린이다. 민중본위적이고 현실참여적인 불교사상을 가진,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던 김법린은 만해 스님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법린은 불교중앙학림 재학 시절 강사였던 만해 스님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파리 유학 시절 스님이 주석하던 선학원을 한국 주소지로 적을 정도로 스님을 정신적 지주로 여겼다. 1938년 만당 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돼 옥고를 치른 김법린은 1939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만해 스님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선학원의 중흥조 적음 스님 또한 재정비된 만당 활동으로 1938년 10월 최범술·김범부 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1942년에는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만당 당원 17명이 친일파 승려 변설호의 밀고로 합천경찰서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처럼 만해 스님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불교계 애국청년과 승려들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일경에 검거됐다.

만해 스님이 재정난으로 휴간됐던 《불교》지를 인수해 운영한 것은 불교개혁을 통한 대중화운동의 대표적 사례다. 스님은 <반종교운동의 비판>, <불교와 효행>,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역경(譯經)의 급무>, <선외선(禪外禪)>과 같은 글을 통해 정교분립을 주장하고, 불교행정을 비판하는 등 불교포교와 대중화,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심우장 시절 만해 스님은 역사적 위인의 업적을 선양하여 무기력한 백성들에게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독립지사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장사지내고, 단재 신채호와 대종교 초대교주 나철의 유고집을 간행하고자 했다.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100주년을 맞아서는 정인보, 안재홍과 함께 대서관(大西館)에서 기념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만해 스님은 일제 말기 총동원 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35년 신사참배 반대운동,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 등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법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생활은 이전 10여 년 동안 선학원에서 전개했던 항일독립운동의 연속이었으며, 그동안 불교계에서 진행한 청년운동과 대중화를 점검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대응하고자 한 것이었다.”며, “만해의 삶은 격랑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가 61세를 맞이해 읊은 한시 <즉흥>에서 말한 것처럼 ‘풍상 속에서도 일편단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이 그가 세속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집착이었다.”고 말했다.

종합토론 모습.
종합토론 모습.

법진 스님이 발표한 ‘만해 한용운의 만년과 심우장’의 부록 ‘달이 기억하는 만해와 심우장’에는 조선총독부와 마주하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증언과 김동삼 선생의 장례에 관한 일화 외에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이 여럿 수록돼 있다.

증언에는 만해 스님이 거처를 옮길 당시 심우장의 모습이 담겨있다. 한영숙 여사는 “처음에는 방, 광, 목욕탕, 화장실 그랬어요. 그런데 광이 없어지고 이상야릇하게 모두 신식으로 가면서 변형됐다.”면서도 “그래도 그냥 거기에서 살 때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한영숙 여사는 만해 스님이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인 1934년 태어났다. 증언에 따르면 만해 스님은 일본어를 배우게 된다고 딸을 소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딸에게 병풍에 적힌 한자를 신문에 써서 익히고, 구구단을 외우도록 했다. 한영숙 여사는 광복이 되고 나서야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심우장 시절 만해 스님의 생활은 가난하기 그지 없었다. 구공탄을 살 돈이 없어서 불을 때지 않았다. 생활비는 지인(친구분들)이 주는 생활비와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흑풍> 원고료로 충당했다.

당시 삼시 세끼는 부인 유숙원 여사가 장만해서 준비했는데, 유 여사는 “세상 떠나시면 손을 내놓고 묻으시라”고 말을 들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았다.

유숙원 여사는 간호사로 알려졌는데, 증언에 따르면 “의사였던 (한영숙 여사의) 이모가 운영하던 삼선교 병원에 잠시 머물렀던 것이 와전된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이었던 만해 스님이 주석한 심우장은 일경들의 감시가 삼엄했다. 일경들은 산에서 심우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감시했다. 그 탓에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우장에는 만공 스님과 춘성 스님, 적음 스님이 자주 드나들었다. 만공 스님은 상경할 때면 늘 심우장에서 잤다. 어린 한영숙 여사는 아침마다 놋대야에 세숫물과 발 씻는 물을 떠다 드리며 만공 스님을 시중했다.

만해 스님은 말년에 중풍을 앓았다. 한영숙 여사는 중풍의 원인을 “(만주에서 총격을 받았을 때) 총알을 빼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적음 스님이 심우장에 와 만해 스님에게 침을 놓기도 했다. 선학원 중흥조인 적음 스님은 침술이 뛰어나 신도들이 많이 따랐다.

만해 스님은 1944년 6월 29일 입적했다. 장례는 5일장(7일장)으로 치러졌는데, 여름인데도 장례기간 동안 부패 없이 깨끗했다. 일경은 만해 스님의 장례 또한 감시했다. 만해 스님의 유택인 망우리 묘지는 스님 지인들의 주선으로 마련했다. 안장할 때도 애국지사들은 일경의 감시 때문에 오지 못했다.

한편, 만해학술제에서는 법진 스님 외에 고병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이 ‘한용운의 지적 흐름과 실천, 그리고 근대불교적 가치’를 주제로 주제 발표했다.

만해학술제가 끝난 뒤 발표자와 논평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함께한 기념촬영.
만해학술제가 끝난 뒤 발표자와 논평자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함께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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