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선택한 신라 왕실 그리고 그의 책무
원효가 선택한 신라 왕실 그리고 그의 책무
  • 김규순
  • 승인 2022.07.1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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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불교풍수 08
원효가 궁궐로 가다가 빠졌다는 문천[남천] 그리고 복원된 월정교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랑을 하여 658년 설총을 낳았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654-661)와 보희부인(김유신 여동생)의 딸이었다. 

요석공주는 첫 남편 김흠운이 655년 전사하여 과부가 되었다.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달라’는 노래를 부른 원효의 의중을 알아차린 무열왕이 그를 과부 요석공주에게 데려다 준 것은 파격이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고 무열왕은 진골로 왕이 된 최초의 인물이었다. 

무열왕이  6두품의 원효를 진골의 공주와 사랑을 할 수 있게 다리를 놓아 준 것은 원효에게도 자기가 왕이 된 것과 같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원효는 요석공주를 선택했고 그 결과 왕족과 혈연으로 맺어졌다. 원효는 스스로 권력 핵심부에 들어간 것이었다. 

무열왕은 장인이 되었고, 김유신은 처외삼촌이 된 것이니 그야말로 엘리베이트를 타고 최고 권력층에 진입하였다.

무열왕 다음에는 그의 아들 문무왕이 즉위했다. 문무왕(김법민)은 요석공주의 동생이었다. 원효와 문무왕은 처남 매부지간이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원효의 아들 설총과는 사촌지간이었고 둘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요석공주는 신문왕의 고모이자 장모였다. 



원효가 주석했던 분황사



 

신문왕의 비는 요석공주와 첫 남편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다. 요석공주의 신라왕실데 대한 영향력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설총 역시 국내파 지식인으로 왕실에 적극 협조하였다. 원효는 불교의 큰 산이었고 그의 아들 설총은 유교의 큰 산이었으니 이는 신라왕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원효가 무열왕과 김유신 등 삼국통일 주역을 만났을 때는 격동의 시기, 격전의 시기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원효는 무열왕과 김유신의 숙제인 삼국전쟁을 수행하는데 힘을 보태야 할 처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총(658-746) 태어난 년도가 해골물 사건(661)이전이고 김유신 진영을 따라 다닌 것은 해골물 사건 이후이다. 

해골물 사건은 원효가 득도(得道)를 한 기준으로 본다. 이 시기 원효의 지식수준이 당 나라 유학파들의 지식수준을 넘어섰다.

사신이 왕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금강삼매경>을 얻어왔으나 원효만이 강론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왕실의 요구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친당성향을 지닌 유학파들은 지적 능력도 원효에 비해 떨어졌으며 왕실에도 비협조적이었다.

김유신은 662년 평양성을 포위한 소정방에게 군양미를 전달한 후 답서를 받았으나 김유신 진영의 당 유학파들이 해석하지 못한 소정방의 답서를 국내파 원효가 해석하였다. 

이로써 김유신은 재빨리 철군하면서 고구려군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원효의 지식수준이 우수했음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원효의 명성이 드러나게 되어 국내파 지식인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원효가 수행했던 반룡사원효가 661년 창건한 절. 무열왕이 요석공주를 만나러 왔다는 왕재[왕이 넘은 고개]가 있다.
원효가 궁궐로 가다가 빠졌다는 문천[남천] 그리고 복원된 월정교

 

원효는 요석공주와 사랑을 하여 658년 설총을 낳았다.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654-661)와 보희부인(김유신 여동생)의 딸이었다. 

요석공주는 첫 남편 김흠운이 655년 전사하여 과부가 되었다.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달라’는 노래를 부른 원효의 의중을 알아차린 무열왕이 그를 과부 요석공주에게 데려다 준 것은 파격이었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고 무열왕은 진골로 왕이 된 최초의 인물이었다. 

무열왕이  6두품의 원효를 진골의 공주와 사랑을 할 수 있게 다리를 놓아 준 것은 원효에게도 자기가 왕이 된 것과 같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원효는 요석공주를 선택했고 그 결과 왕족과 혈연으로 맺어졌다. 원효는 스스로 권력 핵심부에 들어간 것이었다. 

무열왕은 장인이 되었고, 김유신은 처외삼촌이 된 것이니 그야말로 엘리베이트를 타고 최고 권력층에 진입하였다.

무열왕 다음에는 그의 아들 문무왕이 즉위했다. 문무왕(김법민)은 요석공주의 동생이었다. 원효와 문무왕은 처남 매부지간이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원효의 아들 설총과는 사촌지간이었고 둘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요석공주는 신문왕의 고모이자 장모였다. 

원효가 주석했던 분황사
원효가 주석했던 분황사

 

신문왕의 비는 요석공주와 첫 남편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다. 요석공주의 신라왕실데 대한 영향력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설총 역시 국내파 지식인으로 왕실에 적극 협조하였다. 원효는 불교의 큰 산이었고 그의 아들 설총은 유교의 큰 산이었으니 이는 신라왕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원효가 무열왕과 김유신 등 삼국통일 주역을 만났을 때는 격동의 시기, 격전의 시기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원효는 무열왕과 김유신의 숙제인 삼국전쟁을 수행하는데 힘을 보태야 할 처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총(658-746) 태어난 년도가 해골물 사건(661)이전이고 김유신 진영을 따라 다닌 것은 해골물 사건 이후이다. 

해골물 사건은 원효가 득도(得道)를 한 기준으로 본다. 이 시기 원효의 지식수준이 당 나라 유학파들의 지식수준을 넘어섰다.

사신이 왕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금강삼매경>을 얻어왔으나 원효만이 강론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왕실의 요구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친당성향을 지닌 유학파들은 지적 능력도 원효에 비해 떨어졌으며 왕실에도 비협조적이었다.

김유신은 662년 평양성을 포위한 소정방에게 군양미를 전달한 후 답서를 받았으나 김유신 진영의 당 유학파들이 해석하지 못한 소정방의 답서를 국내파 원효가 해석하였다. 

이로써 김유신은 재빨리 철군하면서 고구려군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원효의 지식수준이 우수했음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원효의 명성이 드러나게 되어 국내파 지식인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원효가 수행했던 반룡사원효가 661년 창건한 절. 무열왕이 요석공주를 만나러 왔다는 왕재[왕이 넘은 고개]가 있다.
원효가 수행했던 반룡사원효가 661년 창건한 절. 무열왕이 요석공주를 만나러 왔다는 왕재[왕이 넘은 고개]가 있다.

 

왕실은 원효가 활동하는데 뒷배가 되었다. 

뒷배가 된 것은 많은 절을 창건하는데 경제적인 도움이 되었다. 원효는 신라왕실을 등에 업고 불교의 대중화에 료과적으로 매진할 수 있엇다.

그 대가로 원효는 군종승려로 전쟁터를 따라다녔고, 나라의 요청에 의해 백제영역을 다니면서 망국민을 위로해준 것이다. 

이는 광주 무등산 원효봉과 원효사, 여수 향일암과 원효대, 부안 변산의 원효방, 예산 가야산 원효봉, 북한산 원효봉과 원효암, 금산 태조사, 동두천의 원효굴 등등 백제영역에 원효의 지명이 산재해 있는 이유이다.

원효가 일개 승려로 전국에 절을 지은 것이 아니라 신라 왕실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원효의 민중불교로 전쟁에 지친 민중들과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통일신라를 건설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통일신라의 숨은 일꾼이었다.

원효의 절이 고구려 지역에 없는 것은 신라와 당은 삼국전쟁에서 연합하되 전쟁이 끝나면 당은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신라는 백제 땅을 차지한다는 밀약에 따라 신라가 고구려 땅을 넘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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