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불교 철폐 막아낸 선사의 정신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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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2.08.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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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은사, 27일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 제막
총무원장 원행 스님 “숭고한 가르침 남겨 마음의 짐 벗어”




척불 정책이 극에 달하던 조선 현종 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배불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폐 위기에 처한 봉은사와 봉선사 등을 지켜낸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가 제막했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 스님)에 세워진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경내 부도전에 모셨다.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 좌우에는 봉선사의 중흥조인 영암 스님과 보우 스님이 위치해 있다. 백곡 처능 대선사 탑비 건립은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호법 원력과 주지 원명 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했다. 선사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낸 뜻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후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대선사는 조선 중기 현종의 폐불 조치에 ‘간폐석교소’를 올려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했고,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했다.

이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백곡처능 대선사는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었다. 대선사의 호법 정신은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막식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대선사께서 <간폐석교소>를 통해 남긴 기록은 현대의 불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이며 불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 논리를 뛰어넘는 명쾌하고 해박한 가르침”이라며 “편협함에서 벗어나 포용의 정책을 요구하며,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했던 대선사의 목숨을 건 충언은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 우리 후학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행 스님은 또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사부대중 모두가 대선사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며 “오늘에서야 봉은사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공훈을 후대의 기록으로 남기니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벗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봉은사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계신다.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된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진금 대화사로 참여하시여 불상 조성의 중요한 공덕주 역할을 자처했다”며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봉은사에 백곡처능대선사비가 비로소 건립되니 그 인연의 지중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오늘 대선사비 제막을 통해 조선불교의 철폐에 맞섰던 숭고한 가르침을 되새기니 참으로 뜻깊은 하루라 하겠다”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불사를 실행한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위법망구, 불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의 수승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대선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 삼백 수십 년이 되도록, 스님의 행장과 공덕을 담은 비석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담하여 차마 입을 열기 어렵다. 다행히 희미하게 전해지던 대선사의 호법성사를 본격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벽산 원행 큰스님께서 우리 종단의 제36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대선사의 호법발원이 서려 있는 봉은사에 비석을 세워드리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봉은사 출재가 대중이 기쁜 마음으로 뜻을 받들기로 하여 오늘 이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고 탑비 건립 인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명 스님은 “봉은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번 불사에 382가족이 시주질로 동참하여 정성을 모았다”며 “일깨우고 큰 뜻을 내어 이번 불사를 증명해 주신 벽산 원행 큰스님과 정종섭 전 장관님, 정도준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이 거룩한 불사에 수희 동참한 봉은사 불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제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누구도 받기 어려운 홍복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봉은사 백곡처능대선사 탑비는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지었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께서 비표를, 뒷면인 비음은 서예의 대가 정도준 서예가가 썼다.

척불 정책이 극에 달하던 조선 현종 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배불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폐 위기에 처한 봉은사와 봉선사 등을 지켜낸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가 제막했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 스님)에 세워진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경내 부도전에 모셨다.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 좌우에는 봉선사의 중흥조인 영암 스님과 보우 스님이 위치해 있다. 백곡 처능 대선사 탑비 건립은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호법 원력과 주지 원명 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했다. 선사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낸 뜻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후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척불 정책이 극에 달하던 조선 현종 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배불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폐 위기에 처한 봉은사와 봉선사 등을 지켜낸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가 제막했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 스님)에 세워진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경내 부도전에 모셨다.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 좌우에는 봉선사의 중흥조인 영암 스님과 보우 스님이 위치해 있다. 백곡 처능 대선사 탑비 건립은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호법 원력과 주지 원명 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했다. 선사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낸 뜻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후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대선사는 조선 중기 현종의 폐불 조치에 ‘간폐석교소’를 올려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했고,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했다.

이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백곡처능 대선사는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었다. 대선사의 호법 정신은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막식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대선사께서 <간폐석교소>를 통해 남긴 기록은 현대의 불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이며 불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 논리를 뛰어넘는 명쾌하고 해박한 가르침”이라며 “편협함에서 벗어나 포용의 정책을 요구하며,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했던 대선사의 목숨을 건 충언은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 우리 후학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행 스님은 또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사부대중 모두가 대선사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며 “오늘에서야 봉은사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공훈을 후대의 기록으로 남기니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벗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봉은사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계신다.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된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진금 대화사로 참여하시여 불상 조성의 중요한 공덕주 역할을 자처했다”며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봉은사에 백곡처능대선사비가 비로소 건립되니 그 인연의 지중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오늘 대선사비 제막을 통해 조선불교의 철폐에 맞섰던 숭고한 가르침을 되새기니 참으로 뜻깊은 하루라 하겠다”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불사를 실행한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위법망구, 불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의 수승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대선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 삼백 수십 년이 되도록, 스님의 행장과 공덕을 담은 비석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담하여 차마 입을 열기 어렵다. 다행히 희미하게 전해지던 대선사의 호법성사를 본격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벽산 원행 큰스님께서 우리 종단의 제36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대선사의 호법발원이 서려 있는 봉은사에 비석을 세워드리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봉은사 출재가 대중이 기쁜 마음으로 뜻을 받들기로 하여 오늘 이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고 탑비 건립 인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명 스님은 “봉은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번 불사에 382가족이 시주질로 동참하여 정성을 모았다”며 “일깨우고 큰 뜻을 내어 이번 불사를 증명해 주신 벽산 원행 큰스님과 정종섭 전 장관님, 정도준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이 거룩한 불사에 수희 동참한 봉은사 불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제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누구도 받기 어려운 홍복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봉은사 백곡처능대선사 탑비는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지었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께서 비표를, 뒷면인 비음은 서예의 대가 정도준 서예가가 썼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대선사는 조선 중기 현종의 폐불 조치에 ‘간폐석교소’를 올려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했고,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했다.

이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백곡처능 대선사는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었다. 대선사의 호법 정신은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척불 정책이 극에 달하던 조선 현종 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배불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폐 위기에 처한 봉은사와 봉선사 등을 지켜낸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가 제막했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 스님)에 세워진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경내 부도전에 모셨다.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 좌우에는 봉선사의 중흥조인 영암 스님과 보우 스님이 위치해 있다. 백곡 처능 대선사 탑비 건립은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호법 원력과 주지 원명 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했다. 선사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낸 뜻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후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대선사는 조선 중기 현종의 폐불 조치에 ‘간폐석교소’를 올려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했고,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했다.

이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백곡처능 대선사는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었다. 대선사의 호법 정신은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막식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대선사께서 <간폐석교소>를 통해 남긴 기록은 현대의 불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이며 불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 논리를 뛰어넘는 명쾌하고 해박한 가르침”이라며 “편협함에서 벗어나 포용의 정책을 요구하며,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했던 대선사의 목숨을 건 충언은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 우리 후학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행 스님은 또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사부대중 모두가 대선사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며 “오늘에서야 봉은사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공훈을 후대의 기록으로 남기니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벗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봉은사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계신다.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된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진금 대화사로 참여하시여 불상 조성의 중요한 공덕주 역할을 자처했다”며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봉은사에 백곡처능대선사비가 비로소 건립되니 그 인연의 지중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오늘 대선사비 제막을 통해 조선불교의 철폐에 맞섰던 숭고한 가르침을 되새기니 참으로 뜻깊은 하루라 하겠다”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불사를 실행한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위법망구, 불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의 수승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대선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 삼백 수십 년이 되도록, 스님의 행장과 공덕을 담은 비석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담하여 차마 입을 열기 어렵다. 다행히 희미하게 전해지던 대선사의 호법성사를 본격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벽산 원행 큰스님께서 우리 종단의 제36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대선사의 호법발원이 서려 있는 봉은사에 비석을 세워드리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봉은사 출재가 대중이 기쁜 마음으로 뜻을 받들기로 하여 오늘 이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고 탑비 건립 인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명 스님은 “봉은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번 불사에 382가족이 시주질로 동참하여 정성을 모았다”며 “일깨우고 큰 뜻을 내어 이번 불사를 증명해 주신 벽산 원행 큰스님과 정종섭 전 장관님, 정도준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이 거룩한 불사에 수희 동참한 봉은사 불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제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누구도 받기 어려운 홍복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봉은사 백곡처능대선사 탑비는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지었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께서 비표를, 뒷면인 비음은 서예의 대가 정도준 서예가가 썼다.

제막식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대선사께서 <간폐석교소>를 통해 남긴 기록은 현대의 불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이며 불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 논리를 뛰어넘는 명쾌하고 해박한 가르침”이라며 “편협함에서 벗어나 포용의 정책을 요구하며,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했던 대선사의 목숨을 건 충언은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 우리 후학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행 스님은 또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사부대중 모두가 대선사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며 “오늘에서야 봉은사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공훈을 후대의 기록으로 남기니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벗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봉은사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계신다.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된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진금 대화사로 참여하시여 불상 조성의 중요한 공덕주 역할을 자처했다”며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봉은사에 백곡처능대선사비가 비로소 건립되니 그 인연의 지중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오늘 대선사비 제막을 통해 조선불교의 철폐에 맞섰던 숭고한 가르침을 되새기니 참으로 뜻깊은 하루라 하겠다”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불사를 실행한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위법망구, 불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의 수승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대선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 삼백 수십 년이 되도록, 스님의 행장과 공덕을 담은 비석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담하여 차마 입을 열기 어렵다. 다행히 희미하게 전해지던 대선사의 호법성사를 본격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벽산 원행 큰스님께서 우리 종단의 제36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대선사의 호법발원이 서려 있는 봉은사에 비석을 세워드리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봉은사 출재가 대중이 기쁜 마음으로 뜻을 받들기로 하여 오늘 이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고 탑비 건립 인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명 스님은 “봉은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번 불사에 382가족이 시주질로 동참하여 정성을 모았다”며 “일깨우고 큰 뜻을 내어 이번 불사를 증명해 주신 벽산 원행 큰스님과 정종섭 전 장관님, 정도준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이 거룩한 불사에 수희 동참한 봉은사 불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제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누구도 받기 어려운 홍복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척불 정책이 극에 달하던 조선 현종 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배불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폐 위기에 처한 봉은사와 봉선사 등을 지켜낸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가 제막했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 스님)에 세워진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경내 부도전에 모셨다.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 좌우에는 봉선사의 중흥조인 영암 스님과 보우 스님이 위치해 있다. 백곡 처능 대선사 탑비 건립은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호법 원력과 주지 원명 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했다. 선사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낸 뜻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후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대선사는 조선 중기 현종의 폐불 조치에 ‘간폐석교소’를 올려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했고,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했다.

이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백곡처능 대선사는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었다. 대선사의 호법 정신은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막식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대선사께서 <간폐석교소>를 통해 남긴 기록은 현대의 불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이며 불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 논리를 뛰어넘는 명쾌하고 해박한 가르침”이라며 “편협함에서 벗어나 포용의 정책을 요구하며,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했던 대선사의 목숨을 건 충언은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 우리 후학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행 스님은 또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사부대중 모두가 대선사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며 “오늘에서야 봉은사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공훈을 후대의 기록으로 남기니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벗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봉은사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계신다.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된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진금 대화사로 참여하시여 불상 조성의 중요한 공덕주 역할을 자처했다”며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봉은사에 백곡처능대선사비가 비로소 건립되니 그 인연의 지중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오늘 대선사비 제막을 통해 조선불교의 철폐에 맞섰던 숭고한 가르침을 되새기니 참으로 뜻깊은 하루라 하겠다”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불사를 실행한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위법망구, 불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의 수승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대선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 삼백 수십 년이 되도록, 스님의 행장과 공덕을 담은 비석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담하여 차마 입을 열기 어렵다. 다행히 희미하게 전해지던 대선사의 호법성사를 본격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벽산 원행 큰스님께서 우리 종단의 제36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대선사의 호법발원이 서려 있는 봉은사에 비석을 세워드리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봉은사 출재가 대중이 기쁜 마음으로 뜻을 받들기로 하여 오늘 이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고 탑비 건립 인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명 스님은 “봉은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번 불사에 382가족이 시주질로 동참하여 정성을 모았다”며 “일깨우고 큰 뜻을 내어 이번 불사를 증명해 주신 벽산 원행 큰스님과 정종섭 전 장관님, 정도준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이 거룩한 불사에 수희 동참한 봉은사 불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제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누구도 받기 어려운 홍복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봉은사 백곡처능대선사 탑비는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지었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께서 비표를, 뒷면인 비음은 서예의 대가 정도준 서예가가 썼다.

봉은사 백곡처능대선사 탑비는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지었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께서 비표를, 뒷면인 비음은 서예의 대가 정도준 서예가가 썼다.





척불 정책이 극에 달하던 조선 현종 대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올려 배불 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폐 위기에 처한 봉은사와 봉선사 등을 지켜낸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가 제막했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 스님)에 세워진 백곡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경내 부도전에 모셨다. 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 좌우에는 봉선사의 중흥조인 영암 스님과 보우 스님이 위치해 있다. 백곡 처능 대선사 탑비 건립은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의 호법 원력과 주지 원명 스님의 발원으로 조성했다. 선사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낸 뜻을 후대에 기리기 위한 후학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대선사는 조선 중기 현종의 폐불 조치에 ‘간폐석교소’를 올려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했고,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했다.

이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백곡처능 대선사는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었다. 대선사의 호법 정신은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막식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대선사께서 <간폐석교소>를 통해 남긴 기록은 현대의 불자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주옥같은 가르침이며 불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 논리를 뛰어넘는 명쾌하고 해박한 가르침”이라며 “편협함에서 벗어나 포용의 정책을 요구하며,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했던 대선사의 목숨을 건 충언은 불교의 명맥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지금 우리 후학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행 스님은 또 “시간이 흘러 현대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사부대중 모두가 대선사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며 “오늘에서야 봉은사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공훈을 후대의 기록으로 남기니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벗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봉은사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계신다. 보물 제1819호로 지정된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의 진금 대화사로 참여하시여 불상 조성의 중요한 공덕주 역할을 자처했다”며 “이러한 인연이 이어져 봉은사에 백곡처능대선사비가 비로소 건립되니 그 인연의 지중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오늘 대선사비 제막을 통해 조선불교의 철폐에 맞섰던 숭고한 가르침을 되새기니 참으로 뜻깊은 하루라 하겠다”고 했다.



인사말을 하는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



불사를 실행한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대선사께서는 위법망구, 불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을 각오로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의 수승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며 “대선사께서 원적에 드신 지 삼백 수십 년이 되도록, 스님의 행장과 공덕을 담은 비석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참담하여 차마 입을 열기 어렵다. 다행히 희미하게 전해지던 대선사의 호법성사를 본격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벽산 원행 큰스님께서 우리 종단의 제36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대선사의 호법발원이 서려 있는 봉은사에 비석을 세워드리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셨고, 봉은사 출재가 대중이 기쁜 마음으로 뜻을 받들기로 하여 오늘 이 감동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고 탑비 건립 인념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명 스님은 “봉은사뿐 아니라 한국불교 역사에도 길이 남을 이번 불사에 382가족이 시주질로 동참하여 정성을 모았다”며 “일깨우고 큰 뜻을 내어 이번 불사를 증명해 주신 벽산 원행 큰스님과 정종섭 전 장관님, 정도준 작가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이 거룩한 불사에 수희 동참한 봉은사 불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를 세울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제가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것이 누구도 받기 어려운 홍복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봉은사 백곡처능대선사 탑비는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지었고,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께서 비표를, 뒷면인 비음은 서예의 대가 정도준 서예가가 썼다.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 조성불사 중수기는 다음과 같다.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 조성불사 중수기

조선 중기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또한, 1661년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비구니 스님들을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撤廢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려 하였다.

이와 같은 현종의 폐불廢佛 조치에 대하여 백곡처능白谷處能 대선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8,150자의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통해 국왕을 비판하고 온 몸으로 불교를 지켜냈다.

임금과 조정, 불교 배척에 앞장서는 일부 유생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불법佛法의 수승殊勝함과 불교존립의 당위성 역설力說을 통해 조선불교 중흥의 길을 열어주셨다.

숭유억불 시대에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며 상소한 간폐석교소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사격을 유지하고 불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이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불교와 봉은사를 지켜내신 백곡 처능 대선사의 뜻을 후대에 기리고자, 호법성사護法聖師 백곡처능 대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조계종 제36대 총무원장이신 벽산碧山 원행圓行 큰스님의 호법발원으로 백곡처능 대선사의 부도탑과 비를 조성하게 이르렀다.

이에 주지 원명스님의 발원으로 불기 2565(2021)년 신축년 1월 조성불사의 시작을 알리고 불사 모연을 시작했다.

봉은사 경내 부도탑 내에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과 영암스님 부도탑비 사이에 백곡처능 대선사의 탑과 비를 모시기로 하고, 총무원장 원행 스님께서 직접 비명과 비문을 찬하여 주시고 신심이 돈독하고 전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한 정종섭 거사와 정도준 거사가 비명을 쓰고 비문을 새겨 주었다.

불기 2566(2022)년 임인년 5월 말까지 불사 모연 접수를 완료한 이후,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제막식 일정을 미루어오다 동년 8월 27일, 음력 8월 초하루에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역사적인 제막식을 봉행하였다.

본 조성불사에는 총 382세대 사부대중의 정성이 결집되었으며, 향후 백곡처능 대선사의 위법망구한 호국호법정신이 후대에 길이 선양되도록 지속적인 역량들을 결집할 것이다.

백곡처능 대선사 부도탑 및 비 조성불사를 기하여 몇 글자 기록을 남기니 이 인연공덕으로 봉은사 사부대중의 원력이 사무쳐서 이 도량이 한국불교의 희망이 되고 모든 중생들의 안심처가 되기를 또한 세세상행 보살도를 실천하고 도량 곳곳에서 불보살이 화현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한다.

佛紀 二千五百六十六(2022)年 八月 二十七日

무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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