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정신도 수습되기 어려운데 처자를 거느리면서 온전한 정진을 할 수도 없다. 이는 승원 내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인간이다…. 정화운동은 꺼리인 쌀을 먼저 장만해야 밥을 짓는 것과 같은 일이다.” - 일엽 스님의 <어느 수도인의 회상> 가운데 ‘불교에서는 왜 정화운동을 일으켰을까’에서
근대 한국불교 대표 비구니이자 문인, 사상가인 일엽 스님(1896~1971)은 대표적인 개화기 신여성이었다. 스님은 목사의 딸로 태어나 동경 유학을 했고, 두 번의 결혼·이혼과 자유연애를 했던 한국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였다. 만공 스님을 만나 출가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은 유행가 ‘수덕사의 여승’를 낳기도 했다.
스님은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등을 통해 문인으로서 각인됐지만 그보다 먼저 스캔들의 여주인공이었다. 스님은 알려지지 않은 선객이었다. 올바른 정신을 갖고 치열하게 수행했던 선지식이었다.
스님의 수행에세이집 <어느 수도인의 회상>은 스승 만공 선사 뜻에 따라 절필한 지 30년 만에 대중포교를 위해 펴낸 책이다.
책에서 스님은 “덕숭산 참선원에서 수행하면서 보니 3년씩 갈비대를 땅에 대어보지 않는 분, 7일 낮밤을 물 한모금 안마시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 이 등이 있다”고 해 당시 덕숭산 수행가풍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스님 자신도 다른 대중 못지않게 열심히 수행했다.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방 견성암을 세운 주인공이었던 스님. 누구보다 솔직하게 수행 초기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한 사연을 털어 놓았다.
책에는 “(참선을 시작하고) 한 10여 년은 춥고 더운데서 못 견디고 체온에 맞는 곳에서는 졸려 못 베기고 겨우 엎어져 갈 때가 있었지만 목도리에 바늘을 끼워 꽂아 턱이 찔리고, 넓적다리를 꼬집어 가며 공부했다”는 자전적 고백이 그 본보기이다.
그러면서 스님은 “세속인들은 정진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말과 글로는 정진이라고 한다. 구두선이란 뜻을 짐작도 못하면서 아무데나 말과 글로 써 넘기는 것은 웃지 못 할 웃을 일”이라고도 했다.
일엽 스님은 출가 전 자유연애의 상징이었지만 출가 후에는 누구보다 엄격했던 율사·선사였다.
스님이 “부처님은 파계승으로 시주의 밥 한 그릇을 먹지 말고 차라리 무쇠 끓인 물 한 사발을 마시라고 했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500계를 모두 지켜야 한다. 남녀간 성에 관한 일이 가장 지중한 계”라고 밝힌 것이 그 본보기이다.
스님의 증손상좌인 경완 스님(수덕사 환희대ㆍ사진)는 지난 1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일엽 스님은 모든 것을 자기 내면화시킨 투철한 정신을 가졌던 우리 시대 큰스승”이라고 했다.
스님은 “일엽 스님은 출가 후 30년 동안 견성암 입승을 지냈다. 죽비를 놓지 않고 철저하게 수행했다. 남의 말을 옮기는 수준이 아닌 스스로 체득한 공부를 전하는 것이 일엽 스님 법문의 매력”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번에 스님이 출가 후 30년 만에 썼던 책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김일엽문화재단(이사장 월송 스님) 후원과 박진영 교수(美 워싱턴 아메리칸대) 원력으로 미국 하와이대 출판부에서 영문판(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으로 출간됐다”며 “일엽 스님의 정신을 통해 한국불교를 세계로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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