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6. 폴란드로 간 아이들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6. 폴란드로 간 아이들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1.07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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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건물 속에
시간에 묻혀
녹슬어 흔들리는
창문에 서린
아이들 노래

숲 속에 숨겨 진
철길처럼
역사는 없어져도
바람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

두려움에 떨며 내린 기차에서
두려움에 발길조차 떨어지지 않던
북조선으로 가는 길

남에서
북에서
한국전쟁이 만든 고아
남에선 한번도
돌려 달라 말 한 적 없고
다람쥐 수출하듯 팔려나간
돌아오지 못한 남녘 아이들

폴란드 시골 묘지에
홀로 남은 아이 김 귀덕
나이는 열세 살
푸른 눈 이방인만이
한 줌 꽃다발에 흐르는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잠든 시간을 흔들어 일으킨다.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 데이 즉 현충일이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쌍둥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90년대생이니 나의 생년월일과는 30여 년의 차이가 난다. 어릴 때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질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이 나에게로 올 때쯤 이미 많이 많이 지쳐 산부인과 과장이 만약의 위급 시에는 산모나 아이들 중 누구를 택하겠냐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또 나을 수 있지만 아이들 엄마는 다시 볼 수 없으니 아이들 엄마를 택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잃으면 아이들을 또다시 얻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체중으로 우리에게 왔고 몇 번의 수술과 일주일 한 번씩 병원을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빨리도 갔다. 누군가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며 30대엔 30킬로미터로 달리고 60대엔 60킬로미터로 달린다지만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30대 시간도 30킬로미터인 학교 앞 제한 속도로 달리지 않은 것 같다.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지만 밤에 잘 때조차 아이들 때문에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비몽사몽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 가 아이들을 길렀다고 말하기엔 많은 사람들의 손과 시간이 함께 했음을 느낀다.

몇 년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전쟁 상황의 한국의 아이들은 정말 처참하리만치 발가벗겨져 있었다. 전쟁 중에 발가벗겨져 외신을 타게 된 한국의 고아 사진처럼, 북한에서도 아이들을 전쟁을 피해 폴란드에 맡겨 놓기도 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에서 기차를 통해 폴란드로 간 북의 아이들. 그들이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나이이고 그들이 폴란드에서 크는 동안 폴란드인들은 그들과 아주 많은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박제된 사람들처럼 그때 그 시간에 박제된 기억을 꺼내 들고 그들의 무덤 앞에 눈물과 함께 꽃 한 움큼 놓은 이방인처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전쟁은 생명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전쟁 중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가장 큰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전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에선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를 낳았다. 물론 나 또한 전쟁 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에 전쟁놀이를 즐겼다. 숨바꼭질과 땅 따먹기 등 어울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골의 아이들은 서리라고 불리는 불법도 놀이로 했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 먹은 동네 청년들을 내가 본 적이 있다. 그저 숨어서 지켜 보고 나중에 그 일로 내가 봤다고 어른들 앞에서 증언해야 했는데 그 무게가 너무 커 그냥 ‘으앙’하고 울고 말았다. 그냥 그들이 훔치는 것을 어디에 숨어서 봤다고 하면 되는데 많은 눈이 나의 입만을 쳐다보니 부담감이 백배였던 것 같다. 어린이여서 보호받아야 하지만 어린이여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산에 나무하고 소 꼴을 베고 농사일을 거들고. 농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반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도공무원 아들과 대한통운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아들을 동경했다. 아이들은 때로 저수지에서 놀다 빠져 죽기도 하고 큰길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죽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곰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 가장 사납다. 그 시기가 가장 공격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다. 그것은 곰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새끼 앞에서 가장 강하다. 세계적인 선진국이고 한류의 붐을 일으킨다는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길에서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어버이들의 울부짖음이 세계를 진동하는데도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자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대타를 찾기에 바쁘다. 어쩔 수 없는 자연 상황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자식들을 보면 30대가 되어도 천방지축이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귀신 놀이라는 서양 놀이라는 할로윈 축제를 즐겼다고 그들이 우리의 자녀가 아닌 게 되지 않듯이, 우리의 젊은이가 어디 있든 무엇을 하던 국가는 그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다운 지도자와 책임자의 몫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은 유가족의 마음을 혜아려 보지만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와 유족의 슬픔에 마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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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건물 속에
시간에 묻혀
녹슬어 흔들리는
창문에 서린
아이들 노래

숲 속에 숨겨 진
철길처럼
역사는 없어져도
바람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

두려움에 떨며 내린 기차에서
두려움에 발길조차 떨어지지 않던
북조선으로 가는 길

남에서
북에서
한국전쟁이 만든 고아
남에선 한번도
돌려 달라 말 한 적 없고
다람쥐 수출하듯 팔려나간
돌아오지 못한 남녘 아이들

폴란드 시골 묘지에
홀로 남은 아이 김 귀덕
나이는 열세 살
푸른 눈 이방인만이
한 줌 꽃다발에 흐르는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잠든 시간을 흔들어 일으킨다.

 





무너진 건물 속에
시간에 묻혀
녹슬어 흔들리는
창문에 서린
아이들 노래

숲 속에 숨겨 진
철길처럼
역사는 없어져도
바람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

두려움에 떨며 내린 기차에서
두려움에 발길조차 떨어지지 않던
북조선으로 가는 길

남에서
북에서
한국전쟁이 만든 고아
남에선 한번도
돌려 달라 말 한 적 없고
다람쥐 수출하듯 팔려나간
돌아오지 못한 남녘 아이들

폴란드 시골 묘지에
홀로 남은 아이 김 귀덕
나이는 열세 살
푸른 눈 이방인만이
한 줌 꽃다발에 흐르는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잠든 시간을 흔들어 일으킨다.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 데이 즉 현충일이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쌍둥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90년대생이니 나의 생년월일과는 30여 년의 차이가 난다. 어릴 때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질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이 나에게로 올 때쯤 이미 많이 많이 지쳐 산부인과 과장이 만약의 위급 시에는 산모나 아이들 중 누구를 택하겠냐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또 나을 수 있지만 아이들 엄마는 다시 볼 수 없으니 아이들 엄마를 택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잃으면 아이들을 또다시 얻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체중으로 우리에게 왔고 몇 번의 수술과 일주일 한 번씩 병원을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빨리도 갔다. 누군가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며 30대엔 30킬로미터로 달리고 60대엔 60킬로미터로 달린다지만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30대 시간도 30킬로미터인 학교 앞 제한 속도로 달리지 않은 것 같다.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지만 밤에 잘 때조차 아이들 때문에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비몽사몽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 가 아이들을 길렀다고 말하기엔 많은 사람들의 손과 시간이 함께 했음을 느낀다.

몇 년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전쟁 상황의 한국의 아이들은 정말 처참하리만치 발가벗겨져 있었다. 전쟁 중에 발가벗겨져 외신을 타게 된 한국의 고아 사진처럼, 북한에서도 아이들을 전쟁을 피해 폴란드에 맡겨 놓기도 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에서 기차를 통해 폴란드로 간 북의 아이들. 그들이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나이이고 그들이 폴란드에서 크는 동안 폴란드인들은 그들과 아주 많은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박제된 사람들처럼 그때 그 시간에 박제된 기억을 꺼내 들고 그들의 무덤 앞에 눈물과 함께 꽃 한 움큼 놓은 이방인처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전쟁은 생명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전쟁 중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가장 큰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전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에선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를 낳았다. 물론 나 또한 전쟁 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에 전쟁놀이를 즐겼다. 숨바꼭질과 땅 따먹기 등 어울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골의 아이들은 서리라고 불리는 불법도 놀이로 했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 먹은 동네 청년들을 내가 본 적이 있다. 그저 숨어서 지켜 보고 나중에 그 일로 내가 봤다고 어른들 앞에서 증언해야 했는데 그 무게가 너무 커 그냥 ‘으앙’하고 울고 말았다. 그냥 그들이 훔치는 것을 어디에 숨어서 봤다고 하면 되는데 많은 눈이 나의 입만을 쳐다보니 부담감이 백배였던 것 같다. 어린이여서 보호받아야 하지만 어린이여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산에 나무하고 소 꼴을 베고 농사일을 거들고. 농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반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도공무원 아들과 대한통운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아들을 동경했다. 아이들은 때로 저수지에서 놀다 빠져 죽기도 하고 큰길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죽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곰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 가장 사납다. 그 시기가 가장 공격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다. 그것은 곰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새끼 앞에서 가장 강하다. 세계적인 선진국이고 한류의 붐을 일으킨다는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길에서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어버이들의 울부짖음이 세계를 진동하는데도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자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대타를 찾기에 바쁘다. 어쩔 수 없는 자연 상황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자식들을 보면 30대가 되어도 천방지축이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귀신 놀이라는 서양 놀이라는 할로윈 축제를 즐겼다고 그들이 우리의 자녀가 아닌 게 되지 않듯이, 우리의 젊은이가 어디 있든 무엇을 하던 국가는 그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다운 지도자와 책임자의 몫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은 유가족의 마음을 혜아려 보지만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와 유족의 슬픔에 마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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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 데이 즉 현충일이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쌍둥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90년대생이니 나의 생년월일과는 30여 년의 차이가 난다. 어릴 때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질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이 나에게로 올 때쯤 이미 많이 많이 지쳐 산부인과 과장이 만약의 위급 시에는 산모나 아이들 중 누구를 택하겠냐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또 나을 수 있지만 아이들 엄마는 다시 볼 수 없으니 아이들 엄마를 택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잃으면 아이들을 또다시 얻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체중으로 우리에게 왔고 몇 번의 수술과 일주일 한 번씩 병원을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빨리도 갔다. 누군가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며 30대엔 30킬로미터로 달리고 60대엔 60킬로미터로 달린다지만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30대 시간도 30킬로미터인 학교 앞 제한 속도로 달리지 않은 것 같다.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지만 밤에 잘 때조차 아이들 때문에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비몽사몽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 가 아이들을 길렀다고 말하기엔 많은 사람들의 손과 시간이 함께 했음을 느낀다.

몇 년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전쟁 상황의 한국의 아이들은 정말 처참하리만치 발가벗겨져 있었다. 전쟁 중에 발가벗겨져 외신을 타게 된 한국의 고아 사진처럼, 북한에서도 아이들을 전쟁을 피해 폴란드에 맡겨 놓기도 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에서 기차를 통해 폴란드로 간 북의 아이들. 그들이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나이이고 그들이 폴란드에서 크는 동안 폴란드인들은 그들과 아주 많은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박제된 사람들처럼 그때 그 시간에 박제된 기억을 꺼내 들고 그들의 무덤 앞에 눈물과 함께 꽃 한 움큼 놓은 이방인처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전쟁은 생명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전쟁 중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가장 큰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전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에선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를 낳았다. 물론 나 또한 전쟁 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에 전쟁놀이를 즐겼다. 숨바꼭질과 땅 따먹기 등 어울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골의 아이들은 서리라고 불리는 불법도 놀이로 했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 먹은 동네 청년들을 내가 본 적이 있다. 그저 숨어서 지켜 보고 나중에 그 일로 내가 봤다고 어른들 앞에서 증언해야 했는데 그 무게가 너무 커 그냥 ‘으앙’하고 울고 말았다. 그냥 그들이 훔치는 것을 어디에 숨어서 봤다고 하면 되는데 많은 눈이 나의 입만을 쳐다보니 부담감이 백배였던 것 같다. 어린이여서 보호받아야 하지만 어린이여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산에 나무하고 소 꼴을 베고 농사일을 거들고. 농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반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도공무원 아들과 대한통운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아들을 동경했다. 아이들은 때로 저수지에서 놀다 빠져 죽기도 하고 큰길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죽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무너진 건물 속에
시간에 묻혀
녹슬어 흔들리는
창문에 서린
아이들 노래

숲 속에 숨겨 진
철길처럼
역사는 없어져도
바람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

두려움에 떨며 내린 기차에서
두려움에 발길조차 떨어지지 않던
북조선으로 가는 길

남에서
북에서
한국전쟁이 만든 고아
남에선 한번도
돌려 달라 말 한 적 없고
다람쥐 수출하듯 팔려나간
돌아오지 못한 남녘 아이들

폴란드 시골 묘지에
홀로 남은 아이 김 귀덕
나이는 열세 살
푸른 눈 이방인만이
한 줌 꽃다발에 흐르는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잠든 시간을 흔들어 일으킨다.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 데이 즉 현충일이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쌍둥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90년대생이니 나의 생년월일과는 30여 년의 차이가 난다. 어릴 때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질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이 나에게로 올 때쯤 이미 많이 많이 지쳐 산부인과 과장이 만약의 위급 시에는 산모나 아이들 중 누구를 택하겠냐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또 나을 수 있지만 아이들 엄마는 다시 볼 수 없으니 아이들 엄마를 택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잃으면 아이들을 또다시 얻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체중으로 우리에게 왔고 몇 번의 수술과 일주일 한 번씩 병원을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빨리도 갔다. 누군가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며 30대엔 30킬로미터로 달리고 60대엔 60킬로미터로 달린다지만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30대 시간도 30킬로미터인 학교 앞 제한 속도로 달리지 않은 것 같다.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지만 밤에 잘 때조차 아이들 때문에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비몽사몽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 가 아이들을 길렀다고 말하기엔 많은 사람들의 손과 시간이 함께 했음을 느낀다.

몇 년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전쟁 상황의 한국의 아이들은 정말 처참하리만치 발가벗겨져 있었다. 전쟁 중에 발가벗겨져 외신을 타게 된 한국의 고아 사진처럼, 북한에서도 아이들을 전쟁을 피해 폴란드에 맡겨 놓기도 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에서 기차를 통해 폴란드로 간 북의 아이들. 그들이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나이이고 그들이 폴란드에서 크는 동안 폴란드인들은 그들과 아주 많은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박제된 사람들처럼 그때 그 시간에 박제된 기억을 꺼내 들고 그들의 무덤 앞에 눈물과 함께 꽃 한 움큼 놓은 이방인처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전쟁은 생명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전쟁 중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가장 큰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전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에선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를 낳았다. 물론 나 또한 전쟁 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에 전쟁놀이를 즐겼다. 숨바꼭질과 땅 따먹기 등 어울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골의 아이들은 서리라고 불리는 불법도 놀이로 했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 먹은 동네 청년들을 내가 본 적이 있다. 그저 숨어서 지켜 보고 나중에 그 일로 내가 봤다고 어른들 앞에서 증언해야 했는데 그 무게가 너무 커 그냥 ‘으앙’하고 울고 말았다. 그냥 그들이 훔치는 것을 어디에 숨어서 봤다고 하면 되는데 많은 눈이 나의 입만을 쳐다보니 부담감이 백배였던 것 같다. 어린이여서 보호받아야 하지만 어린이여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산에 나무하고 소 꼴을 베고 농사일을 거들고. 농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반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도공무원 아들과 대한통운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아들을 동경했다. 아이들은 때로 저수지에서 놀다 빠져 죽기도 하고 큰길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죽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곰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 가장 사납다. 그 시기가 가장 공격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다. 그것은 곰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새끼 앞에서 가장 강하다. 세계적인 선진국이고 한류의 붐을 일으킨다는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길에서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어버이들의 울부짖음이 세계를 진동하는데도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자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대타를 찾기에 바쁘다. 어쩔 수 없는 자연 상황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자식들을 보면 30대가 되어도 천방지축이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귀신 놀이라는 서양 놀이라는 할로윈 축제를 즐겼다고 그들이 우리의 자녀가 아닌 게 되지 않듯이, 우리의 젊은이가 어디 있든 무엇을 하던 국가는 그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다운 지도자와 책임자의 몫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은 유가족의 마음을 혜아려 보지만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와 유족의 슬픔에 마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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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 가장 사납다. 그 시기가 가장 공격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다. 그것은 곰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새끼 앞에서 가장 강하다. 세계적인 선진국이고 한류의 붐을 일으킨다는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길에서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어버이들의 울부짖음이 세계를 진동하는데도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자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대타를 찾기에 바쁘다. 어쩔 수 없는 자연 상황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자식들을 보면 30대가 되어도 천방지축이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귀신 놀이라는 서양 놀이라는 할로윈 축제를 즐겼다고 그들이 우리의 자녀가 아닌 게 되지 않듯이, 우리의 젊은이가 어디 있든 무엇을 하던 국가는 그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다운 지도자와 책임자의 몫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은 유가족의 마음을 혜아려 보지만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와 유족의 슬픔에 마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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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건물 속에
시간에 묻혀
녹슬어 흔들리는
창문에 서린
아이들 노래

숲 속에 숨겨 진
철길처럼
역사는 없어져도
바람 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

두려움에 떨며 내린 기차에서
두려움에 발길조차 떨어지지 않던
북조선으로 가는 길

남에서
북에서
한국전쟁이 만든 고아
남에선 한번도
돌려 달라 말 한 적 없고
다람쥐 수출하듯 팔려나간
돌아오지 못한 남녘 아이들

폴란드 시골 묘지에
홀로 남은 아이 김 귀덕
나이는 열세 살
푸른 눈 이방인만이
한 줌 꽃다발에 흐르는 눈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잠든 시간을 흔들어 일으킨다.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 데이 즉 현충일이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쌍둥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90년대생이니 나의 생년월일과는 30여 년의 차이가 난다. 어릴 때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질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이 나에게로 올 때쯤 이미 많이 많이 지쳐 산부인과 과장이 만약의 위급 시에는 산모나 아이들 중 누구를 택하겠냐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또 나을 수 있지만 아이들 엄마는 다시 볼 수 없으니 아이들 엄마를 택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잃으면 아이들을 또다시 얻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체중으로 우리에게 왔고 몇 번의 수술과 일주일 한 번씩 병원을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빨리도 갔다. 누군가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며 30대엔 30킬로미터로 달리고 60대엔 60킬로미터로 달린다지만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30대 시간도 30킬로미터인 학교 앞 제한 속도로 달리지 않은 것 같다. 눈을 뜨면 또 다른 세상이지만 밤에 잘 때조차 아이들 때문에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비몽사몽인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 가 아이들을 길렀다고 말하기엔 많은 사람들의 손과 시간이 함께 했음을 느낀다.

몇 년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전쟁 상황의 한국의 아이들은 정말 처참하리만치 발가벗겨져 있었다. 전쟁 중에 발가벗겨져 외신을 타게 된 한국의 고아 사진처럼, 북한에서도 아이들을 전쟁을 피해 폴란드에 맡겨 놓기도 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북에서 기차를 통해 폴란드로 간 북의 아이들. 그들이 이미 할아버지가 된 나이이고 그들이 폴란드에서 크는 동안 폴란드인들은 그들과 아주 많은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시간이 박제된 사람들처럼 그때 그 시간에 박제된 기억을 꺼내 들고 그들의 무덤 앞에 눈물과 함께 꽃 한 움큼 놓은 이방인처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전쟁은 생명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전쟁 중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가장 큰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전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에선 수백만의 전쟁 희생자를 낳았다. 물론 나 또한 전쟁 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에 전쟁놀이를 즐겼다. 숨바꼭질과 땅 따먹기 등 어울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골의 아이들은 서리라고 불리는 불법도 놀이로 했다.

한 번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훔쳐다 먹은 동네 청년들을 내가 본 적이 있다. 그저 숨어서 지켜 보고 나중에 그 일로 내가 봤다고 어른들 앞에서 증언해야 했는데 그 무게가 너무 커 그냥 ‘으앙’하고 울고 말았다. 그냥 그들이 훔치는 것을 어디에 숨어서 봤다고 하면 되는데 많은 눈이 나의 입만을 쳐다보니 부담감이 백배였던 것 같다. 어린이여서 보호받아야 하지만 어린이여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산에 나무하고 소 꼴을 베고 농사일을 거들고. 농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반 농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철도공무원 아들과 대한통운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아들을 동경했다. 아이들은 때로 저수지에서 놀다 빠져 죽기도 하고 큰길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죽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곰은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 가장 사납다. 그 시기가 가장 공격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 자식을 지키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다. 그것은 곰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새끼 앞에서 가장 강하다. 세계적인 선진국이고 한류의 붐을 일으킨다는 대한민국의 서울 한복판 길에서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 어버이들의 울부짖음이 세계를 진동하는데도 책임을 져야 하는 책임자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대타를 찾기에 바쁘다. 어쩔 수 없는 자연 상황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자식들을 보면 30대가 되어도 천방지축이다. 부모들은 그들을 지켜 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귀신 놀이라는 서양 놀이라는 할로윈 축제를 즐겼다고 그들이 우리의 자녀가 아닌 게 되지 않듯이, 우리의 젊은이가 어디 있든 무엇을 하던 국가는 그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참다운 지도자와 책임자의 몫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거나 중경상을 입은 유가족의 마음을 혜아려 보지만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희생자와 유족의 슬픔에 마음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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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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