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5. 꽃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고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5. 꽃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고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3.2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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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내 마음하고 상관없이 피듯

한겨울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보리처럼
살아 있는 생명은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그렇게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벌집처럼 촘촘하게 아파트를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
벌집은 몇 달만 비바람 맞으면 거름처럼 곰삭아 없어 지지만
사람들이 살다 간 집들은 흉가라 부른다.

살아서도 아수라 같은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도 아수라장
우리가 갈 곳조차 아수라 같은 지옥은 아닐는지,

꽃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봄날에
마음 깊은 곳에 성황당 거미줄은 언제나 치워지려나.

 







#작가의 변
올해는 벗꽃이 늦게 핀다. 기다리는 님을 기다리듯 그리 춥지도 않았던 겨울이 내겐 아주 추웠나 보다. 마음이 떠나면 물건조차 생기를 잃듯이 마음을 두지 못한 것들은 홀로 우주 유영을 하듯 떠다니는 것만 같다. 가을부터 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못 하고 대기하는 심정으로 검사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시간이 이젠 모두 결정되어 수입도 없이 노는 환자가 되어 버리니 내가 쓸모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라고, 남편이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하다가 몸이 부실해져서, 아내가 든 쇼핑백도 무겁다고 내게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쓸모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괜찮은 왼쪽 팔로 10킬로그램 쌀을 한 손으로 들어 멀지도 않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며칠 동안 가슴이 아파서 고생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으로 크고 세상살이를 모방하면서 배우지만,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지도 오래여서 가끔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너도 내 나이 되어 봐야 안다”던 말들이 슬쩍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보고 듣는 것이 지식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은 동네의 밭과 논을 다 사서 내 왕국을 만드는 꿈도 가졌었다. 물론 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팔아 버린 땅들이 어린 시절에 왜 계속 우리 것이 될 줄 알았던 것인지. 더 사 모아서 그 골짜기를 나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잠시만이라도 한 것은 당시의 몽상이자 꿈이고 잠시의 행복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사고로 원하지 않는 이사를 하고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었던 그 고향 땅 조그만 골짜기는 잊으려 노력도 했고, 살다 보니 까맣게 잊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외국에 살다 보니 이사했던 마을보다 태어난 생가가 있는 마을 제천시 산곡동 곡담 마을이 기억에서 새록새록 새싹을 피우듯 피어오른다. 아마도 그곳에 살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자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잠에서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생생하게 그 시간과 그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니 비 오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묻혔던 날이다. 동생과 나는 윗방 작은 공간에서 일찍 잠들었다가 아버지의 비명에 깼다. 동생이 깨지나 않나 살피면서 문틈으로 밖을 보니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팔을 문지방에 올려놓고 부러뜨려버리겠다고 소리하고 속옷 바람의 아버지는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안방에 자고 있어야 할 누나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엄마를 때리려고 하는 것을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엄마한테 그러면 되냐”고 했는데, 말처럼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비는 퍼붓고 이대로 죽나 보다 하면서 잠시 틈이 있을 때 소리를 질렀고 상가에서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 목소리에 팬티 바람에 나와서 “뭐하냐”고 하니까 어머니 목을 놓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비 오는 날 개 패듯이 구타를 했다는 데 다행히 이웃이 달려오고 아랫마을로 달려간 누나도 사람들 데리고 오고 아침에 경찰이 오고 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부모님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날들이) 우리 가족의 변곡점이 됐다. 누나가 충격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땅을 팔아 입원비를 마련하고. 그냥 버리다시피 나의 생가를 떠나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성공했다가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평생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건물주 자녀들도 있다. 일을 안 한다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살고 싶은 곳에 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해서 쌀이 모자라 감자를 얻고 보리를 섞어 보리밥을 먹고, 팬티조차 입지 못하고 홑겹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기계 뜨개질한 바지를 따뜻할 거라고 입혀 준 엄마와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 추워서 다리가 얼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이는 부딪쳐서 딱딱거리던 그 시절이 어쩌면 행복 지수는 잘 먹고 잘사는 지금보다 높을지 모른다.

오욕칠정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먹방’이나 유명 브랜드에 집착하고 고급 아파트를 삶에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여자나 또 다른 즐거움을 위해 마약 등에 빠지기도 하고, 오래 살려고 세상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고 건강 보조제도 있는 대로 챙긴다. 하지만 내일 아니 몇 분 후의 나의 삶과 죽음조차 알지 못한다. 해탈 열반은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부처님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생존 본능에 의해 동물적 감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해탈하겠다는 마음 자체도 하나의 욕심이고 보면 공의 세계는 멀고도 멀다. 번뇌하고 또 번뇌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생각인데 그 생각조차 안 하면 다시 동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늘 선계에도 존재한다는 색계는 지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탐·진·치의 굴레에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마음을 닦으려는 마음은 늘 충돌한다. 현실과 이상처럼 말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에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회사의 시간이듯이 집에 있어도 부모여서 아빠여서, 아들이어서 해야 할 일들은 늘 존재한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마음, 아니 아내의 마음조차 모르는 때가 많다. 그래서 말다툼하고 싸우게 되기도 한다. 마음을 들여 볼 수 있는 타심통이 있다면 좋을까? 그만큼 근심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일을 다 듣고 봐서 알게 되니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등을 통달한 신통력을 얻은 도사 같이 살지만 세상은 더 시끄럽다. 옛날에 비해 손전화만 가지고 있으면 위에 세 가지 신통력은 다들 갖춘 셈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읽지 못한다.

꽃이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듯이 세상은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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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내 마음하고 상관없이 피듯

한겨울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보리처럼
살아 있는 생명은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그렇게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벌집처럼 촘촘하게 아파트를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
벌집은 몇 달만 비바람 맞으면 거름처럼 곰삭아 없어 지지만
사람들이 살다 간 집들은 흉가라 부른다.

살아서도 아수라 같은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도 아수라장
우리가 갈 곳조차 아수라 같은 지옥은 아닐는지,

꽃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봄날에
마음 깊은 곳에 성황당 거미줄은 언제나 치워지려나.

 





 

꽃이 내 마음하고 상관없이 피듯

한겨울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보리처럼
살아 있는 생명은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그렇게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벌집처럼 촘촘하게 아파트를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
벌집은 몇 달만 비바람 맞으면 거름처럼 곰삭아 없어 지지만
사람들이 살다 간 집들은 흉가라 부른다.

살아서도 아수라 같은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도 아수라장
우리가 갈 곳조차 아수라 같은 지옥은 아닐는지,

꽃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봄날에
마음 깊은 곳에 성황당 거미줄은 언제나 치워지려나.

 







#작가의 변
올해는 벗꽃이 늦게 핀다. 기다리는 님을 기다리듯 그리 춥지도 않았던 겨울이 내겐 아주 추웠나 보다. 마음이 떠나면 물건조차 생기를 잃듯이 마음을 두지 못한 것들은 홀로 우주 유영을 하듯 떠다니는 것만 같다. 가을부터 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못 하고 대기하는 심정으로 검사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시간이 이젠 모두 결정되어 수입도 없이 노는 환자가 되어 버리니 내가 쓸모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라고, 남편이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하다가 몸이 부실해져서, 아내가 든 쇼핑백도 무겁다고 내게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쓸모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괜찮은 왼쪽 팔로 10킬로그램 쌀을 한 손으로 들어 멀지도 않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며칠 동안 가슴이 아파서 고생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으로 크고 세상살이를 모방하면서 배우지만,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지도 오래여서 가끔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너도 내 나이 되어 봐야 안다”던 말들이 슬쩍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보고 듣는 것이 지식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은 동네의 밭과 논을 다 사서 내 왕국을 만드는 꿈도 가졌었다. 물론 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팔아 버린 땅들이 어린 시절에 왜 계속 우리 것이 될 줄 알았던 것인지. 더 사 모아서 그 골짜기를 나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잠시만이라도 한 것은 당시의 몽상이자 꿈이고 잠시의 행복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사고로 원하지 않는 이사를 하고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었던 그 고향 땅 조그만 골짜기는 잊으려 노력도 했고, 살다 보니 까맣게 잊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외국에 살다 보니 이사했던 마을보다 태어난 생가가 있는 마을 제천시 산곡동 곡담 마을이 기억에서 새록새록 새싹을 피우듯 피어오른다. 아마도 그곳에 살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자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잠에서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생생하게 그 시간과 그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니 비 오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묻혔던 날이다. 동생과 나는 윗방 작은 공간에서 일찍 잠들었다가 아버지의 비명에 깼다. 동생이 깨지나 않나 살피면서 문틈으로 밖을 보니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팔을 문지방에 올려놓고 부러뜨려버리겠다고 소리하고 속옷 바람의 아버지는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안방에 자고 있어야 할 누나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엄마를 때리려고 하는 것을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엄마한테 그러면 되냐”고 했는데, 말처럼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비는 퍼붓고 이대로 죽나 보다 하면서 잠시 틈이 있을 때 소리를 질렀고 상가에서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 목소리에 팬티 바람에 나와서 “뭐하냐”고 하니까 어머니 목을 놓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비 오는 날 개 패듯이 구타를 했다는 데 다행히 이웃이 달려오고 아랫마을로 달려간 누나도 사람들 데리고 오고 아침에 경찰이 오고 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부모님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날들이) 우리 가족의 변곡점이 됐다. 누나가 충격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땅을 팔아 입원비를 마련하고. 그냥 버리다시피 나의 생가를 떠나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성공했다가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평생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건물주 자녀들도 있다. 일을 안 한다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살고 싶은 곳에 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해서 쌀이 모자라 감자를 얻고 보리를 섞어 보리밥을 먹고, 팬티조차 입지 못하고 홑겹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기계 뜨개질한 바지를 따뜻할 거라고 입혀 준 엄마와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 추워서 다리가 얼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이는 부딪쳐서 딱딱거리던 그 시절이 어쩌면 행복 지수는 잘 먹고 잘사는 지금보다 높을지 모른다.

오욕칠정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먹방’이나 유명 브랜드에 집착하고 고급 아파트를 삶에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여자나 또 다른 즐거움을 위해 마약 등에 빠지기도 하고, 오래 살려고 세상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고 건강 보조제도 있는 대로 챙긴다. 하지만 내일 아니 몇 분 후의 나의 삶과 죽음조차 알지 못한다. 해탈 열반은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부처님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생존 본능에 의해 동물적 감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해탈하겠다는 마음 자체도 하나의 욕심이고 보면 공의 세계는 멀고도 멀다. 번뇌하고 또 번뇌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생각인데 그 생각조차 안 하면 다시 동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늘 선계에도 존재한다는 색계는 지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탐·진·치의 굴레에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마음을 닦으려는 마음은 늘 충돌한다. 현실과 이상처럼 말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에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회사의 시간이듯이 집에 있어도 부모여서 아빠여서, 아들이어서 해야 할 일들은 늘 존재한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마음, 아니 아내의 마음조차 모르는 때가 많다. 그래서 말다툼하고 싸우게 되기도 한다. 마음을 들여 볼 수 있는 타심통이 있다면 좋을까? 그만큼 근심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일을 다 듣고 봐서 알게 되니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등을 통달한 신통력을 얻은 도사 같이 살지만 세상은 더 시끄럽다. 옛날에 비해 손전화만 가지고 있으면 위에 세 가지 신통력은 다들 갖춘 셈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읽지 못한다.

꽃이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듯이 세상은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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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올해는 벗꽃이 늦게 핀다. 기다리는 님을 기다리듯 그리 춥지도 않았던 겨울이 내겐 아주 추웠나 보다. 마음이 떠나면 물건조차 생기를 잃듯이 마음을 두지 못한 것들은 홀로 우주 유영을 하듯 떠다니는 것만 같다. 가을부터 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못 하고 대기하는 심정으로 검사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시간이 이젠 모두 결정되어 수입도 없이 노는 환자가 되어 버리니 내가 쓸모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라고, 남편이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하다가 몸이 부실해져서, 아내가 든 쇼핑백도 무겁다고 내게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쓸모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괜찮은 왼쪽 팔로 10킬로그램 쌀을 한 손으로 들어 멀지도 않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며칠 동안 가슴이 아파서 고생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으로 크고 세상살이를 모방하면서 배우지만,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지도 오래여서 가끔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너도 내 나이 되어 봐야 안다”던 말들이 슬쩍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보고 듣는 것이 지식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은 동네의 밭과 논을 다 사서 내 왕국을 만드는 꿈도 가졌었다. 물론 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팔아 버린 땅들이 어린 시절에 왜 계속 우리 것이 될 줄 알았던 것인지. 더 사 모아서 그 골짜기를 나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잠시만이라도 한 것은 당시의 몽상이자 꿈이고 잠시의 행복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사고로 원하지 않는 이사를 하고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었던 그 고향 땅 조그만 골짜기는 잊으려 노력도 했고, 살다 보니 까맣게 잊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외국에 살다 보니 이사했던 마을보다 태어난 생가가 있는 마을 제천시 산곡동 곡담 마을이 기억에서 새록새록 새싹을 피우듯 피어오른다. 아마도 그곳에 살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자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잠에서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생생하게 그 시간과 그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니 비 오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묻혔던 날이다. 동생과 나는 윗방 작은 공간에서 일찍 잠들었다가 아버지의 비명에 깼다. 동생이 깨지나 않나 살피면서 문틈으로 밖을 보니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팔을 문지방에 올려놓고 부러뜨려버리겠다고 소리하고 속옷 바람의 아버지는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안방에 자고 있어야 할 누나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엄마를 때리려고 하는 것을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엄마한테 그러면 되냐”고 했는데, 말처럼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비는 퍼붓고 이대로 죽나 보다 하면서 잠시 틈이 있을 때 소리를 질렀고 상가에서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 목소리에 팬티 바람에 나와서 “뭐하냐”고 하니까 어머니 목을 놓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비 오는 날 개 패듯이 구타를 했다는 데 다행히 이웃이 달려오고 아랫마을로 달려간 누나도 사람들 데리고 오고 아침에 경찰이 오고 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부모님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날들이) 우리 가족의 변곡점이 됐다. 누나가 충격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땅을 팔아 입원비를 마련하고. 그냥 버리다시피 나의 생가를 떠나게 됐다.





 

꽃이 내 마음하고 상관없이 피듯

한겨울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보리처럼
살아 있는 생명은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그렇게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벌집처럼 촘촘하게 아파트를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
벌집은 몇 달만 비바람 맞으면 거름처럼 곰삭아 없어 지지만
사람들이 살다 간 집들은 흉가라 부른다.

살아서도 아수라 같은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도 아수라장
우리가 갈 곳조차 아수라 같은 지옥은 아닐는지,

꽃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봄날에
마음 깊은 곳에 성황당 거미줄은 언제나 치워지려나.

 







#작가의 변
올해는 벗꽃이 늦게 핀다. 기다리는 님을 기다리듯 그리 춥지도 않았던 겨울이 내겐 아주 추웠나 보다. 마음이 떠나면 물건조차 생기를 잃듯이 마음을 두지 못한 것들은 홀로 우주 유영을 하듯 떠다니는 것만 같다. 가을부터 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못 하고 대기하는 심정으로 검사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시간이 이젠 모두 결정되어 수입도 없이 노는 환자가 되어 버리니 내가 쓸모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라고, 남편이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하다가 몸이 부실해져서, 아내가 든 쇼핑백도 무겁다고 내게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쓸모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괜찮은 왼쪽 팔로 10킬로그램 쌀을 한 손으로 들어 멀지도 않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며칠 동안 가슴이 아파서 고생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으로 크고 세상살이를 모방하면서 배우지만,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지도 오래여서 가끔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너도 내 나이 되어 봐야 안다”던 말들이 슬쩍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보고 듣는 것이 지식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은 동네의 밭과 논을 다 사서 내 왕국을 만드는 꿈도 가졌었다. 물론 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팔아 버린 땅들이 어린 시절에 왜 계속 우리 것이 될 줄 알았던 것인지. 더 사 모아서 그 골짜기를 나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잠시만이라도 한 것은 당시의 몽상이자 꿈이고 잠시의 행복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사고로 원하지 않는 이사를 하고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었던 그 고향 땅 조그만 골짜기는 잊으려 노력도 했고, 살다 보니 까맣게 잊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외국에 살다 보니 이사했던 마을보다 태어난 생가가 있는 마을 제천시 산곡동 곡담 마을이 기억에서 새록새록 새싹을 피우듯 피어오른다. 아마도 그곳에 살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자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잠에서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생생하게 그 시간과 그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니 비 오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묻혔던 날이다. 동생과 나는 윗방 작은 공간에서 일찍 잠들었다가 아버지의 비명에 깼다. 동생이 깨지나 않나 살피면서 문틈으로 밖을 보니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팔을 문지방에 올려놓고 부러뜨려버리겠다고 소리하고 속옷 바람의 아버지는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안방에 자고 있어야 할 누나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엄마를 때리려고 하는 것을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엄마한테 그러면 되냐”고 했는데, 말처럼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비는 퍼붓고 이대로 죽나 보다 하면서 잠시 틈이 있을 때 소리를 질렀고 상가에서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 목소리에 팬티 바람에 나와서 “뭐하냐”고 하니까 어머니 목을 놓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비 오는 날 개 패듯이 구타를 했다는 데 다행히 이웃이 달려오고 아랫마을로 달려간 누나도 사람들 데리고 오고 아침에 경찰이 오고 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부모님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날들이) 우리 가족의 변곡점이 됐다. 누나가 충격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땅을 팔아 입원비를 마련하고. 그냥 버리다시피 나의 생가를 떠나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성공했다가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평생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건물주 자녀들도 있다. 일을 안 한다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살고 싶은 곳에 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해서 쌀이 모자라 감자를 얻고 보리를 섞어 보리밥을 먹고, 팬티조차 입지 못하고 홑겹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기계 뜨개질한 바지를 따뜻할 거라고 입혀 준 엄마와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 추워서 다리가 얼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이는 부딪쳐서 딱딱거리던 그 시절이 어쩌면 행복 지수는 잘 먹고 잘사는 지금보다 높을지 모른다.

오욕칠정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먹방’이나 유명 브랜드에 집착하고 고급 아파트를 삶에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여자나 또 다른 즐거움을 위해 마약 등에 빠지기도 하고, 오래 살려고 세상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고 건강 보조제도 있는 대로 챙긴다. 하지만 내일 아니 몇 분 후의 나의 삶과 죽음조차 알지 못한다. 해탈 열반은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부처님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생존 본능에 의해 동물적 감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해탈하겠다는 마음 자체도 하나의 욕심이고 보면 공의 세계는 멀고도 멀다. 번뇌하고 또 번뇌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생각인데 그 생각조차 안 하면 다시 동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늘 선계에도 존재한다는 색계는 지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탐·진·치의 굴레에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마음을 닦으려는 마음은 늘 충돌한다. 현실과 이상처럼 말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에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회사의 시간이듯이 집에 있어도 부모여서 아빠여서, 아들이어서 해야 할 일들은 늘 존재한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마음, 아니 아내의 마음조차 모르는 때가 많다. 그래서 말다툼하고 싸우게 되기도 한다. 마음을 들여 볼 수 있는 타심통이 있다면 좋을까? 그만큼 근심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일을 다 듣고 봐서 알게 되니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등을 통달한 신통력을 얻은 도사 같이 살지만 세상은 더 시끄럽다. 옛날에 비해 손전화만 가지고 있으면 위에 세 가지 신통력은 다들 갖춘 셈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읽지 못한다.

꽃이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듯이 세상은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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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성공했다가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평생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건물주 자녀들도 있다. 일을 안 한다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살고 싶은 곳에 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해서 쌀이 모자라 감자를 얻고 보리를 섞어 보리밥을 먹고, 팬티조차 입지 못하고 홑겹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기계 뜨개질한 바지를 따뜻할 거라고 입혀 준 엄마와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 추워서 다리가 얼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이는 부딪쳐서 딱딱거리던 그 시절이 어쩌면 행복 지수는 잘 먹고 잘사는 지금보다 높을지 모른다.

오욕칠정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먹방’이나 유명 브랜드에 집착하고 고급 아파트를 삶에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여자나 또 다른 즐거움을 위해 마약 등에 빠지기도 하고, 오래 살려고 세상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고 건강 보조제도 있는 대로 챙긴다. 하지만 내일 아니 몇 분 후의 나의 삶과 죽음조차 알지 못한다. 해탈 열반은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부처님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생존 본능에 의해 동물적 감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해탈하겠다는 마음 자체도 하나의 욕심이고 보면 공의 세계는 멀고도 멀다. 번뇌하고 또 번뇌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생각인데 그 생각조차 안 하면 다시 동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늘 선계에도 존재한다는 색계는 지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탐·진·치의 굴레에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마음을 닦으려는 마음은 늘 충돌한다. 현실과 이상처럼 말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에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회사의 시간이듯이 집에 있어도 부모여서 아빠여서, 아들이어서 해야 할 일들은 늘 존재한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마음, 아니 아내의 마음조차 모르는 때가 많다. 그래서 말다툼하고 싸우게 되기도 한다. 마음을 들여 볼 수 있는 타심통이 있다면 좋을까? 그만큼 근심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일을 다 듣고 봐서 알게 되니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등을 통달한 신통력을 얻은 도사 같이 살지만 세상은 더 시끄럽다. 옛날에 비해 손전화만 가지고 있으면 위에 세 가지 신통력은 다들 갖춘 셈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읽지 못한다.

꽃이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듯이 세상은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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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내 마음하고 상관없이 피듯

한겨울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보리처럼
살아 있는 생명은 물이 얼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그렇게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벌집처럼 촘촘하게 아파트를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
벌집은 몇 달만 비바람 맞으면 거름처럼 곰삭아 없어 지지만
사람들이 살다 간 집들은 흉가라 부른다.

살아서도 아수라 같은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도 아수라장
우리가 갈 곳조차 아수라 같은 지옥은 아닐는지,

꽃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봄날에
마음 깊은 곳에 성황당 거미줄은 언제나 치워지려나.

 







#작가의 변
올해는 벗꽃이 늦게 핀다. 기다리는 님을 기다리듯 그리 춥지도 않았던 겨울이 내겐 아주 추웠나 보다. 마음이 떠나면 물건조차 생기를 잃듯이 마음을 두지 못한 것들은 홀로 우주 유영을 하듯 떠다니는 것만 같다. 가을부터 집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못 하고 대기하는 심정으로 검사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시간이 이젠 모두 결정되어 수입도 없이 노는 환자가 되어 버리니 내가 쓸모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라고, 남편이라고 힘쓰는 일은 도맡아 하다가 몸이 부실해져서, 아내가 든 쇼핑백도 무겁다고 내게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쓸모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괜찮은 왼쪽 팔로 10킬로그램 쌀을 한 손으로 들어 멀지도 않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며칠 동안 가슴이 아파서 고생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으로 크고 세상살이를 모방하면서 배우지만, 이젠 부모님이 안 계신지도 오래여서 가끔 “부모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너도 내 나이 되어 봐야 안다”던 말들이 슬쩍슬쩍 옆구리를 찌른다. 보고 듣는 것이 지식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은 동네의 밭과 논을 다 사서 내 왕국을 만드는 꿈도 가졌었다. 물론 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팔아 버린 땅들이 어린 시절에 왜 계속 우리 것이 될 줄 알았던 것인지. 더 사 모아서 그 골짜기를 나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잠시만이라도 한 것은 당시의 몽상이자 꿈이고 잠시의 행복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생각하기도 싫은 사고로 원하지 않는 이사를 하고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었던 그 고향 땅 조그만 골짜기는 잊으려 노력도 했고, 살다 보니 까맣게 잊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외국에 살다 보니 이사했던 마을보다 태어난 생가가 있는 마을 제천시 산곡동 곡담 마을이 기억에서 새록새록 새싹을 피우듯 피어오른다. 아마도 그곳에 살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자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잠에서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생생하게 그 시간과 그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아니 비 오는 소리에 다른 소리가 묻혔던 날이다. 동생과 나는 윗방 작은 공간에서 일찍 잠들었다가 아버지의 비명에 깼다. 동생이 깨지나 않나 살피면서 문틈으로 밖을 보니 옆집 수천이 아버지가 아버지의 팔을 문지방에 올려놓고 부러뜨려버리겠다고 소리하고 속옷 바람의 아버지는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안방에 자고 있어야 할 누나와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엄마를 때리려고 하는 것을 요강을 비우러 나갔던 엄마가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엄마한테 그러면 되냐”고 했는데, 말처럼 달려와 엄마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비는 퍼붓고 이대로 죽나 보다 하면서 잠시 틈이 있을 때 소리를 질렀고 상가에서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 목소리에 팬티 바람에 나와서 “뭐하냐”고 하니까 어머니 목을 놓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비 오는 날 개 패듯이 구타를 했다는 데 다행히 이웃이 달려오고 아랫마을로 달려간 누나도 사람들 데리고 오고 아침에 경찰이 오고 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부모님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날들이) 우리 가족의 변곡점이 됐다. 누나가 충격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땅을 팔아 입원비를 마련하고. 그냥 버리다시피 나의 생가를 떠나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성공했다가도 실패할 수 있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평생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건물주 자녀들도 있다. 일을 안 한다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살고 싶은 곳에 산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은 가난해서 쌀이 모자라 감자를 얻고 보리를 섞어 보리밥을 먹고, 팬티조차 입지 못하고 홑겹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기계 뜨개질한 바지를 따뜻할 거라고 입혀 준 엄마와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 추워서 다리가 얼고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이는 부딪쳐서 딱딱거리던 그 시절이 어쩌면 행복 지수는 잘 먹고 잘사는 지금보다 높을지 모른다.

오욕칠정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한 ‘먹방’이나 유명 브랜드에 집착하고 고급 아파트를 삶에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여자나 또 다른 즐거움을 위해 마약 등에 빠지기도 하고, 오래 살려고 세상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고 건강 보조제도 있는 대로 챙긴다. 하지만 내일 아니 몇 분 후의 나의 삶과 죽음조차 알지 못한다. 해탈 열반은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그것은 부처님만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생존 본능에 의해 동물적 감각으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해탈하겠다는 마음 자체도 하나의 욕심이고 보면 공의 세계는 멀고도 멀다. 번뇌하고 또 번뇌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생각인데 그 생각조차 안 하면 다시 동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늘 선계에도 존재한다는 색계는 지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탐·진·치의 굴레에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말이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마음을 닦으려는 마음은 늘 충돌한다. 현실과 이상처럼 말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에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회사의 시간이듯이 집에 있어도 부모여서 아빠여서, 아들이어서 해야 할 일들은 늘 존재한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마음, 아니 아내의 마음조차 모르는 때가 많다. 그래서 말다툼하고 싸우게 되기도 한다. 마음을 들여 볼 수 있는 타심통이 있다면 좋을까? 그만큼 근심이 많을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일을 다 듣고 봐서 알게 되니 신족통, 천안통, 천이통 등을 통달한 신통력을 얻은 도사 같이 살지만 세상은 더 시끄럽다. 옛날에 비해 손전화만 가지고 있으면 위에 세 가지 신통력은 다들 갖춘 셈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의 마음은 읽지 못한다.

꽃이 내 마음과 상관없이 피듯이 세상은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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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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