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9. 2017년 북녘의 부처님오신날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49. 2017년 북녘의 부처님오신날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3.05.02 1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표현의 자유, 그 상징 너머”

오늘날 북녘에 ‘부처님오신날’은 없다. 이 용어를 쓰지 않는다. 남측과 같이 공휴일도 아니다. 한식·추석과 같이 4대 민속 명절로 여기지 않는다. 석탄일·불탄일로 쓰이는 사월 초파일은 출가절·성도절·열반절과 함께 4대 불교 명절이다. 1988년 5월 5일 평안북도 묘향산 보현사에서 ‘불탄일(佛誕日) 기념보고회’가 처음 개최됐다. 그때부터 주요 사찰에서 매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북측에서 유일한 음력 기준의 민속 명절이면서 종교 명절이다.

북녘의 사월 초파일은 남측에서 상상하듯 절에 가서 연등 켜고, 몇만 원의 등값을 치르는 자본주의식 초파일 풍경과도 다르다. 가난한 자들의 일등(一燈)도 없고, 거창한 법요식도 없다. 요란한 대중공양이나 시끄러운 난장도 펼쳐지지 않는다. 그저 ‘절에 가는 날’로 여기는 북녘 주민들에게 사월 초파일은 ‘가장 깨끗한 날, 가장 순수한 잔칫날’이다. 절을 찾은 지역민들은 각기 소원을 빌며 서로의 몸짓과 마음으로 안녕과 안부를 나눈다.

1989년부터 휴식일(공휴일)로 지정된 설날과 추석·단옷날 등 민속 명절이 아니기에 절이 있는 동네 주민들은 사월 초파일을 ‘마음속의 명절’로 여긴다. 일요일이 아닌 평일 초파일은 아침이나 저녁에 잠시 잠깐 다녀가는 정도에 그친다. 집안 애경사가 있을 무렵에는 휴식일을 기해 미리 가서 예경하는 사례도 있다. 사월 초파일은 휴식일이 아니므로 자기 동네를 벗어나 먼 곳의 절에 가기도 어렵다. 휴식일은 그날 하루 직장이나 학교에 가지 않고 쉬지만, 가까운 일요일에 하루 쉰 것에 대해 보충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월 초파일은 정초 신수를 보거나 기도하는 양력 1월 1일, 설날 풍습과도 사뭇 다르다.

양력을 사용하는 북측에서 사월 초파일은 전통적으로 용인된 음력 기준의 공개 기념행사이다. 묘향산 보현사는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평양 광법사는 평양직할시 인민위원회, 내금강 표훈사는 강원도 인민위원회 등에 사전 보고와 승인을 거쳐 열리는 기념행사다. 이때 내걸리는 펼침막의 문안조차도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북측에서는 일반 행사에 있어 소개판(펼침막의 북측 용어)을 사용하지 않는다. 1988년 5월로부터 약 20년 후, 2007년 5월 24일 평양 광법사 대웅전 처마에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동시법회’란 소개판이 최초였다.

그때 북측 주민들을 위해 사찰 처마에 붙인 소개판은 아니었지만, 남북불교 교류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는 용어와 의식을 공유한 첫 사례였다. 평양과 개성, 묘향산 등 외국인들의 방문코스에서도 빈도가 낮은 황해도 구월산 자락에 사월 초파일을 기해 ‘부처님오신날 봉축’이란 소개판이 처음 내걸렸다. ‘표현의 자유, 그 상징을 아우른’ 구월산 월정사의 2017년도 부처님오신날 봉축 행사로 평가할 수 있다. 그해 북녘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에 관한 역사적 의미를 되찾아보고, 그 시기 북측 불교계의 변모에 대해 알아본다.

황남 구월산 월정사 극락전과 수월당(2017.5.3.). 사진: 홍콩의 Confucian Academy 홈페이지 화면캡처





황남 구월산 월정사 극락보전 불단과 공양물(2017.5.3.). 사진: 홍콩의 Confucian Academy 홈페이지





개성 읍성의 석가여래경축회 모습(1930년 사월초파일). 사진:일본지리풍속대계, 신광사



북녘에서의 사월 초파일

2017년 4월 말, 북조선을 여행한 유럽 스웨덴 출신의 얀 헤인즈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외국인이 황해도 구월산 월정사에서 촬영한 펼침막은 북녘의 ‘부처님오신날’ 소개판을 찍은 최초의 장면이다. 사진 판독을 통한 의미해석이지만, 한 장의 사진으로 북녘 사찰의 부처님오신날 봉축 행사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 사진을 직접 촬영해 공유한 그에게 남측 불교계를 대신해 감사드린다.

지리적인 요소를 감안할 때 구월산 월정사는 아주 특별하다. 평양과 개성, 묘향산과 금강산 등과 차원이 다른 곳이다. 월정사는 외국인들조차 거의 방문하지 않는 지역이다. 남측 불교계에서는 신법타 평불협 중앙회장과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명진 평화의길 이사장 등 극소수가 방문했다.

황남 안악군 용진면 월정리에 위치하는 구월산 월정사는 16세기 임꺽정과 17세기 말, 장길산의 무대였다. 846년에 월정대사가 창건한 월정사는 임진난 때 파괴돼 1650년 중건하고 1871년까지 5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극락보전과 수월당·명부전·만세루·승방과 당간지주·세존 사리탑비와 부도·석교비·월정사영비·돌장승(석인상) 등이 남아 있다. 원형이 보존된 전각들은 6.25전쟁 때 빨치산 본부와 1950년 12월 구월산유격대가 사용하기도 했다. 1989년에 다시 복구한 월정사는 국보유적 제75호로 구월산에 남은 유일한 절이다. 1968년에 첫 부임하여 29년을 봉직하다가 1997년 가을에 입적한 주지 김원철의 아들인 광덕 김병호대사는 1999년 월정사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황금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다. 이 시계는 2001년도에 출가해 2010년부터 월정사 관리인을 맡은 범성대사에게로 전해진 상징적인 유물이다.

2002년 2월 미국 LA 관음사 김도안(2006.8.28. 입적) 주지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를 비롯한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임원들과 월정사를 처음 순례했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순례단이 다시 방문했을 때는 사찰 관리를 맡은 범성대사가 안내했다. 재미동포 신은미 씨 일행도 2016년 7월 6일에 구월산 월정사를 방문해 관리인에게서 “왕살구 한 줌을 선물 받았다.”는 기쁨을 국내 언론에 기고한 적 있으나, 그 관리인의 이름을 빼놓았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순례단의 방문기에 의하면 “월정사 주지 범성대사는 강원도 함흥화학공대를 졸업하고, 광덕대사를 은사로 출가해 평양 광법사 불학원에서 사상 교학을 닦았다. 1990년부터 월정사에 부임해 관리인 소임을 맡고 있다.”고 기술했다, 이 기록에서는 같은 날 방문했던 인근의 황북 사리원시 정방산 성불사 주지 법성대사와의 출가 연도 등을 혼용한 오기도 엿보인다.

이러한 활동 이력의 범성대사는 2017년 5월 3일 사월 초파일을 기해 홍보와 선전을 목적으로 안악 월정사 극락보전 편액 위에 ‘부처님오신날 봉축 조국통일기원법회-불기 2561(2017)년 5월 3일 구월산 월정사’란 소개판(가로 5m, 세로 90cm)을 처음 내걸었다. 이 같은 사례는 불기 2557년(2013년) 5월 17일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정면에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봉축 조국통일기원법회-불기 2557(2013)년 5월 17일’ 소개판에 이어 두 번째 형식으로 꼽힌다. 2010년 이후, 북녘 사찰에서 치러진 사월 초파일 행사에 사용한 소개판은 거의 비슷한 크기에, 하얀색 바탕 위에다 붉은색의 행사 제목과 파란색의 일시·장소·주최를 표기하는 동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다만, 2017년 남북 공동발원문은 상호 협의조차 못 한 채, 남측은 연등법회 기원문으로 대신했다.

그 당시 월정사 소개판을 분석해 보면 ‘부처님오신날’과 ‘조국통일기원’이라는 두 가지를 짝지어 경축했다. 목적과 목표를 한꺼번에 제시하고, 두 가지 가치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하도록 상호 보완의 기념보고회와 법회의 형식을 띠었다. 그간 ‘사상에서의 오염원’이라는 종교와 ‘자본주의 황색바람’이라는 교류를 통제해온 북녘땅에서 2017년 구월산 월정사와 2013년 묘향산 보현사의 사례는 표현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인 상징을 함께 아우른 사월 초파일 행사로 기록됐다.

북측의 종교 소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특수하다. 그다음 연도에서도 지속했는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전례를 중시하는 북측에서 새로운 관례를 예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2017년도 월정사에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소개판(펼침막)이 한시적으로 설치 사용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일보한 의미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극락보전 내부 불단 앞에 공양물(음식단, 사과·밤·대추·사탕·백설기·빵·청량음료 등 12가지)을 처음으로 차린 것은 이채롭다. 불단에 올리는 남측 사찰과 달리 극락보전 법당 내부에 별도의 공양물 탁자를 놓고 상(床)을 차렸다. 이때 올린 공양물은 아직까지 북녘 사찰에 남아 있는 불교 명절의 전통과 격식을 보여준 사례였다.

지금껏 북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의 사진 속에는 북녘 주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지만, 이미 그들이 절에 다녀간 후이거나 아마도 저물녘 무렵에는 사월 초파일에 소소히 올리는 기원행렬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날의 기록과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 읍내의 초파일 관등 행사가 유명했다. 강원도 고산군 설봉산 석왕사를 비롯한 함남 함흥읍 귀주사 등 관북 지역의 연등회는 사찰 중심의 사월 초파일 행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오늘날 북측 조불련의 총본산인 평양 대성산 광법사는 1930년대에 절 이름까지 동국명사라 붙이고 운영됐다. 평양 영명사는 평안도를 관장하는 31본산의 한 곳으로 지정됐을 뿐만 아니라, 대동강 부벽루와 사잇길에 일본인이 운영한 찻집(茶房)까지 생겨나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옛 함경남도, 지금의 량강도 삼수갑산에는 운흥사와 중흥사를 비롯한 수월암(水月庵)이 유명했다.

근대 고승인 경허와 수월선사의 수행처로 알려지면서 일제 조선총독부 조사팀이 그곳을 찾아가 남긴 사진은 희귀 기록물이다. 그 절에서도 초파일 법회를 개최하고, 동네에 승시(승려들의 산중장터)와 같은 장마당이 함께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 4월 함경도 갑산의 웅이방 서당에서 열반한 경허선사를 시봉한 수월선사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불릴 만큼 이름대로 ‘물속의 달’처럼 걸림 없이 살다간 숨은 성자였다. 수월선사는 은사를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고자 초막을 짓고, 그의 유지가 남은 곳에 건립된 절이 곧, 함경도 갑산의 수월암이다. 이곳에 머물던 수행자들은 ‘나무가 검푸른 언덕지대’라는 말로써 ‘말안장’이란 어원의 개마고원을 자신들의 정원(叢林, 숲의 숲)으로 삼아 반딧불이로 천 개의 등불 켜며 사월 초파일을 봉축했다.



강원도 고산군 석왕사 범종루 연등제(1929년). 사진: 서울대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지금의 량강도 갑산군 수월암(1920년대). 사진: 대한민국 전자정부 누리집 사이트 e뮤지엄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용화사 전경(2003년 3월).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



평양, 세움과 치움의 불교

해방 후, 북조선 건국에도 참여한 공락문 대사는 1935년 평양 모란봉 남서록에 용화사를 창건했다. 국보유적 제163호로 지정되었던 용화사는 6.25 전쟁 때 미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돼 1953년에 다시 복구됐다. 1945년 12월 평양 영명사에서 창립한 조선불교도련맹의 사무 공간과 주요 집회소였으나 갑자기 사라졌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순례단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용화사는 기존의 용악산 법운암·담화산 동금강암과 함께 현존 사찰이었다. 평양 대성산 광법사(1991년)·제령산 정릉사(1993년)가 개건되고, 평양 모란봉구역 흥부동에 조불련 청사가 1996년에 건립되기 전까지 평양시를 대표한 사찰이다. 창건 80년 만에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차원’에서 2015년 상반기에 강제로 철거됐다. 그 이유로는 2014년 9월에 출범한 일본 아베 신조 2차 내각이 ‘고노담화’(1993.8.4.)를 무력화시키는 야욕을 드러내며 북일 관계 개선에 어깃장을 놓고, 납치 문제를 제기하는 국면에서 친일 청산의 본보기가 됐다고 한다. 2023년도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범죄성과 일본군(官憲)의 직간접 관여를 인정한 일본 정부의 첫 담화 발표 30주년을 맞았다.

세움과 치움의 평양불교로 대변된 평양 용화사의 대웅전과 승방 기와집은 해체됐다. 1980년대부터 절 마당에 놓인 석탑과 석불감(石佛龕)도 옮겨졌다. 평양 평천동 흥복사지 7층탑(국보유물 제24호)은 대동문과 평양부립박물관 뜰에 옮겨졌다가 용화사로, 영명사 석조팔각 불감(국보유물 제148호)은 일본인의 다방 정원과 모란봉공원 길섶에 옮겨졌다가 용화사로 이전됐다. 이 석조물은 평양민속공원(2012.9. 개관)으로 이운됐다가 2016년 6월에 민속공원 폐장과 철거로, 2017년 4월 완공된 평남 평성시 안국사 옆 평성민속공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1952년 소실된 영명사 터는 1983년 ‘흥부초대소’(국가원수급 숙소)가 건립돼 출입을 제한했다. 1986년 평양을 방문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의장과 1992년 방북한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묵었다. 남측인사로는 1995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때 남측 지원단이 이곳에 묵었다.

1931년 만주사변(9.18 류탸오후 사건) 후에 건립된 용화사는 평양의 개선문(일명 승리의 문)과 김일성경기장 옆 개선청년공원 내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적산가옥(적들이 만든 집)이라 잘못 알려진 풍문까지도 철거 이유로 한몫했다. 사라진 용화사는 평양 시내에 불교를 위해 세운 건물로 친일 청산을 위한 첫 본보기가 된 셈이다. 1953년부터 향암 홍화두 조불련 고문(1993.8. 입적)이 주지를 맡은 용화사는 조불련 3대 학림당 박태호 위원장(2005.11.11. 입적)의 취임식이 열린 곳이다. 박 위원장은 청사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종교 사무와 내외빈을 맞았다.

한편, 북측 조불련은 2013년 12월 28일 공석이던 조불련 부위원장에 연암 리규룡 서기장을, 서기장에 소명 차금철 책임부원(포교부장)을 임명하는 등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고 2014년 새해 인사 서신을 통해 알린 바 있다. 안심행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2020년 1월 전국신도회장에 선임돼 취임했다. 하지만 리규룡 부위원장을 제외한 강수린 위원장과 차금철 서기장은 2021년 1월 말을 기해 조불련 중앙위원회 직위에서 사임했다. 그로부터 2년 넘게 조불련의 위원장과 서기장은 공석으로 남북불교 교류의 공식 파트너가 없는 상태이다.

서너 번 만난 인연으로 상론(고인의 행적을 말함)할 수 없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9월 13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북녘의 법은사(法恩師)’로 언약한 96세의 청운 최형민 대선사가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났다. 나지막한 평안도 말씨로 “잘 내느냐?”고 물었다. 그분의 아드님 진명대사가 보현사에서 출가수행하고 있어서 꼭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염원해 본다.

# 다음 편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 시즌Ⅲ’가 이어집니다.

----------------------------------------------------------------------------------------------
황남 구월산 월정사 극락전과 수월당(2017.5.3.). 사진: 홍콩의 Confucian Academy 홈페이지 화면캡처
황남 구월산 월정사 극락보전 불단과 공양물(2017.5.3.). 사진: 홍콩의 Confucian Academy 홈페이지
황남 구월산 월정사 극락보전 불단과 공양물(2017.5.3.). 사진: 홍콩의 Confucian Academy 홈페이지
개성 읍성의 석가여래경축회 모습(1930년 사월초파일). 사진:일본지리풍속대계, 신광사
개성 읍성의 석가여래경축회 모습(1930년 사월초파일). 사진:일본지리풍속대계, 신광사

북녘에서의 사월 초파일

2017년 4월 말, 북조선을 여행한 유럽 스웨덴 출신의 얀 헤인즈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외국인이 황해도 구월산 월정사에서 촬영한 펼침막은 북녘의 ‘부처님오신날’ 소개판을 찍은 최초의 장면이다. 사진 판독을 통한 의미해석이지만, 한 장의 사진으로 북녘 사찰의 부처님오신날 봉축 행사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 사진을 직접 촬영해 공유한 그에게 남측 불교계를 대신해 감사드린다.

지리적인 요소를 감안할 때 구월산 월정사는 아주 특별하다. 평양과 개성, 묘향산과 금강산 등과 차원이 다른 곳이다. 월정사는 외국인들조차 거의 방문하지 않는 지역이다. 남측 불교계에서는 신법타 평불협 중앙회장과 종림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명진 평화의길 이사장 등 극소수가 방문했다.

황남 안악군 용진면 월정리에 위치하는 구월산 월정사는 16세기 임꺽정과 17세기 말, 장길산의 무대였다. 846년에 월정대사가 창건한 월정사는 임진난 때 파괴돼 1650년 중건하고 1871년까지 5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극락보전과 수월당·명부전·만세루·승방과 당간지주·세존 사리탑비와 부도·석교비·월정사영비·돌장승(석인상) 등이 남아 있다. 원형이 보존된 전각들은 6.25전쟁 때 빨치산 본부와 1950년 12월 구월산유격대가 사용하기도 했다. 1989년에 다시 복구한 월정사는 국보유적 제75호로 구월산에 남은 유일한 절이다. 1968년에 첫 부임하여 29년을 봉직하다가 1997년 가을에 입적한 주지 김원철의 아들인 광덕 김병호대사는 1999년 월정사를 방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황금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다. 이 시계는 2001년도에 출가해 2010년부터 월정사 관리인을 맡은 범성대사에게로 전해진 상징적인 유물이다.

2002년 2월 미국 LA 관음사 김도안(2006.8.28. 입적) 주지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 여사를 비롯한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임원들과 월정사를 처음 순례했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순례단이 다시 방문했을 때는 사찰 관리를 맡은 범성대사가 안내했다. 재미동포 신은미 씨 일행도 2016년 7월 6일에 구월산 월정사를 방문해 관리인에게서 “왕살구 한 줌을 선물 받았다.”는 기쁨을 국내 언론에 기고한 적 있으나, 그 관리인의 이름을 빼놓았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순례단의 방문기에 의하면 “월정사 주지 범성대사는 강원도 함흥화학공대를 졸업하고, 광덕대사를 은사로 출가해 평양 광법사 불학원에서 사상 교학을 닦았다. 1990년부터 월정사에 부임해 관리인 소임을 맡고 있다.”고 기술했다, 이 기록에서는 같은 날 방문했던 인근의 황북 사리원시 정방산 성불사 주지 법성대사와의 출가 연도 등을 혼용한 오기도 엿보인다.

이러한 활동 이력의 범성대사는 2017년 5월 3일 사월 초파일을 기해 홍보와 선전을 목적으로 안악 월정사 극락보전 편액 위에 ‘부처님오신날 봉축 조국통일기원법회-불기 2561(2017)년 5월 3일 구월산 월정사’란 소개판(가로 5m, 세로 90cm)을 처음 내걸었다. 이 같은 사례는 불기 2557년(2013년) 5월 17일 묘향산 보현사 대웅전 정면에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봉축 조국통일기원법회-불기 2557(2013)년 5월 17일’ 소개판에 이어 두 번째 형식으로 꼽힌다. 2010년 이후, 북녘 사찰에서 치러진 사월 초파일 행사에 사용한 소개판은 거의 비슷한 크기에, 하얀색 바탕 위에다 붉은색의 행사 제목과 파란색의 일시·장소·주최를 표기하는 동일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다만, 2017년 남북 공동발원문은 상호 협의조차 못 한 채, 남측은 연등법회 기원문으로 대신했다.

그 당시 월정사 소개판을 분석해 보면 ‘부처님오신날’과 ‘조국통일기원’이라는 두 가지를 짝지어 경축했다. 목적과 목표를 한꺼번에 제시하고, 두 가지 가치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해석하도록 상호 보완의 기념보고회와 법회의 형식을 띠었다. 그간 ‘사상에서의 오염원’이라는 종교와 ‘자본주의 황색바람’이라는 교류를 통제해온 북녘땅에서 2017년 구월산 월정사와 2013년 묘향산 보현사의 사례는 표현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인 상징을 함께 아우른 사월 초파일 행사로 기록됐다.

북측의 종교 소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특수하다. 그다음 연도에서도 지속했는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전례를 중시하는 북측에서 새로운 관례를 예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2017년도 월정사에 내걸린 부처님오신날 소개판(펼침막)이 한시적으로 설치 사용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일보한 의미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극락보전 내부 불단 앞에 공양물(음식단, 사과·밤·대추·사탕·백설기·빵·청량음료 등 12가지)을 처음으로 차린 것은 이채롭다. 불단에 올리는 남측 사찰과 달리 극락보전 법당 내부에 별도의 공양물 탁자를 놓고 상(床)을 차렸다. 이때 올린 공양물은 아직까지 북녘 사찰에 남아 있는 불교 명절의 전통과 격식을 보여준 사례였다.

지금껏 북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의 사진 속에는 북녘 주민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지만, 이미 그들이 절에 다녀간 후이거나 아마도 저물녘 무렵에는 사월 초파일에 소소히 올리는 기원행렬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날의 기록과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 읍내의 초파일 관등 행사가 유명했다. 강원도 고산군 설봉산 석왕사를 비롯한 함남 함흥읍 귀주사 등 관북 지역의 연등회는 사찰 중심의 사월 초파일 행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오늘날 북측 조불련의 총본산인 평양 대성산 광법사는 1930년대에 절 이름까지 동국명사라 붙이고 운영됐다. 평양 영명사는 평안도를 관장하는 31본산의 한 곳으로 지정됐을 뿐만 아니라, 대동강 부벽루와 사잇길에 일본인이 운영한 찻집(茶房)까지 생겨나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옛 함경남도, 지금의 량강도 삼수갑산에는 운흥사와 중흥사를 비롯한 수월암(水月庵)이 유명했다.

근대 고승인 경허와 수월선사의 수행처로 알려지면서 일제 조선총독부 조사팀이 그곳을 찾아가 남긴 사진은 희귀 기록물이다. 그 절에서도 초파일 법회를 개최하고, 동네에 승시(승려들의 산중장터)와 같은 장마당이 함께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 4월 함경도 갑산의 웅이방 서당에서 열반한 경허선사를 시봉한 수월선사는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불릴 만큼 이름대로 ‘물속의 달’처럼 걸림 없이 살다간 숨은 성자였다. 수월선사는 은사를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고자 초막을 짓고, 그의 유지가 남은 곳에 건립된 절이 곧, 함경도 갑산의 수월암이다. 이곳에 머물던 수행자들은 ‘나무가 검푸른 언덕지대’라는 말로써 ‘말안장’이란 어원의 개마고원을 자신들의 정원(叢林, 숲의 숲)으로 삼아 반딧불이로 천 개의 등불 켜며 사월 초파일을 봉축했다.

강원도 고산군 석왕사 범종루 연등제(1929년). 사진: 서울대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강원도 고산군 석왕사 범종루 연등제(1929년). 사진: 서울대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지금의 량강도 갑산군 수월암(1920년대). 사진: 대한민국 전자정부 누리집 사이트 e뮤지엄
지금의 량강도 갑산군 수월암(1920년대). 사진: 대한민국 전자정부 누리집 사이트 e뮤지엄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용화사 전경(2003년 3월).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용화사 전경(2003년 3월).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

평양, 세움과 치움의 불교

해방 후, 북조선 건국에도 참여한 공락문 대사는 1935년 평양 모란봉 남서록에 용화사를 창건했다. 국보유적 제163호로 지정되었던 용화사는 6.25 전쟁 때 미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돼 1953년에 다시 복구됐다. 1945년 12월 평양 영명사에서 창립한 조선불교도련맹의 사무 공간과 주요 집회소였으나 갑자기 사라졌다. 2015년 9월 미주 한인순례단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용화사는 기존의 용악산 법운암·담화산 동금강암과 함께 현존 사찰이었다. 평양 대성산 광법사(1991년)·제령산 정릉사(1993년)가 개건되고, 평양 모란봉구역 흥부동에 조불련 청사가 1996년에 건립되기 전까지 평양시를 대표한 사찰이다. 창건 80년 만에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차원’에서 2015년 상반기에 강제로 철거됐다. 그 이유로는 2014년 9월에 출범한 일본 아베 신조 2차 내각이 ‘고노담화’(1993.8.4.)를 무력화시키는 야욕을 드러내며 북일 관계 개선에 어깃장을 놓고, 납치 문제를 제기하는 국면에서 친일 청산의 본보기가 됐다고 한다. 2023년도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범죄성과 일본군(官憲)의 직간접 관여를 인정한 일본 정부의 첫 담화 발표 30주년을 맞았다.

세움과 치움의 평양불교로 대변된 평양 용화사의 대웅전과 승방 기와집은 해체됐다. 1980년대부터 절 마당에 놓인 석탑과 석불감(石佛龕)도 옮겨졌다. 평양 평천동 흥복사지 7층탑(국보유물 제24호)은 대동문과 평양부립박물관 뜰에 옮겨졌다가 용화사로, 영명사 석조팔각 불감(국보유물 제148호)은 일본인의 다방 정원과 모란봉공원 길섶에 옮겨졌다가 용화사로 이전됐다. 이 석조물은 평양민속공원(2012.9. 개관)으로 이운됐다가 2016년 6월에 민속공원 폐장과 철거로, 2017년 4월 완공된 평남 평성시 안국사 옆 평성민속공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1952년 소실된 영명사 터는 1983년 ‘흥부초대소’(국가원수급 숙소)가 건립돼 출입을 제한했다. 1986년 평양을 방문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의장과 1992년 방북한 독일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가 묵었다. 남측인사로는 1995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때 남측 지원단이 이곳에 묵었다.

1931년 만주사변(9.18 류탸오후 사건) 후에 건립된 용화사는 평양의 개선문(일명 승리의 문)과 김일성경기장 옆 개선청년공원 내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적산가옥(적들이 만든 집)이라 잘못 알려진 풍문까지도 철거 이유로 한몫했다. 사라진 용화사는 평양 시내에 불교를 위해 세운 건물로 친일 청산을 위한 첫 본보기가 된 셈이다. 1953년부터 향암 홍화두 조불련 고문(1993.8. 입적)이 주지를 맡은 용화사는 조불련 3대 학림당 박태호 위원장(2005.11.11. 입적)의 취임식이 열린 곳이다. 박 위원장은 청사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종교 사무와 내외빈을 맞았다.

한편, 북측 조불련은 2013년 12월 28일 공석이던 조불련 부위원장에 연암 리규룡 서기장을, 서기장에 소명 차금철 책임부원(포교부장)을 임명하는 등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고 2014년 새해 인사 서신을 통해 알린 바 있다. 안심행 리현숙 조불련 전국신도회 상임부회장은 2020년 1월 전국신도회장에 선임돼 취임했다. 하지만 리규룡 부위원장을 제외한 강수린 위원장과 차금철 서기장은 2021년 1월 말을 기해 조불련 중앙위원회 직위에서 사임했다. 그로부터 2년 넘게 조불련의 위원장과 서기장은 공석으로 남북불교 교류의 공식 파트너가 없는 상태이다.

서너 번 만난 인연으로 상론(고인의 행적을 말함)할 수 없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2000년 9월 13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북녘의 법은사(法恩師)’로 언약한 96세의 청운 최형민 대선사가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났다. 나지막한 평안도 말씨로 “잘 내느냐?”고 물었다. 그분의 아드님 진명대사가 보현사에서 출가수행하고 있어서 꼭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염원해 본다.

# 다음 편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 시즌Ⅲ’가 이어집니다.

----------------------------------------------------------------------------------------------

#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34-733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법인명 : 뉴스렙
  • 제호 : 뉴스렙
  • 등록번호 : 서울 아 0043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7-09-17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뉴스렙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etana@gmail.com
  • 뉴스렙「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조현성 02-734-7336 cetana@gmail.com
인터넷신문위원회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