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1. 윤회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1. 윤회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5.02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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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듯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봄이다
연어가 힘들게 강을 오르고 폭포를 올라
실개천에서 알을 부화하고 삶을 마감하듯
사람도 흙에서 나는 야채와 열매를 먹고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 가 거름이 된다.

 







#작가의변

색성향미촉법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각 기관이다. 얼굴에 모여 있는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육근을 내려놓아야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육근에서 오는 달콤함에 취해, 육근에서 오는 괴로움을 잊고 있으려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 또한 중생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화려하고 신기하고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고, 귀로는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소리,,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경고음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 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리임에도 말이다.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있는 냄새 향기로운 향기 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화장실 냄새나 악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불행이라고 말하겠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혀의 감각으로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여러 가지 맛을 비교하며 좀 더 달콤하고 풍미가 살아 있는 맛있는 것을 탐닉한다. 혀나 입술은 음식을 먹는 데 쓰는 것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통해 서로를 교감하기도 한다.







동물은 발정기에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깃털을 세우거나 총천연색 갈기를 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승리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의 의사와 관계없이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수놈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이거나 교미하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수컷도 많다.

캐나다엔 아직 최상위 포식자인 곰, 표범 등이 존재해 동물의 왕국은 자연에 섭리로 돌아 가지만, 한국 같은 경우 인간이 인위적으로 최상위 계층인 호랑이나 곰을 없애서 삵 괭이 같은 동물이 최상위층 노릇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생각하고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제 사람을 잡아먹을 동물은 존재하지 않고 두려움은 이제 교통사고나 건물의 무너짐, 홍수, 가뭄 같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밤길에 동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이 내 어린 시절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천이 귀신으로 보이던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존재다.

과거엔 두려움에 대상이 해와 큰 바위 나무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기복을 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자연재해가 있지만 이젠 큰 바위나 호랑이에게 빌지 않는다. 세상을 운영하는 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고 느낀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도 허상일 수 있겠지만 X-ray로 뼈를 찍고 MRI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







어릴 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다. 그 끝이 없는 논쟁처럼 사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알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알은 어미가 없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으로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었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땅 위 하늘에 새가 날도록 했다. 큰 바다짐승은 물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만든다. 땅에도 생물과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만들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말했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 했다. 모든 새와 생명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했다.

그런데 창세기를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해야만 창조주인데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수많은 행성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고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을 만들었다고 말할 뿐이다. 초창기 인류는 풀엔 관심조차 없었다. 과일을 따 먹고 사냥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한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동물이 지배하던 지구도 있었다.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지구상의 인간하고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침공해 지구를 지배하기도 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물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 속된 것은 지구 전체 역사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다. 채소와 열매도 그것이 먹는 채소인지 먹는 씨앗인지 몰라 독초를 먹고 죽고 열매를 먹고 죽는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동물들이 더 독초나 독이 있는 열매를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 했다고 하지만 다른 생물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생명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정복 전쟁은 미개한 민족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늘어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은 맞지만 인간의 손끝이 닿지 않은 처녀림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인간을 정복하고 노예로 부리고 가축처럼 인간을 쓰기도 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부족한 것보다 못 먹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그 굶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상엔 선한 것보다 악한 것들이 더 많다. 생존경쟁, 먹이사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법칙인지 모른다. 인간이 배불리 먹고산 것도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아니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지금도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모든 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인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육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욕심을 끊어내고 근원의 나를 찾을 걸 말했다. 인연은 마치 계획처럼 오지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별은 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 그래서 가슴 쓰리도록 아픈 사랑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래된 무덤처럼 무덤덤 해지는 것 이리라. 우린 인연에 아파하고 인연에 환호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숨 쉬는 걸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빛만 보고 걷듯이 이미 예고된 길을 가는 편안함처럼. 태양은 수 억 년을 붉게 타오르고 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없다면 지구에 생명도 없을 테니까? 그런 태양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지구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태양은 스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저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영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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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듯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봄이다
연어가 힘들게 강을 오르고 폭포를 올라
실개천에서 알을 부화하고 삶을 마감하듯
사람도 흙에서 나는 야채와 열매를 먹고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 가 거름이 된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듯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봄이다
연어가 힘들게 강을 오르고 폭포를 올라
실개천에서 알을 부화하고 삶을 마감하듯
사람도 흙에서 나는 야채와 열매를 먹고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 가 거름이 된다.

 







#작가의변

색성향미촉법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각 기관이다. 얼굴에 모여 있는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육근을 내려놓아야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육근에서 오는 달콤함에 취해, 육근에서 오는 괴로움을 잊고 있으려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 또한 중생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화려하고 신기하고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고, 귀로는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소리,,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경고음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 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리임에도 말이다.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있는 냄새 향기로운 향기 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화장실 냄새나 악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불행이라고 말하겠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혀의 감각으로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여러 가지 맛을 비교하며 좀 더 달콤하고 풍미가 살아 있는 맛있는 것을 탐닉한다. 혀나 입술은 음식을 먹는 데 쓰는 것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통해 서로를 교감하기도 한다.







동물은 발정기에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깃털을 세우거나 총천연색 갈기를 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승리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의 의사와 관계없이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수놈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이거나 교미하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수컷도 많다.

캐나다엔 아직 최상위 포식자인 곰, 표범 등이 존재해 동물의 왕국은 자연에 섭리로 돌아 가지만, 한국 같은 경우 인간이 인위적으로 최상위 계층인 호랑이나 곰을 없애서 삵 괭이 같은 동물이 최상위층 노릇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생각하고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제 사람을 잡아먹을 동물은 존재하지 않고 두려움은 이제 교통사고나 건물의 무너짐, 홍수, 가뭄 같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밤길에 동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이 내 어린 시절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천이 귀신으로 보이던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존재다.

과거엔 두려움에 대상이 해와 큰 바위 나무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기복을 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자연재해가 있지만 이젠 큰 바위나 호랑이에게 빌지 않는다. 세상을 운영하는 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고 느낀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도 허상일 수 있겠지만 X-ray로 뼈를 찍고 MRI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







어릴 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다. 그 끝이 없는 논쟁처럼 사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알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알은 어미가 없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으로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었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땅 위 하늘에 새가 날도록 했다. 큰 바다짐승은 물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만든다. 땅에도 생물과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만들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말했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 했다. 모든 새와 생명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했다.

그런데 창세기를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해야만 창조주인데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수많은 행성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고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을 만들었다고 말할 뿐이다. 초창기 인류는 풀엔 관심조차 없었다. 과일을 따 먹고 사냥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한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동물이 지배하던 지구도 있었다.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지구상의 인간하고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침공해 지구를 지배하기도 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물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 속된 것은 지구 전체 역사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다. 채소와 열매도 그것이 먹는 채소인지 먹는 씨앗인지 몰라 독초를 먹고 죽고 열매를 먹고 죽는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동물들이 더 독초나 독이 있는 열매를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 했다고 하지만 다른 생물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생명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정복 전쟁은 미개한 민족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늘어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은 맞지만 인간의 손끝이 닿지 않은 처녀림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인간을 정복하고 노예로 부리고 가축처럼 인간을 쓰기도 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부족한 것보다 못 먹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그 굶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상엔 선한 것보다 악한 것들이 더 많다. 생존경쟁, 먹이사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법칙인지 모른다. 인간이 배불리 먹고산 것도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아니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지금도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모든 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인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육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욕심을 끊어내고 근원의 나를 찾을 걸 말했다. 인연은 마치 계획처럼 오지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별은 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 그래서 가슴 쓰리도록 아픈 사랑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래된 무덤처럼 무덤덤 해지는 것 이리라. 우린 인연에 아파하고 인연에 환호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숨 쉬는 걸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빛만 보고 걷듯이 이미 예고된 길을 가는 편안함처럼. 태양은 수 억 년을 붉게 타오르고 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없다면 지구에 생명도 없을 테니까? 그런 태양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지구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태양은 스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저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영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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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변

색성향미촉법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각 기관이다. 얼굴에 모여 있는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육근을 내려놓아야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육근에서 오는 달콤함에 취해, 육근에서 오는 괴로움을 잊고 있으려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 또한 중생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화려하고 신기하고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고, 귀로는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소리,,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경고음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 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리임에도 말이다.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있는 냄새 향기로운 향기 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화장실 냄새나 악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불행이라고 말하겠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혀의 감각으로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여러 가지 맛을 비교하며 좀 더 달콤하고 풍미가 살아 있는 맛있는 것을 탐닉한다. 혀나 입술은 음식을 먹는 데 쓰는 것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통해 서로를 교감하기도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듯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봄이다
연어가 힘들게 강을 오르고 폭포를 올라
실개천에서 알을 부화하고 삶을 마감하듯
사람도 흙에서 나는 야채와 열매를 먹고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 가 거름이 된다.

 







#작가의변

색성향미촉법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각 기관이다. 얼굴에 모여 있는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육근을 내려놓아야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육근에서 오는 달콤함에 취해, 육근에서 오는 괴로움을 잊고 있으려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 또한 중생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화려하고 신기하고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고, 귀로는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소리,,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경고음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 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리임에도 말이다.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있는 냄새 향기로운 향기 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화장실 냄새나 악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불행이라고 말하겠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혀의 감각으로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여러 가지 맛을 비교하며 좀 더 달콤하고 풍미가 살아 있는 맛있는 것을 탐닉한다. 혀나 입술은 음식을 먹는 데 쓰는 것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통해 서로를 교감하기도 한다.







동물은 발정기에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깃털을 세우거나 총천연색 갈기를 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승리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의 의사와 관계없이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수놈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이거나 교미하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수컷도 많다.

캐나다엔 아직 최상위 포식자인 곰, 표범 등이 존재해 동물의 왕국은 자연에 섭리로 돌아 가지만, 한국 같은 경우 인간이 인위적으로 최상위 계층인 호랑이나 곰을 없애서 삵 괭이 같은 동물이 최상위층 노릇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생각하고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제 사람을 잡아먹을 동물은 존재하지 않고 두려움은 이제 교통사고나 건물의 무너짐, 홍수, 가뭄 같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밤길에 동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이 내 어린 시절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천이 귀신으로 보이던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존재다.

과거엔 두려움에 대상이 해와 큰 바위 나무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기복을 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자연재해가 있지만 이젠 큰 바위나 호랑이에게 빌지 않는다. 세상을 운영하는 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고 느낀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도 허상일 수 있겠지만 X-ray로 뼈를 찍고 MRI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







어릴 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다. 그 끝이 없는 논쟁처럼 사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알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알은 어미가 없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으로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었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땅 위 하늘에 새가 날도록 했다. 큰 바다짐승은 물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만든다. 땅에도 생물과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만들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말했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 했다. 모든 새와 생명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했다.

그런데 창세기를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해야만 창조주인데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수많은 행성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고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을 만들었다고 말할 뿐이다. 초창기 인류는 풀엔 관심조차 없었다. 과일을 따 먹고 사냥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한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동물이 지배하던 지구도 있었다.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지구상의 인간하고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침공해 지구를 지배하기도 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물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 속된 것은 지구 전체 역사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다. 채소와 열매도 그것이 먹는 채소인지 먹는 씨앗인지 몰라 독초를 먹고 죽고 열매를 먹고 죽는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동물들이 더 독초나 독이 있는 열매를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 했다고 하지만 다른 생물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생명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정복 전쟁은 미개한 민족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늘어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은 맞지만 인간의 손끝이 닿지 않은 처녀림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인간을 정복하고 노예로 부리고 가축처럼 인간을 쓰기도 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부족한 것보다 못 먹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그 굶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상엔 선한 것보다 악한 것들이 더 많다. 생존경쟁, 먹이사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법칙인지 모른다. 인간이 배불리 먹고산 것도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아니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지금도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모든 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인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육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욕심을 끊어내고 근원의 나를 찾을 걸 말했다. 인연은 마치 계획처럼 오지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별은 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 그래서 가슴 쓰리도록 아픈 사랑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래된 무덤처럼 무덤덤 해지는 것 이리라. 우린 인연에 아파하고 인연에 환호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숨 쉬는 걸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빛만 보고 걷듯이 이미 예고된 길을 가는 편안함처럼. 태양은 수 억 년을 붉게 타오르고 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없다면 지구에 생명도 없을 테니까? 그런 태양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지구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태양은 스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저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영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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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발정기에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깃털을 세우거나 총천연색 갈기를 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승리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의 의사와 관계없이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수놈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이거나 교미하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수컷도 많다.

캐나다엔 아직 최상위 포식자인 곰, 표범 등이 존재해 동물의 왕국은 자연에 섭리로 돌아 가지만, 한국 같은 경우 인간이 인위적으로 최상위 계층인 호랑이나 곰을 없애서 삵 괭이 같은 동물이 최상위층 노릇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생각하고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제 사람을 잡아먹을 동물은 존재하지 않고 두려움은 이제 교통사고나 건물의 무너짐, 홍수, 가뭄 같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밤길에 동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이 내 어린 시절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천이 귀신으로 보이던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존재다.

과거엔 두려움에 대상이 해와 큰 바위 나무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기복을 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자연재해가 있지만 이젠 큰 바위나 호랑이에게 빌지 않는다. 세상을 운영하는 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고 느낀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도 허상일 수 있겠지만 X-ray로 뼈를 찍고 MRI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듯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봄이다
연어가 힘들게 강을 오르고 폭포를 올라
실개천에서 알을 부화하고 삶을 마감하듯
사람도 흙에서 나는 야채와 열매를 먹고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 가 거름이 된다.

 







#작가의변

색성향미촉법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각 기관이다. 얼굴에 모여 있는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육근을 내려놓아야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육근에서 오는 달콤함에 취해, 육근에서 오는 괴로움을 잊고 있으려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 또한 중생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화려하고 신기하고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고, 귀로는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소리,,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경고음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 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리임에도 말이다.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있는 냄새 향기로운 향기 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화장실 냄새나 악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불행이라고 말하겠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혀의 감각으로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여러 가지 맛을 비교하며 좀 더 달콤하고 풍미가 살아 있는 맛있는 것을 탐닉한다. 혀나 입술은 음식을 먹는 데 쓰는 것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통해 서로를 교감하기도 한다.







동물은 발정기에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깃털을 세우거나 총천연색 갈기를 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승리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의 의사와 관계없이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수놈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이거나 교미하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수컷도 많다.

캐나다엔 아직 최상위 포식자인 곰, 표범 등이 존재해 동물의 왕국은 자연에 섭리로 돌아 가지만, 한국 같은 경우 인간이 인위적으로 최상위 계층인 호랑이나 곰을 없애서 삵 괭이 같은 동물이 최상위층 노릇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생각하고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제 사람을 잡아먹을 동물은 존재하지 않고 두려움은 이제 교통사고나 건물의 무너짐, 홍수, 가뭄 같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밤길에 동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이 내 어린 시절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천이 귀신으로 보이던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존재다.

과거엔 두려움에 대상이 해와 큰 바위 나무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기복을 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자연재해가 있지만 이젠 큰 바위나 호랑이에게 빌지 않는다. 세상을 운영하는 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고 느낀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도 허상일 수 있겠지만 X-ray로 뼈를 찍고 MRI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







어릴 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다. 그 끝이 없는 논쟁처럼 사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알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알은 어미가 없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으로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었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땅 위 하늘에 새가 날도록 했다. 큰 바다짐승은 물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만든다. 땅에도 생물과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만들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말했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 했다. 모든 새와 생명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했다.

그런데 창세기를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해야만 창조주인데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수많은 행성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고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을 만들었다고 말할 뿐이다. 초창기 인류는 풀엔 관심조차 없었다. 과일을 따 먹고 사냥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한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동물이 지배하던 지구도 있었다.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지구상의 인간하고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침공해 지구를 지배하기도 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물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 속된 것은 지구 전체 역사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다. 채소와 열매도 그것이 먹는 채소인지 먹는 씨앗인지 몰라 독초를 먹고 죽고 열매를 먹고 죽는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동물들이 더 독초나 독이 있는 열매를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 했다고 하지만 다른 생물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생명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정복 전쟁은 미개한 민족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늘어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은 맞지만 인간의 손끝이 닿지 않은 처녀림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인간을 정복하고 노예로 부리고 가축처럼 인간을 쓰기도 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부족한 것보다 못 먹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그 굶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상엔 선한 것보다 악한 것들이 더 많다. 생존경쟁, 먹이사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법칙인지 모른다. 인간이 배불리 먹고산 것도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아니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지금도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모든 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인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육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욕심을 끊어내고 근원의 나를 찾을 걸 말했다. 인연은 마치 계획처럼 오지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별은 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 그래서 가슴 쓰리도록 아픈 사랑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래된 무덤처럼 무덤덤 해지는 것 이리라. 우린 인연에 아파하고 인연에 환호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숨 쉬는 걸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빛만 보고 걷듯이 이미 예고된 길을 가는 편안함처럼. 태양은 수 억 년을 붉게 타오르고 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없다면 지구에 생명도 없을 테니까? 그런 태양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지구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태양은 스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저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영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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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다. 그 끝이 없는 논쟁처럼 사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알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알은 어미가 없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으로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었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땅 위 하늘에 새가 날도록 했다. 큰 바다짐승은 물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만든다. 땅에도 생물과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만들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말했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 했다. 모든 새와 생명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했다.

그런데 창세기를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해야만 창조주인데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수많은 행성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고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을 만들었다고 말할 뿐이다. 초창기 인류는 풀엔 관심조차 없었다. 과일을 따 먹고 사냥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한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동물이 지배하던 지구도 있었다.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지구상의 인간하고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침공해 지구를 지배하기도 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물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 속된 것은 지구 전체 역사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다. 채소와 열매도 그것이 먹는 채소인지 먹는 씨앗인지 몰라 독초를 먹고 죽고 열매를 먹고 죽는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동물들이 더 독초나 독이 있는 열매를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 했다고 하지만 다른 생물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생명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정복 전쟁은 미개한 민족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늘어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은 맞지만 인간의 손끝이 닿지 않은 처녀림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인간을 정복하고 노예로 부리고 가축처럼 인간을 쓰기도 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부족한 것보다 못 먹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그 굶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상엔 선한 것보다 악한 것들이 더 많다. 생존경쟁, 먹이사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법칙인지 모른다. 인간이 배불리 먹고산 것도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아니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지금도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모든 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인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육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욕심을 끊어내고 근원의 나를 찾을 걸 말했다. 인연은 마치 계획처럼 오지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별은 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 그래서 가슴 쓰리도록 아픈 사랑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래된 무덤처럼 무덤덤 해지는 것 이리라. 우린 인연에 아파하고 인연에 환호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숨 쉬는 걸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빛만 보고 걷듯이 이미 예고된 길을 가는 편안함처럼. 태양은 수 억 년을 붉게 타오르고 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없다면 지구에 생명도 없을 테니까? 그런 태양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지구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태양은 스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저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영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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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듯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나는 봄이다
연어가 힘들게 강을 오르고 폭포를 올라
실개천에서 알을 부화하고 삶을 마감하듯
사람도 흙에서 나는 야채와 열매를 먹고
흙이 되어 흙으로 돌아 가 거름이 된다.

 







#작가의변

색성향미촉법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감각 기관이다. 얼굴에 모여 있는 감각 기관인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다.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촉각, 법도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흔히 여섯 가지 인식(認識)의 뿌리라고 하여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육근을 내려놓아야 윤회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육근에서 오는 달콤함에 취해, 육근에서 오는 괴로움을 잊고 있으려 애써 외면하며 사는 것이 또한 중생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화려하고 신기하고 진귀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고, 귀로는 자연의 소리, 아름다운 소리,,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경고음이나 듣기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 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소리임에도 말이다.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 맛있는 냄새 향기로운 향기 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화장실 냄새나 악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불행이라고 말하겠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

혀의 감각으로 단맛, 짠맛, 신맛, 매운맛, 쓴맛, 여러 가지 맛을 비교하며 좀 더 달콤하고 풍미가 살아 있는 맛있는 것을 탐닉한다. 혀나 입술은 음식을 먹는 데 쓰는 것만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할 때 입술을 맞대거나 혀를 통해 서로를 교감하기도 한다.







동물은 발정기에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깃털을 세우거나 총천연색 갈기를 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승리한 수컷이 암컷을 차지한다.

암컷의 의사와 관계없이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수놈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이거나 교미하고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수컷도 많다.

캐나다엔 아직 최상위 포식자인 곰, 표범 등이 존재해 동물의 왕국은 자연에 섭리로 돌아 가지만, 한국 같은 경우 인간이 인위적으로 최상위 계층인 호랑이나 곰을 없애서 삵 괭이 같은 동물이 최상위층 노릇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며 생각하고 몸에서 느끼는 감각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제 사람을 잡아먹을 동물은 존재하지 않고 두려움은 이제 교통사고나 건물의 무너짐, 홍수, 가뭄 같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밤길에 동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믿음이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이 내 어린 시절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천이 귀신으로 보이던 성황당이나 상여를 보관하는 고집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존재다.

과거엔 두려움에 대상이 해와 큰 바위 나무 같은 것이었고 거기에 기복을 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자연재해가 있지만 이젠 큰 바위나 호랑이에게 빌지 않는다. 세상을 운영하는 힘을 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느님과 부처님을 보고 느낀 것이다. 물론 그것 자체도 허상일 수 있겠지만 X-ray로 뼈를 찍고 MRI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장을 들여다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이 됐다.







어릴 적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었다. 그 끝이 없는 논쟁처럼 사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논쟁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알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 알은 어미가 없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으로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바다를 만들고. 해와 달을 만들었다. 물에는 생물이 번성하게 하고 땅 위 하늘에 새가 날도록 했다. 큰 바다짐승은 물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종류대로 만든다. 땅에도 생물과 가축과 기는 것,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만들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시리라 말했다.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 했다. 모든 새와 생명 기는 모든 것에게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했다.

그런데 창세기를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해야만 창조주인데 우주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수많은 행성을 만들었다는 말이 없고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을 만들었다고 말할 뿐이다. 초창기 인류는 풀엔 관심조차 없었다. 과일을 따 먹고 사냥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사람보다 더 크고 강한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동물이 지배하던 지구도 있었다. 공상 과학 영화를 보면 지구상의 인간하고는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침공해 지구를 지배하기도 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로봇이 사람을 지배하기도 한다. 생물과 동물이 인간에게 복 속된 것은 지구 전체 역사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다. 채소와 열매도 그것이 먹는 채소인지 먹는 씨앗인지 몰라 독초를 먹고 죽고 열매를 먹고 죽는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동물들이 더 독초나 독이 있는 열매를 잘 알고 있다. 인간에게 그 모든 것을 다스리라 했다고 하지만 다른 생물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땅을 정복하라. 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생명들이 말을 안 듣는다는 전제가 깔렸다. 정복 전쟁은 미개한 민족이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늘어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은 맞지만 인간의 손끝이 닿지 않은 처녀림도 아주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인간을 정복하고 노예로 부리고 가축처럼 인간을 쓰기도 했다. 지금 지구상에는 사람들이 먹을거리가 부족한 것보다 못 먹고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이 그 굶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상엔 선한 것보다 악한 것들이 더 많다. 생존경쟁, 먹이사슬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법칙인지 모른다. 인간이 배불리 먹고산 것도 불과 백 년도 되지 않았다. 아니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지금도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모든 건 인간의 욕망 중 하나인 안이비설신의에 의한 색성향미촉법을 만드는 육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복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부처님은 모든 욕심을 끊어내고 근원의 나를 찾을 걸 말했다. 인연은 마치 계획처럼 오지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별은 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한다. 그래서 가슴 쓰리도록 아픈 사랑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오래된 무덤처럼 무덤덤 해지는 것 이리라. 우린 인연에 아파하고 인연에 환호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숨 쉬는 걸 잊고 사는 많은 사람처럼. 어둠 속에서 빛만 보고 걷듯이 이미 예고된 길을 가는 편안함처럼. 태양은 수 억 년을 붉게 타오르고 있다. 태양이 없는 지구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양이 없다면 지구에 생명도 없을 테니까? 그런 태양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지구에서 만들어질 뿐이다. 태양은 스스로 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저 뜨거운 태양에서 벗어나려는 영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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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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