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圓敎)의 중도설
원교(圓敎)의 중도설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14.10.27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 22

원교(圓敎)는 부처님께서 평생 설법한 중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법문을 말한다. 천태스님 이전에는 화엄경(華嚴經)을 원교라 하였으나 천태스님에 이르러서는 법화경(法華經)을 중심한 교학을 원교라 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뜻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는데, 이것을 바르게 설한 것이 곧 원교이며, 원교만이 부처님의 진정한 설법이고 일승이라고 주장한다.

끊어야 할 고제와 집제도 없고 현실을 떠나서 닦아야 할 도제도 없으며, 또 나타낼 열반도 없다. 그래서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보리라고 말한 것이다. 원융 사상을 표방한 원교는 유와 무, 선과 악 등 상대법을 차단하고 이들의 원융한 도리를 설파하였기에 또한 중도이기도 한다. 원교란 중도를 바르게 나타낸 것으로 양변을 다 차단한다. 유․무(有無)도 차단하고, 고․락(苦樂)도 차단하며, 선과 악, 생사와 열반, 마구니와 부처 등 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차단해 버린다. 상대적인 어느 한 쪽을 집착하게 되면 변견으로서 불법이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원교는 중도를 표방한 것인데, 양변을 떠난 동시에 양변에 원융하여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이 결국 실제가 아니면서도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듯이 삼제의 이치가 완연히 드러난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가 아니면서 유고, 무가 아니면서 무이므로 묘법(妙法)이라 말한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공․가․중이 원융함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불과 빛이 똑같은 것이어서 불을 제외하고 빛이 없고, 빛을 제외하고 불이 없는 것과 한가지이다.

일체만법의 근본 자체가 원융하여 자성이 원래 공한 데에 일체 현상이 나타나고 일체 현상이 나타난 곳에 자성이 공해 있다. 연기하는 이대로가 공이고 색이지 색 밖에서 공을 따로 찾고 공 밖에서 색을 따로 찾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이것이 우주법계의 근본원리로 이 법은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깨치고 바로 알아서 중생에게 소개한 것일 뿐이다. 이것을 불법이라 한다. 관세음이라 해서 어디 다른 곳에 관세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깨칠 때 그때 관세음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깨달으면 보살이라 해도 되고 아라한이라 해도 되고 조사라 해도 무방한다. 중도만 바로 깨치면 그만이다.

원돈이란 일체만법이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원(圓)이라 하고, 거기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으므로 돈(頓)이라 한다. 하나의 도가 일체의 도로서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원융하고 자재함을 원돈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이 원돈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실상을 알아 일체 경계가 모두 중도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다. 그리하여 인연을 법계에 매어, 즉 법계에 통하게 되어 일념 이대로가 법계로서 하나의 색, 하나의 향이 중도 아님이 없다. ‘실상 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어’ 쌍차가 되고 ‘법성이 고요하며’ 부동함을 지(止)라 하니 쌍조가 되어 고요한 가운데 항상 대광명이 시방법계를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이것은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에 성철스님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머물고 있을 때, 유점사(楡岾寺)에 예수교의 큰 학자가 한 사람 왔었다. 한 스님이 안내를 하면서 하나님이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것은 어지간히 맞는 소리이다. 그러자 안내하던 스님이 탑을 가리키면서 저 속에도 하나님이 들어앉았느냐고 반문하자, 그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곤란하단 말이다. 불교의 탑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들어앉아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망신이 되겠거든요.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스님이 “아니, 당신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저기는 하나님이 왜 못 들어갑니까」 하니 그는 그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버렸어요.

“그럼, 좋다. 우리 가사․장삼 다 벗어버리고 술도 한 잔하고 소도 잡고 춤도 추어 보자”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경우도 그런 대장부만 나오면 그런대로 괜찮은데 만약 잘못 알고 경계에 집착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외도이며 마구니이다. 내가 지금까지 일체가 원융하다고 말한 것은 그 관점을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 중도실상을 바르게 증득한 데에 두고 하는 말이지 중생의 무명경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눈 뜬 사람은 앉아도 광명이고 서도 광명이고 누워도 광명이지만, 눈감은 사람은 앉아도 서도 누워도 캄캄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무명업식에 얽매인 사견을 원융무애한 것으로 집착하면 이 사람은 끝내 지옥 중에서도 아비지옥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 원융무애함을 바로 알고 바로 수용하려면 가장 빠른 길로 화두를 들어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바로 깨치는 것이 좋다. 삼제가 원융한 원돈지관은 ‘이 무엇인가(是甚麽)’를 열심히 참구하면 마침내 알게 될 것이지만, 이와같이 하지 않고 이론과 말만 따라가면 결국에는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지옥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눈 감으면 앉으나 서나 그대로 지옥이고 눈 뜨면 앉은 곳 선 곳 그대로가 극락세계인 것이다.

소가 물을 먹으면 젖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며, 뱀의 독은 사람을 죽이지만 소의 젖은 사람을 살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건은 한 가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물건의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부처님이 방편으로 생멸을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일승의 중도를 증득하도록 힘써야지 방편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설하되 설하지 않음’이란 아무리 설해도 설함이 없다는 뜻이니 문수보살은 설하되 설함이 없음으로써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하였다. 정명(淨名) 즉 유마힐(維摩詰)은 문수보살이 무엇으로 불이법문을 삼겠느냐고 문수보살이 질문하자 아무 말도 안하고 침묵을 지키자 이에 참으로 유마거사가 불이법문을 설한다고 칭찬했는데, 이 말은 유마경에 나온다. ‘두구(杜口)’는 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곧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하지 않아도 말하는 것이 되고 말해도 말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도 있다. 도인은 고집멸도의 도성제의 길을 가는 깨친 사람으로 원융무애한 불이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도인의 행에는 헛된 말이나 행이 없다. 말만 번지르한 사람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스승을 팔아먹는 사람이나 큰 어른에게 인가를 받았다가 스스로 떠드는 이가 어찌 도인이겠는가! 하물며 아라한이고 보살이고 부처겠는가! 중도를 깨친이가 바로 불보살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성철스님의 말씀이 가장 필요한 시절인연이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가지 수정하기도 하였다

[기사제보 cetana@gmai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34-733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법인명 : 뉴스렙
  • 제호 : 뉴스렙
  • 등록번호 : 서울 아 0043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7-09-17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뉴스렙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렙. All rights reserved. mail to cetana@gmail.com
  • 뉴스렙「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조현성 02-734-7336 cetana@gmail.com
인터넷신문위원회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