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고운 친일파
결고운 친일파
  • 변택주
  • 승인 2014.10.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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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변택주의 <섬기는 리더가 여는 보살피아드>-94. 김남식

이인호(78) 한국방송공사(KBS)이사회 이사장은 9월 9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할아버지 친일 행적을 두고,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고 했다. 그리고 10월 22일 열린 KBS 국정감사에서,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독립을 반대한 분이기에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게 옳지 않다”며 “상해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로 평가받지 못했고 우리가 독립국가 국민이 된 것은 1948년 8월 15일 이후”라고 했다. 그런데 헤아리면 김구 선생이 반대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다. 김구 선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포문은 새누리당 정미홍이 먼저 열었다. 지난 6월 정씨는 한 언론사 초청 강연에서 “지금 김구 선생이 최고 애국자라고 되어 있지만 그분은 김일성에 부역한 사람이고, 좌파 역사학자들이 영웅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라고 몹쓸 말을 했다. 왜들 이러는가. 참으로 이래도 되는 것일까?

쓰레기 줍는 할아버지

여기 일제강점기 교사였기에 “나는 겨레 반역자”라면서 오래도록 청소를 하며 뉘우친 할아버지가 있다. 경희대학교가 있는 서울 회기동에 늘 쓰레기를 주웠다. 이 할아버지는 서울 청량초등학교(옛날에는 청량국민학교)에서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한 김남식 선생(1919-)으로, 퇴임사에서 이런 말씀을 남겼다.

“저는 민족 반역자입니다. 저는 일제시대 때 우리 한글을 말하지 말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쳤고, 일본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했습니다. 제가 그러고도 이제까지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반민족 처벌이 있었다면 저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런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여러분은 자랑스런 교사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식 할아버지는 [한겨레21] 2006년 2월 28일자 기사에서는

“왜정 때 학생들에게 일본말 쓰기를 시킨 것에 대해 벌을 받는 의미로 청소를 이어나가고 있다. 1939년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는데,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조선어수업 말고는 우리말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주번 교사는 아침마다 주번 네 명에게 ‘국어 상용’이라고 쓰인 손바닥만 패를 줬다. 주번은 우리말을 쓰는 친구가 눈에 띄면 그 패를 건넸다. 운동장 구석에서라도 우리말을 쓰면 그 패를 받아야 한다. 그 패를 받은 아이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라갈 때까지 다른 아이에게 패를 넘기지 못하면, 교무실에 그 패를 들고 가야 한다. 늦게나마 ‘내가 교사로서 참 나쁜 짓을 했구나’ ‘민족반역자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김남식은 삼일절 만세가 터졌던 1919년,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청동리에서 태어났다. 진흥왕 순수비를 동무들하고 같이 가서 만져보기도 했다는 김남식은 차호 공립보통학교를 나와 함흥영생 고등보통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교원 자격시험을 치르고 교단에 섰다. 북녘에서는 장진군 창평 학교를 비롯한 세 군데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김남식 할아버지를 인터뷰했던 권은정에 따르면 김남식 선생은 근무했던 학교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때는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라는 말을 일일이 달았단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자는 운동을 이끌어 기어이 바꿔낸 사람 김남식. 그런데도 당신은 정말 뜻을 보탰을 뿐 한 게 없다며 한사코 당신을 낮춰 말했단다.

흥사단 모임에서 함석헌 선생이 “국민학교란 이름은 고쳐야 할 부끄러운 이름”이라고 한 말씀을 놓치지 않고, 거기서 만난 몇몇이 우리 힘으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내어 뜻을 모은 것은 1991년 가을. 먼저 전교조에 찾아가 두 차례나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오히려 ‘국민교육’이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1993년 봄부터 국민학교 이름 바꾸기 국회 청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를 처음 결정할 때 모인 사람은 단 네 명,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김남식은 성패 여부는 따지지 말자고 했다. 그해 6월26일에 <한겨레>에 첫 보도가 나고, 5,181명 이름으로 10월 26일 국회에 청원했다. 
 
“사실 일본 사람들도 그전에 우리 보통학교라는 뜻으로 ‘심상소학교’라는 이름을 썼더랬지요. 그런데 군국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서 황국신민을 기르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일본 세력이 커갈 수 있다면서 1940년대에 그렇게 고쳤지요. 일본천황에게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이름입니까? 그 뒤 일본 스스로도 부끄러운 이름이라며 바꿨는데 정작 우리는 오십 년이 넘도록 못 바꾸고 있었던 거지요. 일제 잔재가 아니라 뿌리를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교육자로 온 삶을 ‘국민학교’에서 보내야했지만 후진들에게는 그런 불명예를 물려받게 할 수 없었다는 데 뜻을 뒀다는 말씀이다.
 
김남식과 같이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는 운동을 했던 이치석은 자신이 쓴 책 [전쟁과 학교]에서 “우리 근현대사에서 국민은 구한말 대한제국 국민, 식민지 친일 국민, 분단시대 반공 국민 세 가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국민은 아직 국민국가 ‘피플people’로 변모하지 못했고, 친일 국민은 식민지 노예 상태에서 자주독립을 못했으며, 분단국민은 스스로 민족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말하자면, 국민 이미지는 시대마다 참다운 한국사람 집단자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20세기 국민국가들이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전쟁 따위를 해서 인류 자기파괴를 감행해 온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에 학교교육이란 그 자기파괴 인류사를 압축하고, 겨레 분열을 가중시킨 역사 주범이었던 것이다.”라고 ‘국민’이란 말에 담긴 뜻을 헤아려 짚었다.

1948년 월남한 뒤 경기도 군자국민학교를 거쳐 1954년 서울 청량초등학교(옛날에는 청량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1986년 다시 그 학교로 돌아와 평교사로 정년퇴임했다. 평생 교단에 있는 동안 제 발로 교단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교원노조(한국교원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5.16 군사정권 때 해직, 학교를 떠나야했다. 또 한 번은 해방 직후 노동당 가입을 거부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동네 꼬마들이 학교 교무실에 걸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에 새총을 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 상부에서는 근무태만으로 교장과 교사들을 문책하면서 함께 파면됐다. 굽이굽이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교육 신념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꼬장꼬장한’ 태도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3.15 부정선거 전에 교장이 교사들을 모아놓고 야당지지 학부모들을 만나 설득을 하라고 시켰어요. 그 자리에서 말했지요. 그런 거 안 하려고 북에서 남으로 왔는데 여기서도 그러는가? 난 그렇게 못한다 그랬지요.” 그러던 김남식은 더욱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복직된 서울 금호학교에서 집게와 양동이를 들고 학교와 집 근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늘 청소를 제 7교시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보통 6교시로 수업을 마치잖아요. 흔히 아이들이 혼자서 청소를 하고 선생님한테 가서 청소 검사를 받고 했는데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교육이 제자와 선생이 함께라면, 청소도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늘 함께 했지요” 그랬기에 양복을 입으면서도 넥타이를 매지 않은 지 오래다. “50년대부터 그랬지요. 청소하는 데 거치적거려서요. 풀어두었다가 직원종례시간에 다시 매곤 했는데 그것도 번거롭고 해서 매지 않았지요.” 정년을 한 해 남기고부터는 아예 청소하는 선생님으로 지냈다. 온 종일 집게와 양동이를 잡았다. 서울 와서 줄곧 회기동에 살아왔고 청소했으니 마을 역사를 훤하게 꿰뚫고 있다. 처음 쓰레기를 줍기 시작한 여러 십 년 전 경희대 앞은 복개공사가 되기 전이라서 큰길 절반이 개울이었고 버스정류장도 아주 먼 데 있었다. 연탄을 때던 시절이라 연탄재와 쓰레기가 개울을 늘 메우고 있어서 쓰레기 줍는 일이 아주 힘들었다는 김남식 선생, 그렇게 오랫동안 한결같이 청소를 하다 보니 그이를 모르는 둘레사람이 없다.

옛날에는 넝마주이가 동료로 잘못 알기도 했으며, 초등학교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함께 쓰레기를 줍기도 한다. 피던 담배꽁초를 그이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으려는 얌체들도 있다. 그러면 “난 불쌍한 고아 쓰레기만 줍습니다. 그 쓰레기는 임자가 있으니 임자가 알아서 처리하셔야 하는 거지요”라고 말하면 머쓱해 하며 제 주머니로 넣기도 하지만 투덜대는 이들도 있단다.
 
물처럼, 해님처럼

김남식 할아버지 집 가훈은 ‘물처럼, 해님처럼’으로 아버지 가르침을 고스란히 담긴 말이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 마흔 여섯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물 이야기를 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 물은 부드러워서 못 가는 곳이 없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로 되고 동그란 그릇에 담으면 동그랗게 된다. 물은 칼로도 자를 수 없는 뭉치는 힘이 있다.” 거기에 ‘해님처럼’을 덧붙였다. 또렷하게 한결같이 산다는 뜻이다.
 
쓰레기 줍기를 날마다 하는 아버지를 헤아리지 못하던 아들들도 아버지 옆에 섰다. 먼저 세상을 떠난 철물점을 하던 동생이 만들어준 ‘사랑하는 집게’를 들고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하겠다며 쓰레기를 주웠다는 김남식 할아버지, 너무도 쉽게 버려져 있는 ‘우리 양심’을 줍지 않았을까.

뭇목숨을 앗아간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교화시켜 귀의하게 한 고타마 붓다가 앙굴리말라를 잡으러온 빠세나디 꼬살라 왕에게 묻는다. “대왕이여, 만일 앙굴리말라가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목숨을 죽이기를 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고. 금욕을 하고, 계를 지니고, 좋은 성품을 지닌 것을 대왕이 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빠세나디 대왕은 “세존이시여, 우리는 그이에게 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자리를 내어주고. 옷과 음식과 누울 곳과 병구완을 할 수 있는 약품 같은 필수품을 드려 여법하게 보살펴 보호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참으로 수행자로 돌아온 앙굴리말라를 본 빠세나디는 “존자시여, 존자에게 행운을 빕니다. 나는 존자에게 옷과 음식 그리고 있을 곳과 약품을 공양 올리겠습니다.” 받아들이고는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을 길들이시고 고요하지 못한 사람들을 고요하게 하시며 열반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열반을 얻게 하십니다. 저희들이 몽둥이나 칼로도 길들이지 못한 사람을 세존께서는 몽둥이나 칼도 없이 길들이셨습니다.”라고 칭송하며 물러간다.

요즘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빠세나디처럼 순순히 물러나려나? 아무리 뉘우쳤다고 해도 벌을 받아야한다고 몰아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올올 샅샅이 살피면 현대에도 그런 지도자들을 찾기 어렵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데이먼드 투투 주교와 함께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열어 거짓 없이 죄를 털어놓고 용서를 비는 이들을 사면했다. 이처럼 고운 눈길로 보기에 사람들은 김남식 선생님을 ‘결고운 친일파’라고도 한다. 친일파 결이 곱다니 무슨 말인가? 이제가 어제를 매듭짓는다. 기사를 쓸 때 적어도 그 사람 현황, 적어도 살아있는지를 놓치지 않고 살피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 험한 세상 저리 결고운 분이 살아계시길 바랐기에.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경영코치, ‘연구소통’ 소장으로 소통을 연구하며, 지금즉市 트區 들으面 열리里 웃길 79에 산다. 펴낸 책으로는 <법정스님 숨결>과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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