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문장대(文藏臺), 문자를 감춰둔 봉우리
속리산 문장대(文藏臺), 문자를 감춰둔 봉우리
  • 황찬익
  • 승인 2014.11.01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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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황찬익의 ‘須彌行脚’-1
▲ 속리산 문장대ⓒ2014 불교닷컴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僧職)이 없었다. 임금이 이 직을 주고자 하여 일찍이 정부(政府)에 의논하고, 정부에서 순종하여 이의가 없으므로 마침내 봉작(封爵)하게 되었는데,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문종실록>

“나와 혜각존자는 왕자 시절부터 일찍이 서로 알게 된 사이인데, 서로 도(道)와 마음이 맞아 항상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대사의 공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다 오랜 인연이다. 또한 내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주야로 수백리 길을 달려 왔었으니 그 큰 자비가 어떠하신가? 내가 듣고 놀라서 감동의 눈물이 끝이 없었다.” - 세조

세조가 속리산에 간 까닭은?
속리산에 가면 최고봉인 천왕봉보다 제 2봉인 문장대가 오히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족히 사람 50명쯤은 동시에 올라가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넓은 바위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이 봉우리의 이름이 왜 ‘글월 문(文)자’가 들어간 문장대(文藏臺)가 되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세조 임금이 요양을 위해 속리산을 찾아왔을 때 어느 날 꿈속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일러 주었고, 다음 날 세조가 이곳에 올라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고 해서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구름에 감춰진 봉우리 운장대(雲藏臺)가 글이 숨겨진 봉우리라는 뜻의 문장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세조는 왜 속리산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며, 멀쩡한 산 이름을 바꾼 것일까?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
신미대사는 조선 초 3대 문장가 가운데 하나였던 김수온의 형이다. 아버지 김훈이 폐위된 정종과 가깝게 지낸 죄로 가산을 몰수당하고 관노로 전락하게 되자 법주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지공-나옹-무학-함허로 이어지는 선불교의 법통을 잇는 한편, 한문은 물론 범어와 티벳어, 몽골어까지 능통해서 각국의 경전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속리산 복천암에 모셔진 신미 스님의 부도. ⓒ2014 불교닷컴
조선왕조실록에 신미대사가 처음 언급된 것은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던 해인 1446년 5월27일이다. 세종의 동생이었던 성녕대군이 13세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죽자 태종은 고양시 대자동에 대자암을 창건하고 성녕대군의 묘를 관리하는 능침사찰로 지정한다.

세종은 보위에 오르자 뒤늦게 동생의 묘가 있던 대자암에 불교경전을 봉안하는 의식을 개최한다. 1446년 집현전 수찬인 이영서와 돈녕부 주부인 강희안에게 명해서 성녕대군의 집에서 불교경전을 금니사경하게 하고 이 일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감독하게 한다. 수십 일이 지나 경전이 완성되자 여러 대군들과 신하 그리고 스님 2천 명을 불러 모아 7일 동안 대자암에서 법회를 연다. 이때 법사로 모신 스님이 신미스님이다.

기록상으로는 세종 임금이 신미대사를 처음 만나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사실은 아들이었던 문종 임금이 정승들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확인된다.

“대행왕(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년)부터 비로소 신미(信眉)의 이름을 들으셨는데, 금년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하여 정근(精勤)하실 때에 불러 보시고 우대(優待)하신 것은 경(卿)들이 아는 바이다.” 문종실록 즉위년 4월 6일자

세종대왕과 신미대사가 정말로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1446년에 처음 만났을까? 훈민정음이 반포된 다음해인 1447년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수온의 형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신미라고 하였는데, 수양대군 이유(李瑈)와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심히 믿고 좋아하여,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했다.”

또, 그 뒤로 3년이 지난 세종 32년(1450년) 1월 28일자에는 세종대왕이 신미대사를 침실로까지 불러 설법을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임금의 병환이 나았는데도 정근(精勤)을 파하지 않고 그대로 크게 불사(佛事)를 일으켜, 중 신미(信眉)를 불러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法事)를 베풀게 하였는데, 높은 예절로써 대우하였다.”

▲ 정이품송ⓒ2014 불교닷컴

공교롭게도 세종대왕은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렀던 이 해 4월 초파일에 붕어하면서 아들인 문종에게 신신당부해서 신미대사에게 준비해둔 시호를 내린다.

“신미(信眉)를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로 삼고, 금란지(金鸞紙)에 관교(官敎)를 써서 자초폭(紫綃幅)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주었는데,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僧職)이 없었다. 임금이 이 직을 주고자 하여 일찍이 정부(政府)에 의논하고, 정부에서 순종하여 이의가 없으므로 마침내 봉작(封爵)하게 되었는데,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문종실록 즉위년(1450) 7월 6일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관의 기록처럼 신미대사에 대한 예우는 파격적이었다. 기록상으로 처음 만났다는 1446년부터 문종이 시호를 내린 1450년까지 불과 5년 남짓한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대자암 법회에 참석해서 설법 한 번 한 것 외에는 별다른 공도 없는데 대군들은 무릎을 꿇어 예절을 다하고 왕은 침실까지 초청해서 설법을 청해 들은 후 선교종 도총섭의 직책과 혜각 존자의 시호를 내린 것이다.

한글을 만든 사람들
조선왕조실록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한 첫 기록은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사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위의 실록 기사뿐 아니라 “세종어제훈민정음”으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어제(御製) 서문(序文)에 명기된 것처럼 한글을 만든 사람은 세종대왕이다. 그런데 그뿐일까? 최소한 조력자나 실제 창제의 실무를 맡은 인물은 없었을까?

이제까지 알려진 집현전 학자들의 관여설은 거의 사실무근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인지와 신숙주가 다 끝난 다음에 서문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전 제작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처음 누가 이것을 익숙하게 쓰고 있는지 살펴보면 수수께끼 같기만 한 한글을 실제 만든 사람들의 면면이 드러나지 않을까? 또, 누가 의지를 가지고 이 글자들을 보급해나갔는지를 따져보면 마침내 퍼즐조각처럼 완성된 그림의 윤곽이 맞춰지게 될 것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은 용비어천가다. 정인지와 안지, 권제 등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은 세종이 한글로 원고를 넘겨주자 이 세 사람 외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최항 등이 이를 한문으로 옮기고 서문과 발문, 주석 등을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 속리산 복천암ⓒ2014 불교닷컴

용비어천가 다음으로 만들어진 한글문서가 바로 석보상절이다.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데,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불교 경전으로 부처님 일대기를 25장으로 나누어 서술했으며, 다른 언해본 경전이 한문과 병서로 쓰여졌는데 석보상절은 한글로만 쓰여졌다.

이 석보상절의 각 장 말미에 세종이 직접 부처님의 일생을 찬하는 노랫말을 붙인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뒤에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자 요절한 장남 의경세자를 위해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서 월인석보를 간행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책 이 네 권 중에 세 권이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새로 만들어진 글자를 익숙하게 사용해서 저술을 한 사람은 세종 자신과 아들 수양대군이다.

10여 년 전, 해인사 지족암의 일타스님이 중국 고서점에서 발견해서 학자들에게 사본으로 건넸다고 하는 언해본 경전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통 3년 천불사에서 간행했다는 이 경전은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으로 인쇄된 <원각선종석보>이다. 문제는 ‘정통 3년’인데 훈민정음이 창제된 1443년이 정통 8년이요 반포된 해는 정통 11년으로 반포도 창제도 되기 전에 이미 책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학계에서는 신미대사를 이 책의 저자로 추정한다. 세조가 즉위해서 찾은 사찰이 모두 신미대사가 머물렀거나 관계가 있는 곳들이다. 신미대사가 속리산 복천암에 있을 때 온천을 간다고 거둥해서 복천암에 가서 3일 동안 법석을 열었다. 이때 복천암 방문으로 정이품송 설화나 문장대 이야기, 목욕소 이야기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 상원사 문수동자상ⓒ2014 불교닷컴
신미대사의 고향 영동 반야사의 중창불사 회향일도 마침 이때에 맞춰져 있어서 세조는 속리산 넘어 영동 반야사까지 내려가 중창불사 회향법회에 참석한다. 반야사에도 절 뒤편 망경대의 영천에서 목욕을 하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조는 복천암을 다녀간 지 두 해 뒤 다시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간다. 이때도 신미대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유명한 상원사 문수동자 이야기나 고양이 설화 등이 이 거둥 때 만들어지고 전해지게 된다. 신미대사는 세조의 도움으로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최초의 한글 필사본인 <상원사중창불사권선문>을 남기기도 했다. 다음은 권선문의 일부로 세조가 남긴 어첩의 내용 가운데 일부다.

“나와 혜각존자는 왕자 시절부터 일찍이 서로 알게 된 사이인데, 서로 도(道)와 마음이 맞아 항상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대사의 공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다 오랜 인연이다. 또한 내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주야로 수백리 길을 달려 왔었으니 그 큰 자비가 어떠하신가? 내가 듣고 놀라서 감동의 눈물이 끝이 없었다.”

간경도감과 능엄경언해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4년 만에 붕어하고 문종과 단종 시기에 한글 보급과 관련한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던 데 비해 세조는 즉위하자 곧바로 간경도감을 만들어 불교경전의 제작과 보급에 뛰어든다.

간경도감은 11년 동안 29종의 불교경전을 언해본으로 만들었는데, 성종 때 간경도감이 폐지된 후 그나마 16세기까지 10종의 경전이 더 만들어지다가 그조차 끊겨버린 것과 비교해볼 때 세조의 의욕이 얼마나 왕성했는지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능엄경언해는 이후 언해본 불교경전을 만드는 표본이 되는 경전으로 간경도감이 만들어진 후 첫 간행물이 된다. 이 능엄경언해의 어제 발문(御製 跋文) 부분에는 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上이 입겨ᄎᆞᆯ ᄃᆞᄅᆞ샤 慧覺尊者께 맡기어시ᄂᆞᆯ 貞嬪韓氏等이 唱準ᄒᆞ야ᄂᆞᆯ 工曹參判臣韓繼禧 前尙州牧使臣金守溫ᄋᆞᆫ 飜譯ᄒᆞ고 議政府檢詳朴楗 護軍臣尹弼商 世子文學臣盧思愼 吏曹佐郞臣鄭孝常은 相考ᄒᆞ고 永順君臣溥ᄂᆞᆫ 例一定ᄒᆞ고 司贍寺臣曺變安 監察臣趙祉ᄂᆞᆫ 國韻 쓰고 慧覺尊者信眉 入選思智 學悅 學祖ᄂᆞᆫ 飜譯 正해온 後에 御覽ᄒᆞ샤 一定커시ᄂᆞᆯ 典言曺氏 豆大ᄂᆞᆫ 御前에 飜譯 닑ᄉᆞ오니라.”

즉, 세조가 직접 한문에 구결을 달고, 신미대사는 구결이 붙은 문장을 확인하며, 정빈 한씨(인수대비)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교정하면 한계희와 김수온이 이를 정음으로 번역한다. 박건과 윤필상, 노사신과 정효상이 번역된 문장을 서로 비교하면서 검토하면 영순군 부(광평대군의 아들)가 예(例)를 정하고, 조변안과 조지가 동국정운음으로 한자음을 단다. 이를 다시 신미대사와 사지, 학열, 학조 스님이 검토하면서 잘못된 번역을 고치고 나면, 세조가 최종적으로 번역을 확정하고 상궁 조두대가 소리내어 읽는 순으로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한글은 중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철저히 비밀리에 만들어졌다. 공식적으로는 세종 혼자 만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비밀의 장막 속에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관여해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참여했을까? 만들어진 것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석보상절을 쓴 세조,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는 세종,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쓴 신미스님과 더불어 아마도 초창기 간경도감에 몸담고 직접 번역작업을 했던 이 사람들이 실제 한글의 창제과정에서부터 깊이 관여했던 인물들 아닐까?

이 인물들의 중심에 신미대사가 있다. 철권통치를 하던 세조로 하여금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스스로도 속리산으로 오대산으로 찾아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신미대사다. 그런 점에서 속리산 꼭대기에 올라 봉우리 이름을 문장대(文藏臺)로 고치면서 숨겨둔 것은 글자 자체가 아니라 글자를 만든 인물 신미대사일지 모른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90년대 초, 불교계와 인연을 맺고 불교계 잡지사와 총무원, 사찰 등에서 생활하는 틈틈이 전국의 산과 절을 자주 찾아 나섰다. 그 동안 산언저리나 절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들을 스토리텔링해서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기도도량을 찾아서>,  <이야기가 있는 산행> 등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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