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경지
대원경지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14.11.17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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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 26

크게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서 구경각을 성취하면 이것을 견성이라고 하는데 그 견성은 대원경지를 내용으로 한다. 대원경지란 제8아뢰야 무기식이 다 끊어지고 진여본성이 발현함을 말하진다. 구경각을 성취한 자리, 즉 자성을 깨친 그 자리는 교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선가에서도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표현한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떨어지면 제8아뢰야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미세유주(微細流注)라 한다. 실지에 있어서 ‘생각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바의 육진 경계’를 완전히 벗어나서 대무심지에 들어가면, 그 작용[行相]이 미세해서 보통 중생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재위 이상의 대보살들도 잘 모르니 그것을 미세유주라 한다. 미세유주를 벗어나야만 대원경지가 드러나는 것이니, 설사 대무심지에 머물렀다 해도 미세유주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것이니 산 송장이며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공부를 하려면 무분별심인 미세유주까지도 뿌리를 뽑아버려야만 공부를 성취한 사람이고 대원경지를 성취한 사람이며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이다.

갓난아기가 비록 육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나 아직 육진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장단과 시비득실을 모두 알지 못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이 갓난아기와 같아져서 영욕과 공명과 거슬리는 감정과 좋은 경계가 그를 동요시키지 못하며, 눈으로 색을 보되 맹인과 같고 귀로 소리를 듣되 귀머거리와 같으며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동요하지 아니함이 수미산과 같아야 한다. 지음과 인연의 생각이 없으며 푸른 하늘이 넓게 덮음과 같고 두터운 땅이 넓게 떠받치는 것과 같으니 무심인 까닭으로 만물을 잘 길러 이와 같이 공용이 없는 가운데 공용을 베푼다. 비록 이러하나 또 다시 굴 속에서 뛰어 나와야 옳다. 여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조사의 공안도 모르게 된다.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고 아무리 무공용지에 들어가서 참말로 자기가 자재한 것 같지마는 여기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佛法)은 꿈에도 모르진다. 오직 고인(古人)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 한다. 맑고 고요하여 공적한 여기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

제8 이숙식이 금강도 위에서 공하면 인과를 초월하여 바야흐로 대원경지로 바뀐다. 무구가 동시에 나타난다 함은 불과위(佛果位)가운데서는 대원경지를 무구라 하니 이것을 청정한 진여인 까닭이다. 만약 대원경지로 상응하면 법신이 명백하게 나타나서 둥글고 밝게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이(理)와 지(智)가 하나로 같아서 바야흐로 구경인 일심의 본체를 증득한다. 이것이 유식의 지극한 법칙이며 여래의 극과이다. 이 제8식이 깊이 잠겨서 깨뜨리기 어려우니 이 이숙식을 실끝이라도 투과하지 못하면 끝까지 생사의 언덕에 머문다. 덕이 높은 옛 큰스님과 모든 조사들이 이 제8식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부처를 뛰어넘고 조사를 뛰어넘는 심오한 이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오늘의 사람들은 생멸심도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여러 가지로 물든 번뇌의 종자를 털끝만큼도 정결케 하지 못하고서 문득 도를 깨쳤다고 사칭한다. 어찌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 하고 증하지 못하고서 증했다고 함이 아니리오. 참으로 두렵고 두렵지 않은가.

대개 상(常)은 법신이요, 적(寂)은 해탈이요, 광(光)은 반야에 비유한다. 그래서 상․적․광이라 하면 법신과 해탈과 반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원융무애한 것을 말한다. 적(寂)이라 하면 분별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아뢰야 미세념까지도 완전히 끊어져 없어진 곳을 말하느니만치 이것이 대원경지이니 상적광(常寂光)이 여기서 성립되진다. 부처님 경계라는 것은 살았거나 열반하였거나를 막론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상적상조(常寂常照)한 이 경계 가운데에서 백억화신을 나투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근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상적상조하는 법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공부가 아니니까 상적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다. 분별망상이 조금이라도 그대로 기멸하면 상적이 될 수 없고, 일체 분별망상이 다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간다 해도 무분별지라는 조체(照體)가 남아 있으면 상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상적은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나타나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니 이 경계를 우리가 실지로 성취해야 된다. 그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견성은 구경각을 말하며 무생법인을 그 내용으로 하진다. 제8아뢰야 무기식까지 벗어난 무심지에 들어감에 있어서 한번 뛰어 넘어 바로 여래지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중생이라는 것은 근기가 여러 가지가 있어 바로 들어가기 어려운 동시에 또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다. 설사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해서 숙면일여의 무심지에 들어갔다 하여도 보통 중생이 생각하는 무심은 크게 죽었을 뿐이지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제8아뢰야 무기식, 미세유주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살아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원오스님이 몽중일여에 들어간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여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화두를 자꾸 참구시켜 결국은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케 한 것처럼 우리도 무심지에 들었다 해도 부지런히 화두를 의심하여야 한다.

아난존자가 깨치지 못해서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난 후 용맹정진으로 공부하여 깨친 뒤에야 결집에 참여해서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경들을 결집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 해도 우리 불법은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많이 듣기로는 제일이지만 법을 전하는 데 있어서는 가섭존자의 법제자가 된다. 아난존자가 30년 동안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며 모든 법문을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가섭존자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불법이란 근본이 깨치는 데 있지 언어문자의 기억이나 총명함에 있지 아니하다진다. 이것이 불교의 생명이다. 그 이후로 누구든지 불교역사를 쓸 때는 아난존자를 가섭존자의 법제자로 하고 있다. 우리도 아난존자같이 용맹정진하여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디를 가도 쫓겨날 것이다. 아난이 열반한 후에 모든 비구들이 각각 좌선만 익히고 다시는 경전 읽는 것을 익히지 아니하고 말하되 “부처님에게 3가지 일이 있으니 좌선이 제일이다” 하고 마침내 각각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것을 폐지하였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가지 수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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