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점수 비판
돈오점수 비판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14.11.2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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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 27

해오(解悟)에서의 ‘해(解)’라 함은 지해(知解), 즉 알음알이이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佛法)의 성품 모양[性相]을 알긴 알았는데 분별심으로 알아서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이 그대로 있다. 이에 반하여 증오(證悟)라 하는 것은 실지로 자성을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해서 참으로 체득한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룬다’고 한다.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구별이 전자는 구경각을 깨침을 말하고 후자는 사량분별로써 아는 것이다. 심해(心解)니, 지해(知解)라 하기도 한다. 육조선(六祖禪)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증오(證悟), 즉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오(解悟)인 지해(知解)는 삿된 종[邪宗]이라고 해서 배격하였다.

수심결에 나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先悟後修]하는 근본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못 전체에 얼음이 꽝꽝 얼어 붙어 있는데,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이것을 신해(信解)니 해오(解悟)라 한다. 알긴 알지만, 실지에 있어서 부처를 이룬 것은 아니고 범부 그대로 있다. 얼음 그대로가 물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은 얼음은 그대로 있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중생의 번뇌망상 그대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력(法力)에 의지해서 자주 닦아가야 된다.[先悟後收] 여기서 돈오(頓悟)라 하는 것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중생 그대로임을 깨친 것을 말한다. 얼음이 그대로 있듯이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따뜻한 기운을 빌려야 하고,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꾸 자꾸 닦아가는 점수(漸修)가 필요하다.

선종정맥에서는 돈오(頓悟)라 하면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했다. 돈오한 동시에 돈수(頓修)여서 후수(後修)가 필요없다.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안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얼음이 녹아서 물로 완전히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을 말한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이니 제8아뢰야 무심(無心)을 물에다 비유한다. 돈오돈수는 깨달음[悟]이라 하면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진 자체, 무심의 경계 이것도 벗어남을 말한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어 물이라고 하는 자체도 볼 수 없는 이 구경지(究竟地)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돈오한 뒤에는 어떻게 점수(漸修)해야 되는가? 목우행(牧牛行)을 보림(保任)이라고도 하는데 점수설(漸修說)에서 말하는 것은 예전 큰 스님들의 목우행과는 천지차이이다. 자명(慈明)스님이 지은 목동가(牧童歌)가 있는데 거기 보면 참으로 구경을 성취해서 호호탕탕히 자재하고 무애한 행을 목우행이라 하였지 망상이 전과 다름없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다.

돈오돈수라 함은 이는 상상지(上上智)를 말함이니 근기의 성품과 욕락이 모두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총지를 증득한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 이 사람의 세 가지 업은 오직 스스로 분명히 밝아서 다른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 장애를 끊음은 마치 한 타래 실을 끊음에 만 가닥이 단박 끊어짐과 같고, 덕을 닦음에는 마치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물드는 것과 같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으니까 차제로 삼현․십성을 닦아서 올라가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한칼에 한 뭉치 실을 다 베어버리듯이, 또한 뭉치실을 다 물들여 버리듯이 하나 끊을 때 전체가 다 끊어지고 하나 물들일 때 전체가 다 물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믿음을 이룸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믿음을 말한다. 그렇게 믿어서 망분별의 의심이 없는데 이르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 그리하여 중생이 부처님 자성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확신해서 의심하지 않는 데에서 실질적인 믿음, 신해(信解)가 성립된다.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신해(信解)하여 성품을 의지해 선(禪)을 닦는다. 이것이 옛부터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루는 긴요한 기술이다.

보조스님이 말하는 돈오한 사람, 해오한 사람의 경지가 어찌 되느냐 하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은, 망상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법문도 옳게 못하고 문답도 못하지만 점점 닦아가서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 선종정맥에서는 깨쳐서 법담을 잘 한다 하여도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아니하고 원오스님 같은 이는 수좌를 저 폭포수에 집어넣고 아주 어려운 질문을 물어서 척척 대답하니까 그때서야 옳게 알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그런데 규봉이나 보조스님은 아직까지 법문도 못하고 문답도 못하는 것을 돈오하고, 해오라고 하여 깨쳤다고 하니 이것을 어찌 선종이라고 하겠는가!

마조에게는 점수문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마조스님은 구경각을 성취한 데서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여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다. 마조스님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없는 입장이고 규봉스님은 아직 병이 그대로 있어 약을 더 써야 할 입장이다. 규봉스님 말대로 하자면 병 다 나은 사람도 생다리를 부러뜨리고, 생배를 째서 억지로 병원으로 가서 약을 써야 하는 격이다. 도를 닦는 근본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쓸 필요없이 참으로 자유자재한 근본 해탈이 목적이지, 실제로 병 그대로 가지고 약을 먹고 붕대를 첩첩이 감고 다니면서 내가 돈오했다, 견성했다는 길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선종에 있어서 누구든지간에 마조가 정맥이냐 규봉이 정맥이냐 하면, 천하의 선종에서 규봉을 지해종(知解宗)이라 배격을 했지 마조를 틀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조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규봉 혼자만이고 그 규봉을 지지한 사람이 보조스님이다.

마음을 깨침이 원만치 못하다 함은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미세한 제8아뢰야 근본무명이 남아 있는 경계를 말한다.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한 것임을 확실히 알 때는 다시 발심하여 크게 철저하게 깨쳐야 하는데,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천(履踐) 즉 보림(保任)한다, 점수(漸修)한다 하여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섶을 지고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불은 끄지 못하고 불꽃만 더욱 사납게 타오르도록 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교(敎)로 나아가면 삼아승지겁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성불하지만, 선문의 경절문 활구로 들어가면 바로 깨쳐버린다. 교의 원돈신해문으로 나갈 것 같으면 돈오해서 점수하니까 말 길이 있고 뜻 길이 있어 듣고 이해하는 것, 즉 지해(知解)가 근본이 되어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불은 늦어진다.

돈오점수를 순전히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조스님을 다 모르는 사람이다. 팔백년 후인 지금에 돈오점수가 선종사상(禪宗思想)이라고 주장한다면 보조스님이 살아계셔도 웃을 일이다. 분명히 보조스님 자신이 달마스님의 깊은 뜻이 돈오점수에 있다고 해놓고, 다시 그 뒤에서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敎外別傳者 不在此限]’고 하였다. 우리는 냉정히 비판적 입장에 서서 진실을 보아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가적(敎家的)인 원돈신해(圓頓信解),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구(死句)로는 들어가지 말고 경절문(徑閒門)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화두(話頭)를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깨쳐서 자성을 밝힌 사람, 곧 견성(見性)한 사람은 삼신(三身)․사지(四智)가 원만히 구족한 부처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니 이것이 증(證)한다는 말의 참 뜻이다.

원오스님도 대혜스님에게 대적멸처에 있어도 거기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했다. 대적멸처인 오매일여에서도 크게 화두를 참구해서 살아나야만 비로소 바로 깨친 사람이다. 선문에서 화두참구하는 사람은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일체를 모두 없애야 한다. 오매일여한 대무심지라 해서 화두참구 안하면 외도이다. 하물며 적멸처도 아닌 사량분별이 남아 있는 곳에서 보림한다, 목우자한다고 화두를 버리면 자기가 망하고 천하사람이 다 망한다. 대적멸지, 오매일여에서도 화두참구해서 확철히 깨친 사람은 증(證)한 것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다. 이것이 실지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선이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가지 수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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