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옷 사연
누비옷 사연
  • 현각 스님
  • 승인 2014.12.0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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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75.

수은주가 곤두박질을 거듭하고 있다. 바람도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일까. 대추나무에 걸린 연 마저도 도파니 날려버릴 듯하다. 성글게 자리 잡고 있는 은행잎이나 단풍잎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푸거푸 몰아내는 거센 바람이다.

피부에 암팡스레 파고드는 바람을 거부하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누비를 꺼낸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하여 추위와 더위를 극복하려고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어찌 보면 선택된 동물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털갈이로 체온을 유지하는 동물을 보면 더욱 그렇다.

어느 날 한 객스님이 동산양개 스님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산 스님: “어째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지 않느냐?”
객스님: “도대체 그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동산 스님: “추울 땐 그대를 철저히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철저히 덥게 하는 곳이다.”

철저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범부들은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기 마련이다. 그래서 춥다고 누비를 찾는다.

누비(縷緋)란 말은 승복의 납의(衲衣)에서 비롯되었다. 납은 ‘깁는다’는 뜻이다. 불교가 발생한 당시부터 고행의 한 수행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이 내 버린 낡은 헝겊을 모아서 누덕누덕 기워 만든 옷을 입었다. 혹자는 그래서 누덕의(累德衣)라고 말하기도 한다. 흔히 누더기라고 쓴다. ‘덕을 쌓는 옷’이라는 말이 얼핏 듣기에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기실은 고행의 목적에 부합되는 옷은 아닌 듯하다.

조선조 숙종이 하루는 밤이 이슥한 시간에 궁궐 뜰을 거닐었다. 나인들의 방을 지나게 되었는데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발견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숙종은 방문을 열었다. 방에는 한 여인이 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있었다. “야밤에 무슨 일이냐?” 하고 숙종이 물었다. 여인은 부들부들 떨며 “오늘이 폐비가 되신 중전마마의 생신이라 조촐하게 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아뢰었다. 그 말을 듣고 숙종은 가슴이 찡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희빈의 방자함 때문에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이었다. 숙종은 최무수리의 마음씨에 감동을 받아 하루 저녁을 그곳에서 보냈고 그 후 간혹 그녀의 방을 찾았다. 결국 숙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이다. 후일 조선의 21대 임금 영조가 되었다.

영조와 그의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 오간 대화는 모자의 애틋한 정이 흠뻑 묻어난다.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가장 하기 어려우셨습니까? 중누비, 오목누비, 납짝누비 다 어렵지만 세(細)누비가 가장 만들기 힘들었지요.

어머니 얘기를 듣고 영조는 그 자리에서 누비와 토시를 벗어 놓고 두 번 다시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
누비옷을 평생 입지 않은 영조는 동산 스님의 가르침에도 철저했던 것 같다. 추울 땐 그대를 철저히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철저히 덥게 하라는 그 이치를 따랐음이 아닐까. 수라상 역시 매우 간소하였다.  요사이 유행하는 웰빙식단이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는 52년이란 재위 기간을 누리기도 했다.

지하도를 오르내리다 보면 숨이 차는 데도 시선이 멈추는 곳이 있다. 팔, 다리를 오므리고 등도 구부린 사람의 모습을 본다. 오므렸다기 보다 최대한으로 몸을 밀착시켰다고 표현해야 적절한 말일 듯하다. 바닥에는 포장상자를 깔고 덮개는 달랑 신문지 한두 장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무심한 바람은 무슨 샘이 났는지 꾀꾀로 노숙자의 육신을 파고든다. 살아 있는 물체의 움직임 같이 신문지가 그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바닥에 깔린 포장상자도 신문지 조각도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헐벗은 사람의 업장을 연소시키는 불쏘시개 말이다. 그리하여 완전 연소되는 날 푸른 꿈은 날개를 펼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고구마 굽는 냄새이다. 드럼통에 장작개비를 번갈아 넣으며 고구마를 굽는데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해 보인다. 추운 날의 모습은 더욱 여유로워 보인다. 불에 달구어진 홍조 띈 얼굴은 온갖 시름을 다 잊은 편안한 모습이다.

오늘은 왠지 누비옷을 입은 어깨가 무겁다. 저 지하도에서 이 밤을 지새울 노숙자가 눈에 밟혀 그렇고, 고구마를 구어 내어 판때기에 진열하고 있는 모습이 또한 그렇다. 누린다는 것과 그렇지 못하다는 단순한 대비로 행과 불행을 가늠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자문하며 버스정류장으로 뚜벅뚜벅 발길을 옮긴다.

어머니의 노고를 생각하며 영조 임금도 평생 입지 않았다는 누비옷이고 보면 내 마음을 더욱 짓누른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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